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96
정하양이 고백했다.
은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대로 상황파악도 되지 않은 채로 파티회장으로 눈을 돌리니 학생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벙찐 얼굴이었다.
…이게 뭔 일이래.
학생들이, 친구들이 자신을 보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은하는 번지수를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명은 자신에게 물을 게 아니라 갑자기 건배사를 제의하는 자리에서 고백을 해버린 정하양에게 요구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정작 정하양은 무대 위에서 태연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을 뿐.
“─대답해줘.”
“…….”
“넌 나 안 좋아해?”
심지어 추가공격까지 가하는 그녀.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벗어났음을 그녀가 인지시켜주는 순간이었다.
즉, 엎질러진 물이다.
주워 담을 수 없다.
이미 그녀는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꺼냈으며, 이제 그의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려하지 않았다.
“”””…….””””
장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은하는 그들의 시선을 받는 채로 잠자코 무대 위에 서 있는 정하양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웃음을 짓고 있다.
어서 대답을 해달라는 듯이.
…미쳤어.
쟤가 아주 사고를 쳤어.
은하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정하양이 최악의 수를 둔 것이다.
앨리스그룹의 직계가 공개적으로 고백을 한 셈이었으니까.
만약 은하 자신이 고백을 거절하면 이만한 대망신도 따로 없을 것이다.
또한 아카데미에서 그녀의 위신이 곤두박질치게 될 터.
하지만 은하의 가정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었다.
내가─, 거절을 한다면….
나, 원….
은하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웃고 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정하양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수가 묘수가 되기도 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녀가 비록 생사여탈권을 그에게 맡겨놨을지언정─.
─그럼 얘가 지금 나를 협박하고 있는 거야?
정하양, 많이 컸네.
은하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고백을 거절하면서 정하양에게 수치를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파티에 영입해야 할 인덱스의 정하양이었고, 동시에 앨리스그룹의 직계였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양이는 무조건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은하는 자신의 패인을 깨달았다.
정하양이 직계가 아니었을 때부터 그녀와 오랜 시간을 보낸 나머지, 그만 정하양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내가 싫어?”
“…….”
요컨대 그녀를 쉽게 보고 말았다.
정하양이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이 하는 말에는 그게 무엇이든 따를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은하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건만.
그동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당하고 말았다.
“…설마 내가 정하양이 짠 판 위에 올라가게 될 줄이야.”
자조하듯.
은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의 판 위에 올라가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그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하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널 싫어할 리 없잖아.”
정하양의 성장이 대견스럽고.
가슴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은하는 자신이 답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말했다.
“그럼?”
그러자 정하양이 앙증맞게 묻는다.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걷히자, 입을 다물고 있던 학생들이 뭐라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파랑이 샴페인을 터뜨린다.
그러다 배수빈에게 얻어맞는다.
강시형이 그런 그녀를 말린다.
판을 뒤집을 방법은…, 없구나.
그리고 은하는 체념했다.
갑자기 몬스터가 나온다면 모를까.
그녀의 위신에 손상을 주지 않고 판을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하양이 성격상….
내가 고백을 거절하더라도 파티에 들어올지도 몰라.
하지만 하양이는 괜찮다고 해도…. 앨리스그룹이 날 달갑게 생각할 리 없어.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소꿉친구 정하양이 앨리스그룹의 직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대목이었다.
심지어 그는 현재 그녀의 아버지, 정석훈에게 앨릭서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해놓은 참이었다.
정하양의 고백을 거절하게 된다면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던 앨리스그룹이 어떻게 돌변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윤이별도 나한테 고백을 했다는 거란 말이지….
은하는 정하양이 고백했을 때부터 옆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윤이별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
안 돼, 라고.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입술을 뻐끔거린다.
고개를 도리질한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먼저야.
윤이별은 나중에 상대해도 돼.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고등아카데미 학생의 고백.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열 개 기둥 중 하나인 앨리스그룹 직계의 고백.
은하는 냉정히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무엇을 우선해야 할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미안. 다음에 얘기하자.”
“아….”
그래서 은하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에 그녀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은하가 찬란한 조명이 밝히고 있는 파티회장으로 발을 내딛었으니까.
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도 그래. 나도 널 좋아해.”
차은우가 행렬 맨 앞으로 빠져나와 스마트폰을 들이대건 말건.
은하는 당당히 답했다.
“정말?”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정하양의 입꼬리가 크게 올라간다.
화사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는 체념이 섞인 어조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럼 나랑 사귈 거야?”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정하양은 기뻐서 까르르 웃고.
학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은하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한편─.
─이따 두고 보자.
은하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
☆
“─무슨 생각이야?” “내가 뭘?”
“그걸 말이라고 해?”
공개석상에서 고백에 응했다지만.
은하는 연애를 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상황 모면이었을 뿐.
학생들이 두 사람의 연애를 거의 제 일처럼 생각하며 2차를 가자며 분위기를 띄우던 가운데.
은하는 하양의 손목을 낚아채서는 그녀와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냥…. 너는 맨날 네 마음대로 하잖아. 그래서 나도 이번에는 그냥 내 마음대로 하기로 했어.” “…….”
“나는 은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한 사람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야. 나도 누가 나 가지고 놀면 화가 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질투하기도 하는 사람이야.”
이참에 까놓고 말하겠다는 양.
정하양은 날을 세운 은하를 향해 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꾸짖으려 했던 은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솔직하게 말하는 내용에는 하나도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미안해.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배려해주지 못한 것 같아.”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은하에게는 심각한 고민일지라도, 정하양 입장에서는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은하는 날이 선 분위기를 거둬서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거는 그거다.
어떻게든 하양이 고백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해.
은하는 정하양이 저질러버린 일을 어떻게든 무마시키려 했다.
바로 그때.
“이제 알면 됐어. 나도 이런 식으로 널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하지만, 난 진심이야.”
“…….”
“난 너 좋아해. 넌 나…, 싫어?”
아주 빼도 박도 못하게.
이왕 솔직해진 정하양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얼굴이 빨갛다.
눈망울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후우….”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고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은하는 긴 숨결을 흘렸다.
그래,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변에 아무도 없겠다.
은하는 진심을 드러낸 정하양에게 예의를 다하기로 했다.
“─아까 널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
은하는 제 마음을 고백했다.
이전 삶에서 이유정과 나눈 마음과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그는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헌신적인 그녀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품고 말았다.
무심코 그녀에게 눈길이 갔으며, 그녀가 누군가와 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정이었으며, 어찌 보면 소유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게 좋아한다는 거겠지.
사랑한다는 건…,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그는 정하양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근데 사귈 생각은 없어.”
“…….”
몇 번이고 말하지만.
은하는 자신에게 연애란 사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하는 정중히 첨언했다.
환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하지만─.
“─나도 알아.” “뭐?”
“나도 안다고.”
정하양은 침울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에게 대꾸한 것이다.
은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은하 너는 겁쟁이잖아.” “…….”
“맨날 중요한 건 말해주지도 않고, 툭하면 너 혼자 꿍해 있기만 하고, 네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나한테 시간을 내줄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내가 독수공방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정곡이었다.
은하는 말문을 잃었다.
설마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알면서 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은하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러자 정하양이 말하기를─.
“─그러니 우리 잠깐만 사귀자.”
“…뭐?”
“잠깐…, 사귀어보고 나서 결정해. 은하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지 아직 모르는 일인 거잖아.”
“…….”
“혹시 모르잖아. 사귀는 기간 동안 네가 날 너어무 좋아하게 돼가지고 나 없이는 살지 못하게 돼서 나한테 계속 사귀자고 할지도.”
정하양이 새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말을 토한다.
은하는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윤이별도 그러기야 했지만.
설마 그녀가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땅히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잠깐이 얼마나 잠깐이야?”
“음…, 1년. 오늘부터 딱 1년.”
결국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은하는 그녀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사귀자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 그걸 없던 걸로 만들 수도 없지.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상 고백을 없던 걸로 만들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기는 했다.
사귀자고 해놓고 바로 헤어지자고 말해버렸다가는 앨리스그룹의 화를 살 수가 있었다.
그 역시 정하양의 위신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결국 가장 이상적인 해결 방법은 조용히 사귀다가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갈 때쯤에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년 후에 내가 헤어지자 하면 헤어져줄 거야?” “…응…, 그럴게.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1년이라면 적절한 기간이다.
필시 그녀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을 꺼낸 것이리라.
“…알았어. 1년만 사귀자.” “응!”
그야말로 계약 연애.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인 거지?”
“그래, 오늘부터 1일이다. 그리고 이제 좀 나한테 혼나야겠어.” “…보를…자바당기지 마아….”
오늘부터 1일.
낯간지러운 말을 꺼낸 은하는 이내 겸연쩍어하며 그녀의 볼을 신나게 잡아늘렸다.
한편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었다.
하양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1년 뒤에 헤어지자 말해도 하양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좋아하지 않게 만들어야 해.
일명, 정하양의 호감도 떨어뜨리기.
오늘부터 1일이다.
이때, 은하는 자신이 계획한 바가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한국은 그나마 덜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하아….”
한파다.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지 않고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한서현은 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하얀 입김을 불었다.
부우웅
그녀가 공항을 나섰을 무렵.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드디어 통신이 연결된 모양이다.
며칠간 한국에 연락을 할 수 없던 그녀는 반가운 신호를 듣고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냈다.
“…조금 기다려야겠네.”
최상단에 위치한 메시지는 조금 전 자신의 언니 한서연이 보낸 메시지.
가족들이 공항으로 마중 나갈 거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그녀는 일단 제1여객 터미널 안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
“…….”
아무런 생각 없이 메시지 목록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던 중.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뚝 하고 멈췄다.
노은하의 프로필 사진.
어째서인지 정하양이 같이 있다.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은하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정하양.
쿵
한파 때문에.
캐리어가 철퍼덕하며 쓰러졌다.
한서현은 쓰러진 캐리어를 세우려 하지 않고 멍하니 은하의 프로필을 쳐다보았다.
“…킥….”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단순한 키득거림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한서현은 주변 사람들이 쳐다봐도 상관하지 않고 깔깔거렸다.
“내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한서현은 차분히 상황을 파악했다.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은하가 보낸 메시지를 읽기로 했다.
이내 메시지를 읽은 그녀의 얼굴이 묘해졌다.
「왕먹보」: …해서 사귀게 됐어(오후 08:49)
정하양과 사귀게 됐다.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고.
한서현은 변명조로 말하는 내용과 1년 뒤에는 헤어질 것이란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야.”
[…서현이?]한서현은 대뜸 노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은하가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 온 거야?]“오늘 온다고 했잖니.”
[아, 참, 그랬지.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깜빡….]“깜빡? 이게 깜빡할 일이니?”
[누나까지 왜 이래….]한서현이 까칠한 어조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자 은하가 수그린다.
직접 눈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피곤해하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웃었다.
“됐고,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문자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으니까.” [그게….]
“응.”
한서현은 은하가 말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네가 지금 배가 불렀구나?”
그리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신랄하게 은하를 깠다.
그가 연애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심정이 이해가 가기는 했다.
하지만 한서현은 노은하의 변명을 겁쟁이의 개소리라고 치부했다.
“잠깐 기다려봐.”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한서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온 메시지 중에 정하양이 보낸 메시지를 찾았다.
“겨우 사귄 거 가지고 뭘….”
정하양이 보낸 메시지는 자신에게 은하와 사귀게 되었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한서현은 자신에게 극도로 미안해하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는 피식 웃었다.
이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서현 언니?]정하양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정하양은 막상 은하와 사귀었지만 은하가 자신을 멀리하려는 모습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알았어. 얘기해줘서 고마워.” [저 언니…. 언니가 일본 간….]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아니면 지금 날 조롱하려고 그러는 거니?”
[아, 아니야! 미안해! 응! 끊을게!]한서현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구름이 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린다.
춥다.
새하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간다.
“…그런 거구나.”
이윽고.
한서현은 미약하게 어깨를 떨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그녀는 이번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빠.”
[서현아. 지금 거의 다 와….]“저 부탁할 게 좀 있어요.”
[응? 뭔데? 말해보렴.]“약혼, 저한테 어울리는 사람 중에 아직 약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주세요.”
[…내가 잘못 들었나? 뭐라고?]“제 선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요.”
[아니, 왜─!?]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아버지의 외침.
한서현은 귀에서 스마트폰을 떼고, 소리가 잠잠해지자 말을 이었다.
“…약혼을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만약 약혼을 하게 된다면 누가 제 약혼상대가 될지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정말이지?]“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라면야…. 너하고 어울리는 약혼자라면 대충 루미너스그룹의 이유천, 영원그룹의 유도준, 갤럭시그룹의 최정훈….]“정훈 오빠는 저번에 약혼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이유천, 유도준, 최정훈.
그녀는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람들의 이름을 읊조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최정훈이 파혼하게 된 사건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도 약혼시장에 거물이 나온 셈이다.
“그거면 됐어요. 고마워요.” [서현아, 근데 대체 무슨 생….]
어쨌든 이용할 수 있겠다.
한서현은 전화를 끊었다.
이제 그녀는 마지막으로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나야. 우리 만나.”
[지금?]“이번 주 안으로.”
[어…, 이번 주는….]“날 빨리 만나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왜?]“나 약혼할지도 몰라.”
[…뭐? 누구랑!?]노은하가 크게 소리친다.
한서현은 키득거렸다.
하지만 소리는 절대로 나지 않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윽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른 그녀가 흐린 하늘을 보며 말했다.
“─갤럭시그룹의 최정훈 오빠야. 아버지가 마침 파혼한 사람들끼리 약혼하면 어떨까 한다네.”
[…말도 안 돼.]“너도 고민이라며. 나도 고민이야. 그러니 우리 만나서 한 번 유익한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지 않니?”
하늘이 흐리다.
한치 앞도 예상하지 못할 것처럼.
한서현은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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