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33
대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노은하란 존재는─.
─남이 짠 판 위에 올라가는 건 질색이야. 지들이 뭔데 날 멋대로 다루려 그래?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짠 판에 올라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판을 뒤집고야 말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 은하 또한 돌아가는 정세를 파악할 줄 알았다.
KK그룹의 회장 김건.
십이좌 황산군.
두 사람이 자신을 하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짠 판 위에 올라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흥분했어.”
“삐이.” “너는 나보다 더 흥분했잖아. 이게 어디서 위로를 하려고 들어?” “뿌뿌.”
KK그룹의 저택을 나서고.
은하는 언덕길을 내려가며 나직이 자신의 잘못을 중얼거렸다.
그만 감정이 앞서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극도로 날을 세운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뒤늦은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조금 굽혀줬더라면 그들과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또 같을 말을 하겠지.
언덕길을 내려간다.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얼마에 살 수 있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한 질문.
KK그룹의 회장으로부터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은하는 자신에게 두 번째 삶을 준 이유정의 존재를 폄하하는 것 같은 모욕감을 받았다.
그래서 내 인생을 멋대로 평가하려 하지 말라고.
은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KK그룹의 회장 김건을 압박했다.
또한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황산군에게 전부 쏟아부은 것이다.
“…그 사람들도 말은 그렇게 해도, 나한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겠지.” “삐삐삐.”
“너는 안 잘했어. 내가 너 때문에 아까 속으로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알아? 괜히 우리가 공격해서, 그쪽한테 명분을 줄 수 있었다고.”
“삐뽀삐뽀뿌.”
“…그래. 그래도 속은 시원하더라.”
“삐삐!”
“그래도 다음엔 먼저 공격하지 마. 그놈들처럼 너도 위협만 해라.”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자신은 때에 따라 고개를 굽혀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유정은 안 된다.
설령 몇 번을 돌아가게 되도.
그리고 몇 번을 선택하게 되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건 좀 그렇고…. 집에나 갈까.”
“삐삐삐 빠빠빠 뿌뿌뿌!”
“알았어. 가족들 소개시켜줄게. 아, 가서 아빠하고 브루노 아저씨한테 로열 비즈 좀 드려야겠다. 겸사겸사, 앞으로 잘 좀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금전이 형한테도 하나 줄까.”
계속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은하는 생각을 전환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바로 그때─.
“─집까지 바래다줄게.” “…한서현?”
“타. 안 타고 뭐하니?”
길을 내려가고 있던 중.
주차돼 있던 것으로 보이던 차가 시동을 켜서는 그에게 접근했다.
창문이 드르륵 내려가고.
안에서 한서현이 얼굴을 비췄다.
은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을 깜빡거렸다.
☆
“─네가 마나관리기구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러 갔지. 그러다 네가 KK그룹의 차를 타고 가는 걸 보고 따라온 거야.”
승용차 안.
은하는 옆에 앉은 한서현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때마침 마중을 나온 덕분에 은하는 편히 집에 갈 수 있었다.
…피곤하네.
피곤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던전을 나와서 곧장 마나관리기구에서 조사를 받은 참이었다.
피로가 쌓이지 않았을 리 없다.
은하는 차창에 고개를 붙인 채로,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편 불닭이는 그녀의 무릎에 앉아 그녀에게 한껏 애교를 떨고 있었다.
“귀엽네.”
“삐삐!”
“알에서 쥐 같은 게 태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삐삐?”
“그런데 이렇게 조그마한 새가…. 피닉스를 베이스로 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네.”
“마나관리기구에서 공증까지 받은 환수야. 겉보기가 좀 그렇기는 해도 피닉스를 베이스로 삼고 있는 것은 맞아.” “삐뿌삐.”
“그런데 얘 이름은 뭐니?”
“…불닭이.” “…너 같은 이름을 지었
구나.” “그거 내가 지은 거 아니거든?” “그럼 누가 지었는데?”
“끙…. 아니다, 내가 지었어. 내가 지은 거 맞아.”
“꼭 너 같이 지었구나. 아빠 잘못 만나서 네가 고생하네. 넌 이름이 마음에 드니?”
“삐삐삐!”
“그래? 마음에 들면 다행이고.”
은하는 고개를 틀었다.
불닭이를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던 한서현이 미소를 짓는다.
은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상태로, 그녀와 불닭이가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닭이가 한서현을 잘 따른다.
아마도 알에 있었을 때 한서현의 체내 마나를 한 번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중─.
“─근데 안 물어봐?”
“뭘 말이니?”
“내가 KK그룹 회장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이야.”
은하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자신이 어찌하여 KK그룹의 회장을 만나게 된 것인지.
그를 뒤따라왔다는 그녀가 충분히 궁금해 할만도 하건만.
정작 한서현은 그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않고 있었다.
단지 마나관리기구에 있던 동안에 불편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었는지, 던전에서 어떤 활약을 보였었는지 그러한 것들을 물었을 뿐이다.
은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나직이 답했다.
“─네가 거기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고, 네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
“왜? 내가 물어야 하니? 그렇다면 물어봐주고.” “…아니야, 괜찮아.”
한서현을 마주할 때면 신기했다.
이따끔 그녀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
“왜 우울해하고 그러니? 아니지, 왜 외로워하고 그러니?” “…뭐래.”
“외로우면 말해. 2살 많은 누나가 위로해주기라도 할 테니까.” “평소에는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때는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지.”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래서 은하는 간혹 그런 느낌을 받고는 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해받는 듯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말이 되는 느낌.
그것은 너무나 기묘한 감각이었다.
의 삶을 살았던 노은하는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문득 기대고 싶어진다.
한서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저도 모르게 궁금해진다.
은하는 나직이 자조했다.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정말 없을까?”
한서현은 어떤 사람일까.
이 순간, 은하는 그녀에게서 무척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앞뒤 맥락을 모두 잘라서 요점만.
“…….”
그의 물음을 듣고.
한서현은 생각에 잠긴 듯싶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무릎 위에 있던 불닭이가 두 사람 사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삐삐 울었을 뿐이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생각을 마친 듯했다.
그녀가 입을 연다.
“─당연한 거 아니니?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어.”
“…그래?”
확신에 찬 듯한 목소리.
하지만 그녀의 답변은 그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는 말이었다.
하긴…. 서현이는 시리우스그룹의 직계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은하의 시선이 차분해지고.
한서현에 대한 마음이 식는다.
그녀는 결국 시리우스그룹의 직계, 자신하고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인 셈이다.
은하는 조금 전 그녀의 대답으로, 한서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했다.
파악한 줄 알았다.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돈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없는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어.”
“…세 부류?”
“그래, 세 부류.”
한서현이 은하의 시선을 피한다.
이내 그녀가 불닭이를 껴안고서는 반대편 창가를 내다본다.
“만약 사고자 하는 물건을 제값에 주고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삼류야.”
“…….”
“그리고 제값에서 에누리를 하거나 남의 돈을 빌려서 물건을 사려 하는 사람은 이류고.”
덤덤히 설명하는 한서현.
은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도중에 운을 떼었다.
“…그럼 일류는?”
한서현이 차창에서 고개를 튼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다.
이윽고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답한다.
“─돈을 주고 사지 않는 사람.”
“…….”
“세상에 돈으로 안 될 일은 없어. 하지만 일류라면 돈을 쓰지 않고도 안 될 일도 되게 할 줄 알아야지. 내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끝이 있기 마련인데,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며 펑펑 쓰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 아니겠니?”
돈을 주고 사지 않는 사람.
은하는 그녀의 말을 중얼거렸다.
다시금 호기심이 동했다.
“그럼 서현이 넌 어떤 사람인데?”
“난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내 돈 주고 안 사. 돈으로 꼬셔도, 내가 돈이 떨어지면 결국 그 사람이 떠날 거라는 걸 아니까.” “…사람?”
“예가 그렇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사는데? 서현이 네가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흥미로운 이야기다.
어느새 은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내가 사는 게 아니야. 그쪽이 내가 없으면 못 살게 만드는 거지.” “…응?”
한서현의 눈빛이 반짝인다.
한편 은하는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 듯 말 듯 미묘한 대답이었다.
“그건…, 사람일 때인 거지?” “맞아.”
“그럼 물건 같은 건….”
“그건 그때그때 다르겠지.”
“끙….”
결국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소리.
은하는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서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키득거렸다.
“그럼 만약 말이야. 세상에 돈으로 되지 않는 게 없다고 했잖아.”
“그래, 말해봐.”
뒤이어 떠오른 질문.
은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입을 우물거린다.
이내 긴장한 어조로 묻는다.
“─돈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으리라.
한서현이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하는 시선을 보냈다.
은하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굳은 얼굴로 한서현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을 뿐.
결국 그녀는 그가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답을 해야 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시간도 못 돌리겠니?” “…….”
이유정을 무시하는 듯한 대답.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그녀가 첨언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술력을 개발하기 위한 비용만 낼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는 건 무리가 아니지. 근데 내가 말했잖니.”
“…뭐라고?” “돈은 끝이 있는 법이라고. 얼마나 돈이 들지 알 수 없는 기술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지. 일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그럼 일류는 뭘 하는데?”
“글쎄….”
그동안 확신에 차서 답하더니.
한서현이 처음으로 말을 흘리면서 자신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그녀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지 않을까?” “…….” “결국 시간을 돌리는데 중요한 건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제일 먼저 그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인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은 돈으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사람일 테고, 매기더라도 이 세상에 그만한 돈은 없을 거야. 돈에는 끝이 있으니까.”
“…그러겠네.” “얄궂은 일이지. 돈으로 안 될 게 없는 세상에서 결과적으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게.”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돈으로는 절대 사지 못하는 사람.
은하는 그녀의 말에 눈을 빛냈다.
암, 그렇지.
유정이가 어떤 애인데.
그에게 이유정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 누구도 평가하지 못하는 존재.
그럼에도 KK그룹의 회장 김건은 자신을 돈으로 사려 한 걸로 은연중 그녀를 폄하한 셈이다.
그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김건 그는, 삼류다.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
“이제 기분 풀렸니?”
“어, 누나 덕분에 속이 시원해졌어. 정말 고마워.” “이런 걸로 뭘.”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도 돼?” “물어봐.”
한편으로 은하는 그녀의 입을 빌려 듣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밝은 어조로 물었다.
“그럼 난?” “응?”
“난 얼마에 살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전 질문도 그렇지만 너 정말 되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구나?”
“나도 가치를 매길 수 없겠지?”
“에휴….”
한심하다는 듯이.
한서현이 대뜸 한숨을 쉰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다.
마치 기대하는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놀리듯이.
“─0원.”
“엥? 내가 0원이라고?” “너는 이미 내꺼야. 내꺼인데 내가 너를 왜 돈을 주고 사니?”
“…….”
맞는 말이기는 했다.
약혼을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노은하 그는 그녀에게 무일푼으로 팔린 셈이다.
은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난 그렇게 말하지 못할 줄 알아? 누나도 0원이야. 이미 나랑 약혼을 했으니까.”
자신의 가치를 0원이라고 하니.
은하는 한서현의 가치 또한 깎아 0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상하게 억울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피식 웃어서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0원.”
“뭐?” “영원, 해. 영원하자고, 우리 서로. 나는 내 가치가 어떻든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단다.” “…….”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한편으로.
은하는 한서현이 저리도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서현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내 은하는 그녀를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자, 두부 먹어.” “웬 두부?”
“마나관리기구에서 나왔으니까.”
“거기가 뭐 감옥이라도 돼?” “감옥은 아니지만 그럼 뭐 어떠니. 그리고 두부는 몸에 좋으니까 그냥 주는 대로 먹어.”
“크게도 사왔네. 얌.”
“삐삐삐!”
“그래, 너도 먹어라.”
그날, 한서현은 은하를 데려다주고 그의 가족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은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위험한 짓을 했다면서 꾸중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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