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04
선력 13년, 노은하 18세.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고등아카데미 2학년을 맞이한 그는 주로 클랜을 창설하고 관리하는데 도움이 될 수업을 위주로 수강했다.
간간이 파티 플레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법에 대한 수업도 있었다.
내가 이걸 왜 듣고 있는 거지?
아, 괜히 들은 것 같은데….
그냥 드롭해버릴까.
선택이수교양, 클랜 창설법.
은하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 교과서를 보고 소리 없이 신음했다.
내용이 너무 어려운 건 물론이고, 머리에 욱여넣기 힘들 정도로 양이 워낙 많았다.
게다가 그는 교관의 강의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클랜을 창설하려 한다면 국가 마나관리기구에서 내걸고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소속원이 10명 이상이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클랜의 기능을 수행하는 클랜회관도 있어야….”
은하가 처음 목표했던 것과 같이, 그가 파티를 창설하려 했다면 굳이 해당 강의를 수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영입하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지다 보니 초기의 입장을 고수하기가 애매해졌다.
그래서 그는 파티에 국한하지 않고 클랜을 창설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시야를 넓히기로 한 것이다.
클랜을 만들려면 이 조항을 전부 외워야 하는 건가?
다만 은하는 학기를 시작하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언제든지 결성하고 해체할 수 있는 파티와 다르게 클랜은 법의 엄격한 잣대를 받고 있었다.
창설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창설하고 나서 클랜으로서 해야 할 업무처리와 관련사항을 외우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파티를 운영하는 일이야 익숙하니 이젠 어렵다 할 만한 일도 없는데.
클랜 업무는 다르기는 다르구나.
생각해보면 이전 삶에서 이유정이 파티를 운영하는데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주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 삶에서는 그녀도 없이 파티보다 더 많은 업무가 부과되는 클랜을 관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은─.
─행정관이 필요하긴 하겠네.
클랜 행정업무를 전문적으로 맡는, 클랜의 살림꾼 행정관.
그는 행정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신과 같이 강의를 수강하고 있는 학생들을 살폈다.
그들 중에서 행정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나 찾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행정관의 소질도 분명 중요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해.
은하는 행정업무에 관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행정관이 자연스레 클랜의 모든 업무를 맡게 된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행정관이 클랜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게 된다는 것.
실질적인 클랜로드가 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은하는 만약 행정관을 영입해야 한다면 능력뿐만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적절한 인재는 자신의 약혼자라 할 수 있었다.
─서현이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다만 과연 시리우스그룹의 직계가 일개 클랜의 행정관이 돼줄 것인지, 그걸 확신할 수가 없지만.
한서현은 올해 대학교에 입학했다.
클랜 행정관을 양성하는 학과에서 새내기 라이프를 보내고 있다 한다.
정작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매일 집과 학교를 반복하고 있다지만.
여하튼 그녀가 행정관이 된다는 건 매우 반길 일이기는 했다.
문제는 시리우스그룹이 한서현이 이대로 행정관이 되는 걸 허락할지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것.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은하는 그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아직 자신이 클랜을 만들 것인지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지도 않은 일이었다.
때마침 강의가 끝났다.
은하는 겨우 숨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 카페에서 시간이나 때울까.”
은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남아 있는 수업은 없었다.
다만 하양이 다음 수업을 듣는다.
그녀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은하는 그녀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어딘가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바로 그때─.
“─어디 가? 수업은? 다 끝났어?”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시간 되면 커피나 마시러 가자고. 나랑 시간이나 때우자.”
그는 복도에서 호시미야 카에데를 마주쳤다.
저 멀리서 오던 호시미야 카에데는 은하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냉큼 코너에서 발길을 돌리려 하던 그녀는 은하가 부르는 소리에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거절할게.” “거절은 거절할게.”
“…….”
“수업 끝난 것 같은데 아니야?” “끝났는데 왜.”
“그럼 시간 되겠네.”
한쪽 어깨에 국궁을 짊어진 그녀.
호시미야 카에데가 까칠한 어조로 은하에게 대꾸했다.
그럼에도 은하는 태연했다.
하양에게 치이고, 서현에게 치이니 호시미야 카에데의 태도는 그야말로 애교수준이었다.
정작 그녀가 그 말을 듣게 된다면 굉장히 불쾌해할 테지만.
은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시간 없어, 바빠.”
“왜, 어디 가는데?”
“훈련하러.”
“오늘 하루는 빠져도 되겠네.”
“…노은하. 지금 그걸 말이 되는 소리라고 하는 거냐?”
어이가 없어하는 호시미야 카에데.
은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 찾아. 나는 바쁘니까.”
카에데가 툭 내뱉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떼었다.
은하는 자신을 지나치는 카에데를 잠자코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 타이밍에 맞춰─.
“─호우!”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은하는 두 손을 모아 외쳤다.
그러고는 만면의 미소를 띠운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그녀도 뒤돌아본 상태였다.
눈이 마주쳤다.
“그 으름으로 브르지 믈릇지….”
메시미야 카에데가 부들부들 떨며 앙다문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키득거렸다.
“─내가 커피 살게. 가자.”
☆
“─뭐냐.” “뭐가?”
아카데미 문화관 카페테리아.
점심이 지나고 한산한 때를 노린 은하는 호시미야 카에데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은하가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파인톡을 하고 있을 때쯤.
팔짱을 끼고 의자에 파묻혀 있던 호시미야 카에데가 입을 열었다.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같이 커피 마시자며.”
“그래서 지금 커피 마시고 있잖아.”
무엇이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호시미야 카에데가 볼을 부풀리며 언짢은 태도를 드러냈다.
은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메시미야 가라사대─.
“─이럴 거면 나를 왜 부른 거야. 커피만 사주고 앞에 앉아서 폰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아, 미안해. 내가 좀 많이 했지?”
“나하고 있을 때는 나한테 집중해.” “알았어, 이제부터 그럴게.”
호시미야 카에데의 지적.
은하는 그녀의 지적을 듣고는 곧장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한서현과 톡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리고 말았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호시미야 카에데가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해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별안간 표정을 바꿔 말을 번복했다.
“…아니야. 말을 잘못했어. 나한테 집중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어?”
“생각해보니까 기분이 나빠졌어.” “…그럼 나 계속 톡한다?”
“그 소리가 아니잖아.”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폰 하지 말라고.” “그리고 너한테 집중하라고?”
“그래, 나한테는 집중…. 느 즈금 믈증는 흐는 그 으느드….”
자아정체성에 혼란이라도 온 듯.
호시미야 카에데가 입술을 앙물며 자신의 심기를 드러냈다.
어쩌다 그녀와 말장난을 하게 된 은하는 키득거렸다.
이내 그는 그녀에게 집중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뒤집었다.
호시미야 카에데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가?” “하양이랑 톡한 거야?” “아니, 약혼자랑.” “양다리 자식. 난 하양이도 그렇고, 네 약혼자란 사람도 그렇고 도대체 네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해 안 되지? 이해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기는…. 당연히 나한테 반하게 되겠지.”
“…기분이 나쁘니까 못 들은 걸로 할게.”
카에데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녀는 은하와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지치는 듯했다.
반면 은하는 그녀를 놀린 것으로 기운이 난 듯싶었다.
이후로도 싸우는 것 같은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아, 맞다.”
“또 왜 자뻑아.” “너 요새 온태양하고 같이 훈련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
은하는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이 화제를 전환했다.
진서나를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최근 카에데가 온태양하고 둘이서 수련동에서 훈련을 한다는 이야기.
은하는 소식을 접했을 때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카에데하고 온태양이랑 지금까지 접점이랄 게 없었으니까.
의외기는 하지.
더군다나 두 사람은 서로 부문도 다르지 않았던가.
한 사람은 레인저.
다른 한 사람은 딜러.
그러다 보니 은하는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두 사람이 어쩌다가 친해지게 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친한 건 아니야. 같이 훈련을 하는 사이일 뿐이지.”
“누가 뭐래?”
단순히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녀는 그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인 듯싶었다.
그녀가 순간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며 변명한 것이다.
은하는 꼭 죄라도 짓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쩌다가 같이 훈련하게 된 거야? 너 원래 다른 사람이랑 훈련하는 거 안 좋아하잖아.” “말해두겠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랑 훈련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하고 훈련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렇게 싫어?”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나서 말해보지 그래.”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흥, 퍽이나.” “아무튼, 그래서? 어쩌다 그 애랑 같이 훈련하게 된 건데?”
호시미야 카에데가 입을 다문다.
자신이 그것을 왜 말해야 하냐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긴 한숨을 쉬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수련동에서 몇 번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사이였어.”
“나 모르게 친해졌었네.” “…내가 누구랑 친해지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그래서?”
“겨울방학 때.” “응.”
“나는 아카데미에 남아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자하니.
그녀와 온태양은 작년에도 번번이 수련동에서 얼굴을 마주쳐 서로가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다 겨울방학이 되고.
방학 동안에도 아카데미에 남아서 훈련을 하려 하던 그녀와 방학에도 아카데미에 나가서 훈련을 하려던 온태양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같이 훈련을 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온태양은 어떤 사람이야?”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
은하는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생각해보면 이전 삶에서 온태양이 성격이 깐깐한 호시미야 카에데와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사람은 수련동에서 만나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게 된 것이리라.
은하가 그리 짐작하고 물었더니─.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래?”
“굳이 말을 하란다고 하면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네.” “…이성으로는?”
“내가 걔를 왜 이성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데?”
카에데가 눈을 치떴다.
그녀가 눈에 힘을 주며 되물었다.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 걔하고 훈련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걔가 훈련상대로 어울리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는 걸 알아둬.” “…그래. 미안하다.”
“또 양다리나 걸치고 있는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고.”
“…….”
명백히 불쾌하다는 것처럼 말하는 호시미야 카에데.
은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어쩐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그 이후로 은하는 툭하면 그녀에게 양다리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 그럼 이따가 저녁에도 걔하고 훈련을 하러….”
“그래, 양다리야.” “가서 무슨 훈련하는데?” “왜, 양다리야.” “…야, 내가 미안하다니까?”
“몰라, 양다리야.”
“…….”
“쓰레기 자식.”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알았어, 양다리.”
어쩌다가 전세가 역전이 되었다.
카에데는 처음으로 그에게 우위를 차지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그녀가 뭐라고 하든 가만히 듣기로 했다.
☆
호시미야 카에데가 온태양이라는 사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면─.
─열심히 하는 사람이기는 하지.
그녀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온태양은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카에데는 노력하는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다.
방학 동안에도 아카데미에서 와서 땀을 한바가지나 흘려가며 훈련하는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양다리라니.
그래도 괜찮은 놈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쓰레기였어.
그때 그 시기에.
카에데는 은하가 하양과 사귀고서 얼마 되지 않아 약혼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은하에 대한 평가가 다시 추락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은하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온태양이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어? 너도 훈련을 하러 온 거야? 의외네. 너희는 집에 돌아가 쉴 줄 알았는데….”
고등아카데미 31기 온태양.
사람들과 교류를 갖는데 소극적인 그녀라고 하더라도 온태양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진서나, 차은우, 아리엘 등이 그를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말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온태양을 평가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느낀 감상은 온태양이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온태양과 훈련을 계속하고 있던 이유였다.
그런데─.
“─나 전부터 생각했었던 건데…. 카에데 너 정도의 실력이라면 굳이 노은하 사단에 들어가 있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뭐?”
“너도 신분만 믿고 뻐기는 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
“근데 노은하 사단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뭐야?”
노은하에게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한바탕 쏟아붓고 온 그날.
그날도 어김없이 온태양과 훈련해, 그에게서 승리한 호시미야 카에데는 그런 질문을 받았다.
땀을 흘린 채로 바닥에 드러누운 온태양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까 걔네들하고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야. 나는 노은하 사단이 아니야.”
카에데는 노은하를 대하듯 편하게 온태양을 대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벽을 세우고는 하던 자신이 노은하를 비롯해 노은하와 어울리는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으니까.
눈치 채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나쁜 꼴이라는 나쁜 꼴은 전부 다 겪어봐서 그런가….
이내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노은하에게 가지는 인상은 전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를 피해 다니다가 파티원이 되어달라며 그에게 협박을 받기까지 했다.
노은하가 좋아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실력 하나는 인정하지.
노은하의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가 노력도 없이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했다.
그만한 실력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또한─.
─이유 없이 오만한 애는 아니야.
노은하는 자신의 사람을 지키는데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사람을 지킬 때마다 보이는 태도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굉장히 오만방자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은하가 오만을 떠는 이유를 알고 나서는 노은하가 마냥 오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인성은 쓰레기지만.
인성은 쓰레기가 맞았다.
그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걸로도 입증할 수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쓰레기였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노은하를 욕하는 소리가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혹시 노은하 걔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니지? 카에데 너 같은 애가 노은하 걔하고 어울린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래.”
“…….”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해. 만약에, 노은하가 너한테 정말 그런 거라면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고.
자기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오해하고, 착각하고, 단정하고.
그녀는 온태양이 멋대로 지껄이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남을 헐뜯는데 혈안이라도 된 사람 같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히 그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닥쳐.”
“…뭐?”
“그 입 다물라고.”
“너 지금 무슨 말을….”
“내가 사귈 사람들은 내가 정해. 네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
“그리고 네가 뭔데 욕하는데.”
“나는 네가 걱정이 돼서….” “노은하한테 이기지도 못하는 놈이 남 걱정을 왜 해?”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애 쥐꼬리만도 못하다고 했다. 노은하 실력의 반의 반조차 미치지 못한다고.”
─슈웅
경고사격.
그녀는 활시위를 당겼다.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
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온태양은 워낙 빠른 속도로 지나간 화살에 넋이 나간 듯했다.
“난 그만 갈게. 앞으로 너랑 같이 훈련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온태양이 움직일 기미가 없다.
카에데는 그를 두고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수련장을 빠져나온 그녀는 다짜고짜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내가 왜….”
부끄러움이 밀려올라왔다.
정작 자신은 노은하를 실컷 욕하고 있건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사람이 그를 욕하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나서 그만 욱하고 행동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진정이 될 때까지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이 일을 노은하에게는─.
“─말 못해, 절대….”
노은하가 들으면 놀릴 게 뻔했다.
그녀는 뒤늦게 주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
조아라에게 연락이 왔다.
주말에 시간을 비워두라고 한다.
[태양이는 주말에도 아카데미에서 훈련하고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가면 될 것 같아.]“알았어. 전화 줘서 고마워.”
온태양의 가족을 만나러 간다.
은하는 조아라에게 일정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마친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온태양이 엘릭서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한 다음에는 어떻게 된 거지?
문득 떠오른 생각.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 삶에서 그는 엘릭서를 사용해 마나 고갈증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치료했다.
이후로 의 명성을 얻어, 그의 가족들은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온태양이 가족들을 언급한 적이 별로 없었네.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플레이어의 길을 걷게 된 온태양.
하지만 정작 로 거듭난 그는 엘릭서로 어머니를 치료하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영웅의 가족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결국 잘 살았으려나? 잘 살았겠지?
끝내 나라를 구한 영웅은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인가.
은하는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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