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5
KK제약의 사장 진영운. 그
는 세나의 심기를 거스르는 아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사리분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넘길 수 있지만, 그것이 두 번이 되고 또 세 번이 된다면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는 원숭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 후로는 호기심이 생겼다.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아이가 신분의 귀천을 알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를. 한낱 미물에 불과한 그가 신분이 고귀한 자의 힘을 앞에 두고 어떤 감정을 겪을지를.
마지막으로는 분노했다. 진영운은 그 아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딸 세나의 생일파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감히 네 따위가.
불쾌했다. 그는 세나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모욕감을 느껴버렸다.
신분이 고귀한 자는 명예로 살아가는 법이다.
KK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KK제약의 사장인 진영운에게 명예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 힘도 가지지 못한 아이가 자신과 세나, 나아가 KK제약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다.
어디 그 낯짝이 어떤가 했더니만.
그리고 오늘.
진영운은 일부러 스케줄을 비워서까지 운동회를 보러 왔다.
이 모든 것은 분수도 모르는 아이를 직접 벌하기 위해.
별 볼일 없는 꼬마였군.
하지만 그는 아이를 마주한 순간, 자신의 기대보다도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아이인지를 파악했다.
노은하, 그는 전형적인 서민의 아이였다. 모래가 묻은 티셔츠며, 때가 탄 신발, 무릎과 팔꿈치에 생긴 상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외모는 또 어떤가. 지금이라면 사나운 눈매는 제법 귀엽게 보일지 몰라도, 성인이 돼서는 험상궂은 분위기를 풍기게 될 것이다.
이런 아이는 운 좋게 출세가도를 달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데리고 다니는 보디가드정도로 끝날 터였다.
…그래도 얼마나 분수를 모르는 놈인가 확인해야겠지.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진영운. 그는 내리깐 목소리로 은하를 위협했다.
“네가 그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인가 보지?”
“…하.”
어라? 이거 봐라? 한숨을 쉬어?
어린아이가 당돌한 것을 넘어 한 대 칠 기세였다.
진영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더라도 틀어진 심기가 한 번 더 틀어졌다.
“너 지금 우리 아빠한테 한숨 쉰 거니?”
눈을 치뜬 세나가 가시 돋친 어조로 내뱉었다. 그녀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쩌라고?”
“뭐, 뭐라고?”
은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이번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사람은 세나였다.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당돌한 아이구나.”
애새끼가.
겉으로는 점잖게 말한 영운이었지만, 속으로는 불같이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어린아이를 상대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추태는 없었다.
그는 짐짓 엄한 눈빛으로 은하를 노려보았다.
“…조그마한 제약 회사나 가진 주제에 말이 많아.”
은하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겁을 먹지도 않았다.
진영운이 그를 나무라더라도, 은하는 조금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섞인 어조로 이런 말이나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이 노오오옴───!!”
하지만 진영운은 이 모욕만은 어른스럽게 참을 수 없었다.
이성이 끊어졌다.
애새끼가 감히, 감히….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아이를 때리지 않고서는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아이는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그것이 신분이 미천한 아이라면 더욱이.
그는 나중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법무팀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해버릴 생각이었다.
돈 앞에는 장사 없으니.
“…죽을래?”
뭐?
이 아이는 겁을 먹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가 주먹이 정면으로 날아드는 데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되레 자신을 협박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이 아이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이라고.
다른 말로는 미친 놈이라고.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아이에게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대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리라.
그런 마음으로 주먹에 힘을 실었으나,
“죽고 싶어?”
대기를 가르던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녀석은, 뭐야.
아이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차갑게 식었다.
손을 대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안 때려?”
아이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가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베일 것만 같은.
어, 어린 놈이 뭐 이리 살벌해!
일전에 KK그룹의 회장 김건을 마주했을 때에 버금가는 기백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이가 드러내는 살기에 겁을 먹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체면이 있었다. 고귀한 자에게 그것은 명예요, 미천한 자에게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애…새끼가…!”
영운은 차갑게 굳은 몸을 무겁게 움직였다.
은하는 슬로우모션처럼 다가오는 주먹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는, 주먹이 얼굴에 닿는 순간 진영운을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오라. 그리고 후회하라.
그러니 죽어라. 그리고 포기하라.
“…이번 생은─.”
포기해라.
은하가 그렇게 말하려 하던 때였다.
“─이 새끼가, 어디서 내 아들을 때리려 들어!?”
진영운의 주먹이 닿기 직전.
측면에서 달려든 아버지가 몸 뒤로 당겼던 주먹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크헉!”
“””사장님!”””
“아빠!!”
광대를 정통으로 맞고 나가떨어진 진영운. 머리가 심하게 울렸는지 일어서지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보디가드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그들이 뒤늦게나마 아버지를 붙잡으려고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그는 자신의 아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지?”
험악한 눈매와 달리 눈에 실린 감정은 걱정.
어깨를 붙잡힌 은하는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아…빠…?”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보구나.”
아버지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은하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그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어나는 진영운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가, 감히 어디서…. 개만도 못한 자식이, 날 쳐?”
영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얼굴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주먹크기만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자식들이….
은하는 언제든 아버지를 붙잡으려는 보디가드들을 둘러보고는 살기를 쏘았다.
죽인다. 죽여 버리겠어.
체내 마나를 조금씩 끌어올렸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실은 그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숨을 보장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찮아.”
커다란 등을 보인 아버지가 말하지만 않았다면.
은하는 완전히 이성을 잃을 뻔했다.
“너, 너…. 너 뭐하는 놈이야! 내가 누군지 알고나 있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절 알기라도 하는 겁니까?”
“뭐?”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지?
진영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포커페이스를 잃은 얼굴에는 그런 감정이 담겨 있었다.
“KK제약의 진영운 사장님 아니십니까.”
“그, 그래….”
“이래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한숨을 쉬는 아버지.
아버지나 자식이나. 상대를 멸시하는 모습이 똑같았다.
진영운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데,
아버지는 셔츠 주머니에 안경을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이마.
전체적으로 날렵하면서도 매서운 인상.
그것을 본 진영운은.
“…노, 노 과장?”
어째서 이 사람이 여기에!
속으로 경악했다.
노 과장. 그는 시리우스 디바이스를 총괄하는 전략경영기획부서의 과장이었다.
“이제야 저를 기억하시는 군요.”
“자, 자네가 여기는 어떻게….”
“자네?”
노 과장. 그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기획부서의 과장님께서 여기에는 왜 오셨나 해서….”
“딸이랑 아들 운동회를 보러 왔거든요. 사장님도 그런가 보네요. 근데…, 제 아이하고 마찰이 있었나 봅니다?”
진영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말을 조심해야 했다.
KK제약은 시리우스 디바이스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기업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KK제약의 포션사업은 하청기업에 맡기고 있고, 제품을 홍보하는 데에는 KK와 갤럭시 그룹을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우스 그룹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거론되는 갤럭시 그룹과 비등하다고 여겨지는 그룹이었다. 그리고 시리우스 디바이스는 시리우스 그룹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차지하는 계열사였다.
더군다나 노 과장, 그가 어떤 사람인가. 어지간한 사업가들은 그가 미래에 그룹을 이을 후계자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와 척을 질 수는 없었다.
“하하,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노 과장님의 아드님이었군요.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 꼬마야.”
“아빠….”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영운은 고개를 숙였다.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위가 있고 아래가 있는 법이었다. 시리우스 디바이스의 과장인 그는 위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조그마한 제약회사를 가진 그는 아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미안하다.”
순간 얼굴이 빨개진 그였지만, 조금 전처럼 이성을 잃지 않았다.
노 과장은 자신이 저지른 행실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KK그룹에 피해를 야기하고, 그 사실이 그룹의 회장인 김건에게까지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자신이 경멸해하던 미천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어린아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나았다.
진영운은 KK제약을 위하는 일이라 자위하며 고개를 숙였다.
은하는 말없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더 그의 속을 태웠지만,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세나. 너도 얼른 사과해야지.”
“…죄송…합니다.”
세나는 이 모든 일이 믿기지 않았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개는 천천히 내려갔다. 그 사이에도 온갖 생각이 지나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이 쏟아졌다.
얼굴을 들었을 때에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훔친 그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며 도망쳤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아까 때린 건 없도록 하죠.”
“하하. 때리다니요. 저는 맞은 적이 없습니다만….”
영운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고서는 은하를 데리고 돌아갔다.
“은하야.”
“응, 아빠.”
혼내려는 걸까.
은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아빠한테 말해줘.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응, 알았어. 고마워, 아빠.”
오늘따라 유독 듬직해 보이는 아버지였다.
누군가에게 지켜지는 건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은하는 가슴이 따스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버지와 걸음을 맞췄다.
“점심 먹으러 갈까?”
“응! 누나가 다 먹었을지도 몰라.”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히죽 웃었다.
걷는 폼도, 웃는 얼굴도 누가 보더라도 부자지간이었다.
☆
운동회는 결국 별 다른 반전 없이 청팀의 승리로 끝났다.
“짜잔~! 이게 바로 최우수상이지롱!”
“역시 내 딸이야!”
“오늘 저녁은 비싼 걸로 먹어야겠네.”
은아의 활약은 2부에서도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청팀 대표로 단상에 올라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으으~. 대장, 나 먼저 갈게.”
“…어, 몸조리 잘하고.”
내일부터는 구를 줄 알아.
2부에서 그나마 기력을 되찾은 은혁은 이번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마나 배분을 신경 쓴 나머지 주의력이 분산된 결과였다.
결국 그는 부모님의 등에 업혀가야 했다.
“몸치. 박치. 음치. 아주 못하는 세 박자는 다 갖추었다 너?”
“내가 어딜 봐서 몸치라고. 그리고 너는 요리치잖아.”
2부에서도 은하는 민지와 짝을 이뤄 경기에 참가했다. 박자에 맞춰 율동을 따라하는 경기였건만, 그가 박자를 맞추지 못한 나머지 제일 먼저 탈락하고 말았다.
“오늘 수고했어! 우리 먼저 갈게~”
“다음 주에 봐~”
하양과 서나는 손을 잡고 운동장을 떠났다. 그 뒤를 정석훈과 민수진이 나란히 걸어나갔다.
끝났네.
친구들을 보낸 은하는 홀로 사색에 잠겼다.
결국 세나는 2부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나에게 모든 종목에서 기권하겠다는 통보만을 전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으리라.
…앞으로 불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오늘을 계기로 세나는 그녀가 휘두르던 힘이 보잘 것 없는 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당분간 그녀가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당분간.
본성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가자, 누나.”
“응!”
은아의 손을 잡은 은하는 운동장을 나가는 인파에 합류했다.
이로써 첫 번째 운동회가 막을 내렸다.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폐허.
남자는 구둣발로 유리조각을 밟았다. 그는 유리조각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창문을 내다보고는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여준 이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다가온 남자였다.
제 역할을 수행한 남자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널 고용하려면 여기까지 찾아와야 하는가 보지?”
담배를 문 남자가 언짢은 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어느새 선글라스를 쓴 거한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선글라스라니 웬 말인가.
남자는 실소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아주 큰일을 하려는데 말이야. 눈엣가시인 녀석들이 있어서…. 그러니 나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돈은?”
거한이 굳게 다문 입을 뗐다.
담배를 문 남자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선불로 15억. 성공하면 15억을 더 주지.”
구둣발로 담뱃불을 지진 남자. 그는 선글라스를 쓴 남자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은─.
“─확인했다.”
남자는 사라졌다.
기척도 없이.
“허, 참.”
마치 허깨비를 보았던 것처럼.
홀로 남은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실로 가볍게.
“하하하.”
실로 유쾌하게.
어느덧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그곳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폐허였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