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34
한남동, KK그룹 본가.
KK그룹 회장 김건은 은하가 떠난 자리를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고얀 놈….”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감히 누구를 앞에 두고 그딴 말을 지껄였다는 말인가.
자신이 성의를 보여, 그룹 전부를 내줄 수도 있다는 제안을 했는데도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됐다.
김건은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얼굴로 조금 전 비서가 가져온 약을 꿀꺽 삼켰다.
“어려서 그런지 참 버르장머리가 없는 모양이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에서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의 성격과 태도를 차치하고서도 노은하란 존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크게 될 놈이겠지.”
노은하의 행적을 살피면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정녕 그 나이에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나오는 행적이었으니까.
허나 결과가 거짓말을 할 리 없고,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노은하가 언젠가 대성할 인물이란 것이다.
그냥 대성하는 것도 아니다.
노은하 그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내 밑으로 포섭해야 하는 놈이야.
노은하.
미래의 십이좌라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유망주.
아니, 그의 행적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들은 그런 표현이 그를 얼마나 저평가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미래의 십이좌 따위가 아니다.
살아있는 신화들처럼.
‘신화’의 반열에 드는 것에 손색이 없는 존재라 평가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노은하가 세상에 나온다면, 역사는 그를 중심으로 재편성될 게 분명했다.
“그놈을 손에 넣는 사람이 세상을 거머쥐게 된다라….”
그러니 이 나라를 발밑에 두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는 KK그룹의 회장 김건은, 어떻게든 노은하를 자신의 밑에 두고 싶었다.
“흠….”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내 노쇠한 몸을 들썩이며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놈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야 그놈 주위에 있는 놈들을 이용하면 되는 일이지.”
정보에 따르면.
노은하는 주변 사람들을 끔찍이도 챙긴다는 듯싶었다.
또한 자신의 편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을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까지 지키려 한다고.
그렇다면 김건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노은하의 주변을 공략한다.
그리하여 노은하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마침 적당한 게 있었군.
김건은 흡족해했다.
당초 김건은 노은하를 끌어들이려 그에게 그룹 지분을 내어주는 한편, 자신이 아끼는 손녀를 그의 반려로 맞이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이미 반려가 있든, 없든.
자신의 손녀라면 그의 마음을 쏙 빼놓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 이상 김건은 다른 수를 선택하기로 했다.
“─진…, 서나라고 했던가.”
KK제약의 직계 진서나.
그는 불과 2년 전, 웬 아인 소녀가 KK제약의 직계가 되었다는 소식을 떠올렸다.
그때는 앨리스그룹의 수작이 뻔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건만.
그것이 적절한 묘수가 되었다.
그 아이를 입양시키면 쉽게 끝날 일이겠군.
진서나, 그녀를 직계로 편입시킨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방계를 직계로 만드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의 자식들 중 적당한 이에게 그녀를 입양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직계로 만들어서, 확실하게 인질로 삼는다.
“그러면 그놈도 별 수 없겠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집안일.
노은하가 끼어들 수 있는 사건이 결코 아니다.
그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김건 자신은 그녀를 인질로 노은하를 굴복시킨다.
그리고 완전히 사로잡는다.
노은하와 진서나가 맺어지게 하여, 그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김건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보나마나 아랫사람이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한 것이리라.
그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날세, 민준식.]“…….”
앨리스그룹의 ‘전’ 회장 민준식.
김건 그와 함께 멸망한 세상에서 작금의 시대를 만들어낸 사람들 중 한 명.
그는 오랜만에 전화를 건 친구에게 전우애를 느끼는 것과 함께─.
[─우리 손주사위가 아까 그쪽에 다녀갔다고 하던데…. 그래, 인사는 잘했던가?]“…….”
[자네 왜 말이 없나?]김건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의 10대 그룹의 기틀을 다진 초대 회장들은 모두 서로를 격 없이 대했다.
그만큼 서로 교류하기도 하였으며, 서로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리고 김건은─.
“─아니네. 오랜만이군.”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는 과거에 민준식에게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몇 십 년이 흘러서도 민준식에게 된통 당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세월 속에 각인되고 만 두려움.
한때 맹호라고 불리던 남자, 아니, 노인은─.
“─잘 지내냐?”
“…….”
노인은 한 마리 토끼를 앞에 두고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그냥 토끼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내 손주사위는 어땠나?]“…좋은 아이더군.”
[내가 그 애 성질머리를 아는데, 거짓말도 참 잘 치는군. 보나마나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겠지.]“끙….”
전화 속 상대는 만렙 토끼다.
호랑이 따위는 그냥 한 번에 골로 보내버릴 수 있는 생태계 교란종.
세상은 그를 가산을 탕진하고서도 책을 수집하려 하는 고서광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김건과 같이 그와 전성기를 보낸 사람들은 그를 적으로 돌렸다가는 얼마나 골치 아파지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물며 김건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민준식을 이겨보지 못했다.
─설마 고작 이런 일에 민준식이 간섭하려 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는 하나.
이제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김건은 안심하고 은밀하게 노은하를 회유할 생각이었는데.
민준식이 대뜸 전화를 건 것이다.
김건은 침음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민준식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나 해서 자네에게 말하는데, 그 애 주변을 건드려보겠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흥. 내가 자네처럼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KK제약에 있는 아이를 이용하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내, 내가 왜 그러겠나.”
김건은 순간 뜨끔했다.
그가 어조를 낮추며 대꾸했다.
옛날 기억이 몸을 움직인다.
그는 전화 너머로 저자세를 보이며 민준식의 비위를 맞추려고 들었다.
[쯧…, 알면 됐고. 이보게, 김건.]“어…, 그래.”
[이제 우리도 나이를 먹었네. 그만 자네도 물러나는 건 어떻겠나?]“…나는 아직 괜찮아.”
[자네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백날 웅크려 있으면 뭐하나. 정작 적절한 기회가 와도 신중하게 있다 다른 놈들에게 빼앗기기만 했으면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 [꿈만 크지, 쯧쯧….]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김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KK그룹에 순풍이 불어온다 싶으면 동해그룹이 치사하게 빼앗지 않나, 앨리스그룹이 홀라당 빼가지 않나.
그밖에 다른 그룹들도 마찬가지로.
김건은 냅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민준식에게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언젠가 때가 오겠지. 그때는…, 자네도 날 무시하지 못할 걸세.”
다만 훗날을 기약할 뿐.
김건이 이를 악물었다.
민준식은 혀를 찼다.
[─자네는 그게 문제야.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굽실대고,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는 거만해지지. 신중은 덕목일지 몰라도, 결과 없는 신중은 우유부단하고 겁을 먹은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네. 자네는 늘 모험을 할 줄 몰라. 쯧쯧….]자신이 살고 있는 산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 호랑이라며.
민준식은 연신 그를 모욕했다.
김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묵묵히 전화를 듣기만 했다.
흥분해서는 안 됐다.
민준식을 상대할 때에는 어떻게든 ‘신중해야’ 한다.
‘웅크려야’ 한다.
[─그러니까 자네가 언제가 되도 나를 이기지 못하는 걸세.]“……!”
[이미 우리 시대는 다 지났으니까 자네도 그만 물러나고. 나랑 같이 책이나 읽는 건 어떤가.]“…그럴 순…, 없네.”
[허허, 똥고집 하나는 여전하구만.]“나는…, 계속 기다릴 거네.”
“…말이 심하군. 그럴 일은 없어.”
[이해가 빠르면 다행이고. 끊겠네, 자주 연락함세.]웅크린 맹호, 김건.
세상은, 아니, KK그룹의 사람들은 그러한 수식어로 그를 불렀으나.
그와 같은 세대를 살아간 악우들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아, 그렇게 계속 ‘짜져 있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짜져 있는 스라소니라고.
☆
아카데미 던전 사태가 발생한 이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노은하의 활약 덕분에 중화제는 금세 만들어졌다.
제4위계 몬스터 각군봉에게 뱃속에 알을 주입당한 학생들이 어느 정도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알을 주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 중에는 벌써부터 퇴원을 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각군봉에게 가장 먼저 알을 주입당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던 이천서가 빠르게 퇴원하기도 했고.
“이별이가 몇 층에 있다고 했었지? 6층이었나? 아, 7층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 병원에는 아직 많은 학생들이 입원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다른 부상으로 인해 입원한 학생들도 있었다.
윤이별도 그러했다.
몬스터에게 사로잡힌 충격을 받고 PTSD를 호소하게 된 윤이별.
윤이별은 정신상태가 현재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짜잔! 이거라면 이별이도 날 보고 놀라지 않을 거야.”
그리하여 앨리스 병원.
아리엘은 주말을 맞이하고서 곧장 윤이별의 병문안을 하러 갔다.
윤이별에게는 비밀로 한 아리엘은 그녀의 병실이 있는 층 화장실에서 준비해온 선글라스를 꼈다.
“응, 완벽해, 최고야, 난 천재야.”
자화자찬.
아리엘은 거울을 보며 만족해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이별이도 저번처럼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아리엘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녀의 병실을 찾았다.
“이별아, 안녕!? 혼자 있느라 엄청 심심했지?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아리엘?”
병실 앞에서 한차례 심호흡하고.
아리엘은 과하게 밝은 척을 하며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개인병실이었다.
안에 있던 윤이별이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대했다.
“…응? 선글라스?”
“어때? 이러면 하나도 안 무섭지?” “…응. 배려해줘서 고마워.”
“이런 걸 가지고 뭘! 아, 이제는 몸 괜찮은 거야? 나 네가 없으니까 너무 심심했던 거 있지?”
“…그렇구나.”
아카데미 던전에서 그녀와 다투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가 자신을 보고 공포에 떨었던 일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아리엘은 그녀를 대하려 했다.
그녀에게 윤이별은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으니까.
“그래서 있지, 빠랑 오빠가….” “…응, 그렇구나.”
“…….”
하지만 벽이 있다.
아리엘은 자신이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말에는 영혼이 없었다.
“응, 그렇구나가 아니잖아….”
“…응, 미안.” “…….”
그걸 알면서 계속 모른 척 한들, 이제는 그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리엘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말을 멈추자 윤이별 또한 말이 없었다.
급기야 아리엘은─.
“─내가 싫어?”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아리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선글라스를 끼는 한편으로.
아리엘은 그녀를 배려하여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어색한 침묵 끝에.
윤이별이 미안하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리엘이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는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서워.” “…뭐가 무서운데?”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여 있다.
아리엘은 눈물을 참으며 윤이별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윤이별은─.
“─네 귀.” “…….”
“사람 귀가 아니잖아.” “…….”
“몬스터처럼 생겨서…, 무서워.” “…그렇구나. 그럼 모자로 가리면 안 무서워할 거야?” “…….” “또 왜, 뭐가 무서운데!?”
“꺄아아악!”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거의 화를 내듯.
아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러자 윤이별이 히익 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냥, 무서워. 무서운 걸 나 보고 어떡하란 거니?” “…….” “그러니까…. 당분간 나한테 오지 말아줬으면 해.” “…….” “병문안 와줘서 고마워. 꽃도 정말 고맙고. …잘 가.”
축객령.
아리엘은 터덜터덜 몸을 돌렸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그대로 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든 말든.
아리엘은 다리를 부둥켜안았다.
“…이슬.”
눈물이 차오른 눈을 비비며.
아리엘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이슬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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