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95
윤이별.
이전 삶에서 그녀가 네비게이터로 정평이 난 것은 비단 그녀가 가진 아티펙트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티펙트 나비의 가호를 보강하는 기프트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나비의 가호는 도구에 불과해. 윤이별의 진가는 바로 기프트였지.
기프트 .
소유자의 체내 마나가 깃들어 있는 존재의 시각을 공유하는 기프트.
윤이별은 나비의 가호를 사용하여 수십 마리의 나비를 만들어냈으며, 그 나비의 시각을 공유하며 전황을 다방면으로 살필 수 있었다.
네비게이터로서 굉장히 적합한 기프트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온태양의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파티 내에 를 사용하는 사람이 둘로 늘어난다는 거야.
기프트 .
온태양은 자신의 기프트를 사용해 윤이별의 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온태양이 를 사용하게 될 경우, 그는 자신의 기프트로 연결된 파티원들의 시각까지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온태양은 제2위계 몬스터 매구의 공격을 피해서 놈의 빈틈을 노릴 수가 있었다.
온태양을 파티에 넣지 못하더라도 윤이별의 기프트는 상당히 유용해.
아마도 동세대 플레이어들 중에서 윤이별 같은 네비게이터는 찾아볼 수 없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파티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호의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내심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고 있던 셈이다.
“내가…, 그렇게 싫어?”
그런데 그녀가 고백을 했다.
그녀의 마음을 일부러 모른 척하던 은하는 이제 모르는 척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은하는 간절하게 빌 듯 애원하는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싫은 건 아니야.”
“그러면 왜…, 그러는 거야?”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
한참만에 입을 뗀 은하.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은하는 자신의 진심을 토했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윤이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꾹 참으며, 오히려 그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나하고 1년만 사귀면 안 되냐고 부탁하는 거야.”
“…….”
“내가 좋지도, 싫지도 않는다는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니? 사귀면서 알아갈 수도 있는 거잖아.”
“…….”
“그것도…, 싫어?”
자존심을 다 버리면서까지 그녀가 울먹거린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제 자신에게 모든 처우를 맡긴 포로였다.
죽이든 살리든 뭐든 할 수 있다.
은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하면서 날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건가?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간단하다.
노은하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를 바꿀 것을 결심한 노은하는 그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알몸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된 그녀를 거절한다는 의미는 미래에 로 거듭날 유망주를 잃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넌 그래도 그걸로 괜찮은 거야?”
“…응. 나는 괜찮아. 그래도 좋아. 그걸로…, 만족해.”
“…….”
“내가…, 은하 네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해볼게.”
윤이별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텐데도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은하는 섣불리 답할 수가 없었다.
“후우….”
그만 한숨이 새어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건 이용한다.
그것이 설령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지 않아도…, 자꾸 약혼제의를 거절하는 것도 이제는 힘들기는 해.
뭐라도 대책을 세워놓긴 해야 해.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한다.
이제 17세, 며칠 후에 18세가 될 자신이 정재계에서 들어오는 약혼을 거절하는 명분이 사라지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넉넉잡아 2년.
자신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되면 학업을 이유로 약혼을 거절하게 된 명분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각계에서 들어오는 약혼제의를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밥은 먹어줘야 하리라.
무엇이든 이용하기로 결심했다면, 내 약혼조차 이용할 수 있어야 해.
노은하.
아직 졸업을 하지도 않았는데에도 정재계와 업계가 주목을 하고 있는 자신이 편히 결혼할 수 없을 거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하는 여차하면 약혼 또한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략결혼이란 무기는 최대한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였다.
일말의 죄책감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상대한테, 미안하잖아.
나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건데.
자신이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험난한 길을 걸어가게 될 자신은 필시 상대를 챙겨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기만 했다.
상대 또한 자신을 정략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모를까, 아주 만약 자신을 좋아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1년이 지나고도 나한테 사귀어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정말 약속할 수 있어?”
은하는 윤이별의 어깨 너머에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하양이 무대 위에 올라와 있다.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그녀가 어떤 심정을 하고 있을지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양이는 안 돼.
정하양은 안 된다.
앨리스그룹의 직계인 그녀는 분명 정략결혼의 상대로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조금도 정략결혼의 상대로서 생각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마음껏 이용한대도 상관없다고 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아무리 무엇이든 이용하겠다 해도, 하양이 마음까지 이용할 수는 없어.
은하는 정하양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다시 멀리하겠노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윤이별하고 연애를 해서, 하양이가 나한테 실망하게 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어.
그 순간.
그는 윤이별이란 존재가 도구로서 얼마나 매력적인지 깨달았다.
윤이별을 이용한다.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여 윤이별이 자신의 파티를 영영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동시에 그녀를 이용해서 정하양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을 모두 버리게끔 한다.
결론이 났다.
은하는 희망을 품듯 바라보고 있는 윤이별에게 답하기로 했다.
“─네 이야기는 잘 알겠어. 난….”
사랑은 계약이고, 거래다.
사랑을 담보로 하는 아주 확실한 거래는 없는 셈이다.
그녀가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듯, 그도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니 거래를 성사시키는 담보로 거짓된 사랑을 기꺼이 내주─.
“─…엥?”
노은하는.
무대 위에서 정하양이 꺼낸 말에 그만 벙찌고 말았다.
☆
나는, 고백을 하지 않겠다.
이대로 이 마음을 담아두겠다.
어차피, 은하가 받아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하지 않고 후회할 바엔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하지만.
─나는 못하겠어.
정하양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하고 나서 후회할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게 나았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보이지도 않는 희망 따위에 의지해 넝마가 된 마음을 지킬 수 있고.
그렇다.
마음은 진즉 넝마가 되어 있었다.
“하양아,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서나야. 아무 일도 없었어.”
몇 번인지 모르겠다.
은하를 알고 나서 어언 12년.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둔해서 알아차려주지 않았다.
언젠가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분개해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좋은 걸 어떡해.
그때 그녀는 이미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이는 똑같건만.
그는 나이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굉장히 어른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무척 다정했으니까.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거절하더라도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너랑 나랑.’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같이 가고 싶어?’ ‘…아니. 정말 너랑 나랑?’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을 들여 드디어.
그녀는 그의 마음 또한 자신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통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은하는 문화제가 끝나고서 다시 차가워졌다.
‘─미안해. 내가, 아직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때 은하에게 그 말을 듣고.
정하양은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온갖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날 가지고 논 거야?
내가 그렇게 가볍니?
내가…, 너한테 겨우 그 정도였어?
내가…,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
왜 맨날 너는 그런 식이야?
일전에 그에게 한 번 거절을 당한 그녀는 그의 두 번째 거절이 너무나 분했다.
방에 틀어박혀 엉엉 울었더랬다.
자존심이 꺾인 것은 물론이었으며 자존감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두 번이나 거절을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그를 좋아하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하양아, 이제 송년회도 끝낼 겸, 네가 마지막으로 건배사를 하는 건 어때? 할 수…, 있지? 힘들면 그냥 내가 할까?”
“…아니야. 내가 할게.”
이제는 힘이 나지 않았다.
자존심이 꺾이고, 자존감을 잃고, 용기를 상실했다.
정하양은 체념했다.
‘은하한테 내 마음을 고백해보기로 결심했거든.’
‘─소용없을 거야.’
그래서 윤이별이 부러웠다.
그때 정하양은 자존심을 그러모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윤이별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은하에게 거절당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었을 뿐이다.
[그럼! 마지막 건배사 나갈게요! 이번에는 송년회를 주최한 하양이가 건배사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정하양은 무대에 올랐다.
잔을 채운 학생들이 무대 위에 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자신과 친한 친구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찾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노은하였다.
…은하는 어디에 있을까?
최근 노은하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오늘도 은하는 간단히 인사만 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정하양은 이제는 그에게 왜 자신을 피하는 것이냐고 따질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서글플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하양은 여기 어딘가에 있을 노은하를 찾아 헤맸다.
아….
마침내 노은하를 찾았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발코니.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커튼이 펄럭이고 있다.
그녀는 이내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노은하와 같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윤이별이다.
“…….”
정하양은 입술을 깨물었다.
노은하가 거절할 것을 알았음에도 신경이 쓰이기만 했다.
[다들 오늘 즐거운 시간이 됐다면 좋겠어요. 올 한 해 정말 감사했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건배사를 제의할게요.]“”””네─!!!””””
“”””정하양 예쁘다!!!””””
두 눈은 발코니를 향하고 있지만, 입은 좌중을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양은 마이크를 꼭 쥐고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을 읊어나갔다.
[제가 ‘내년에도’라고 선창하면─.]마음이 썩어문드러지는 것 같다.
노은하가 정말로 밉다.
그럼에도 그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그를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너무나 자괴감이 든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별이는…, 고백했을까.
정하양은 건배사를 마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선창만 하면 되는데.
그녀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처연하게 발코니를 쳐다보았다.
은하와 눈이 마주쳤다.
노은하가 눈길을 돌린다.
삐이이이익!!
노이즈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심결에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부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노이즈가 들려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서나가 음향장비를 확인하러 가고, 정하양은 이제 모가지가 떨어져나간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다댔다.
“저는─.”
노이즈가 멈췄다.
정하양은 입을 열었다.
“저는─….”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자신이 왜 이곳에 서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화가 났고, 슬펐고, 원망이 갔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차치하고서도 노은하를 너무나 좋아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이 아파해야 하는 거지?
그러다 의문이 들었다.
왜, 어째서.
노은하는 저리도 태연하게 있는데 자신은 이리도 슬퍼하고 있는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이별이한테 고백 받고 좋니?
팔자도 참 좋다.
정하양은 욱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신이 윤이별이 은하에게 고백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참 호구 같다고.
“”””…….””””
자신은 아직 절실함이 부족했다.
그걸 자각하자 시야가 탁 트였다.
자신이 정말로 노은하를 좋아하면 바보 같이 그에게 퍼주기만 할 게 아니라─.
─때로는 최가인처럼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해.
우습지만 그래야 했다.
영악하게 행동할 줄 알아야 했다.
괜히 노은하에게 잘 보이고 싶어 마음을 억누르고 있어서는 안 됐다.
괜히 착한 사람으로 보이겠다면서 다른 사람이 그에게 고백을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됐다.
그러니 판을 뒤집어야 한다.
까매져야 한다.
“나는─.”
노은하가 자신을 멀리하지 못하게.
윤이별이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자신은 노은하를 가질 수 있도록 빼도 박도 못하게.
“─나는 은하 너를 좋아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이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정하양은 자신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은하를 바라보면서 까만 미소를 지었다.
노은하에게 한 방 먹였다.
속이 아주 시원했다.
“”””─엥??””””
학생들이 단체로 벙찐 가운데.
정하양은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어디─.
─너 죽고, 나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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