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69
온태양의 어머니의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져가던 반면.
이유정의 상태는 나날이 좋아졌다.
덕분에 이유천의 입꼬리는 항시도 내려갈 줄을 몰랐다.
“─어제는 유정이가 나하고 같이 찐빵을 먹었던 거 있지? 유정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밀가루 음식을 못 먹었거든. 그런데 어제 혼자서 찐빵을 3개나 먹었다니까?” “오, 많이 먹네?”
“”…….””
“그러고도 나한테 찐빵 더 있으면 출출할 때마다 돌려먹겠다며 달라고 하던 거 있지? 내 여동생이 그렇게 밥을 잘 먹더라고!” “그렇지. 잘 먹는 건 좋은 거지.”
“”…….””
그리고 이유천은 시스콤이었다.
이유정이 엘릭서를 마신 이후.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서 은하의 병실을 찾아와서는 이유정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은하가 받아주니 그는 신이 나서 입에 모터를 달았다.
“…래서 내가 너희들도 맛보라고 찐빵을 종류별로 가지고 왔으니까 이따 갈 때 꼭 챙겨가라고. 은하야, 나 전자레인지 사용해도 되지? 내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오늘도 그러했다.
편히 쉴 수 있는 주말.
정하양 그리고 한서현과 병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은하는 이유천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고는 이유천은 침을 튀겨가며 장장 1시간이 넘게 자신의 여동생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설파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받아들이려던 여친님과 약혼자님이 점점 말수가 줄어든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때? 하양아, 맛있지?” “응, 맛있네. 팥이 고와서 좋아.”
“유정이도 그 말을 했어. 팥이 참 고와서 식감이 부드럽고….”
“…….”
이쯤 되니 은하도 여친님과 그리고 약혼자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팔에는 정하양을.
다른 한 팔에는 한서현을.
침대에 누운 두 사람에게 양팔베개를 해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한소리 듣겠네. 같이 있을 시간을 방해 받았다고….
근데 잘못한 것은 유천이 형인데 내가 왜 한소리 들어야 하는 거지?
무언가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은하는 그만 이유천을 쫓아내기로 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런데 은하 너는 안 먹고…. 아, 그 상태로는 못 먹기는 하겠네. 자, 내가 대신 먹여줄게. 입 벌….”
“그걸 왜 네가 하니?”
“그걸 왜 오빠가 해?”
“”…….””
타이밍도 참 문제였다.
하필 그때 이유천이 오지랖이 넓게 은하에게 찐빵을 먹여주려 했고.
은하의 품에 안겨 있던 한서현과 정하양이 거의 동시에 이유천에게 쏘아붙인 것이다.
이유천이 두 사람이 보내는 시선에 겁을 먹고 움츠려든 것은 당연했고.
은하는─.
“─자, 먹으렴. 팥이 뜨거울 테니까 조심하고.”
“자, ‘아~’ 해봐. 내가 식혔으니까 안 뜨거울 거야.” “…고마워.”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었기에.
은하는 두 사람이 떼어준 찐빵을 한번에 입 안에 넣어야 했다.
거의 찐빵 반 개를 입에 넣게 된 것이다.
…입천장 다 데겠네.
이제는 마나 회로를 사용하는 데에 고통을 수반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은하는 뜨거운 팥이 입안을 달구는 슬픔을 견뎌낼 수 있었다.
“맛있니?”
“맛있어?”
한편 한 입 먹여주고 나서 묻는 두 사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은하는 이제 무엇을 말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그러엄…. 너희가 먹여주니까 엄청 맛있다.”
과하게 연기를 하면서.
은하는 두 사람을 만족시켰다.
두 사람은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재미가 들린 두 사람은 그의 입에 다시 찐빵을 넣어주었다.
아…, 어제도 찐빵을 먹어서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찐빵이 맛있기는 했다.
그런데 조금 물리기도 했다.
사실 어젯밤, 그는 이유정과 함께 찐빵을 나눠먹었기 때문이다.
‘오빠가 가져온 찐빵이 있는데…. 한 번 드셔보세요. 저도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정말? 근데 왜 이렇게 많아….’
‘네? 그런가요? 저번에 사신님이 많이 먹는다고 그래서 최대한 많이 달라고 하기는 했는데…. 너무 좀…, 많은가 보네요.’
‘…안 그래도 출출한 것 같았는데 잘 됐네! 내가 이것도 못 먹을 것 같아? 이런 건 그냥 다 먹지!’
‘킥…. 그러다 배탈 나요. 체하면 안 되니까 적당히 드세요.’
‘아니야! 난 다 먹을 수 있어!’
결국 어젯밤 은하는 찐빵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당분간 찐빵은 먹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그런데─.
“─네가 맛있다고 하니까 몇 상자 주문해야겠네. 가족들에게도 주고, 할머님이랑 어머님에게도 드리고.”
“아,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니는 어떤 맛으로 주문할 거야? 우리 맛은 겹치지 않게 하자!”
“그래, 그게 좋겠다. 이유천. 이거 지금 주문하면 바로 배달 가능하니? 은하네 집으로 보내고 싶은데….”
“에이, 뭐 하러 살려고 그래? 그냥 주소만 말해줘! 내가 누나랑 하양이 이름으로 보내놓을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은하가 찐빵이 물렸다는 걸 모르는 한서현과 정하양이 찐빵을 상자채로 주문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은하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맛있다며.”
“안 맛있어?” “어? 은하야, 이거 별로야?”
두 사람 그리고 한 사람 더.
세 사람이 의아하다는 눈을 하고 그렇게 물어오니 은하는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합 종류별로 2상자씩.
오늘 바로 은하의 집으로 배달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그의 병실에도 오고.
당분간 찐빵만 먹고 살겠네….
병원이라도 돌아다니며 환자들에게 찐빵을 나눠줘야 하는 건 아닌가.
은하는 진지하게 걱정했다고 한다.
☆
이유정이 엘릭서를 복용하고 나서 한 달 가량이 지났을 때.
드디어 그녀의 면회금지가 풀렸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한하여 제한된 면회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허락되게 된 것이다.
“─나랑 유정이 보러가지 않을래? 유정이도 누가 자신을 구해준 건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 다음에 올까?”
“…유천 오빠. 다음에 들어올 때는 제발 노크 좀 해주면 안 돼…?”
“그래, 맞아. 사람 창피하게시리….”
“…나랑 이러고 있는 게 창피해?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하양아, 그런 말이 아니라…. 너도 알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헤헤, 은하야.” “…왜?”
“나는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하~나~도 모르겠는데?” “어…, 얘들아? 미안해. 다음부터는 내가 노크하고 들어올게. 그러니까 나 때문에 싸우지 좀 마….”
이유천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은하의 병실을 기습적으로 찾았고.
하필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있던 은하와 하양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아야 했다.
이후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하양이 애꿎은 은하에게 투정을 부린 것은 기정된 일이었다.
한편 이유천은 은하의 원망을 사야 했다.
“그래서 은하야. 내일 시간 되면 나하고 같이 유정이 병문안 갈래?”
“…….”
“너한테 소개시켜주고 싶어.”
어찌어찌 분위기를 무마하고.
이유천은 은하에게 권했다.
은하는 뒤에서 하양을 안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만나러 가고 싶기는 한데….
사실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은하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이미 유정을 만났고, 그녀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매일 밤 밀회를 하는 사람의 정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렇게 됐다가는….
밤마다 편한 마음으로 만나는 것도 이제 못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은하는 이유정을 만나고 싶었고.
이제는 이유정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 갈게. 내일이라고 했지?”
“어. 내가 내일 점심에 데리러….” “나도 갈래! 나도 오랜만에 유정이 보고 싶어!”
결국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하양도 불쑥 손을 들어서는 자신도 그녀의 병문안을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정하양이 한서현에게 말해, 한서현도 같이 병문안을 가게 됐다.
“─어? 한서현 누나도 가게?” “왜. 나는 가면 안 되니?” “어…, 아니야! 당근 누나도 되지! 그렇지 않더라도 유정이도 누나가 일본에 가고 나서 만나지 못했다며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그리하여 다음날.
이유천, 노은하, 정하양, 한서현.
네 사람은 앨리스병원 최상층에 입원해 있는 이유정의 병실을 찾았다.
“─은하야.” “어.” “내가 어제도 말한 거지만….”
“알고 있어.”
이유정의 병실 문 앞.
이유천은 문고리에 손을 얹은 후, 은하를 돌아보았다.
이유천의 얼굴은 진지했다.
은하는 그가 주저하며 꺼내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나쁘게 생각도 안 할 거고, 거기에 대해 캐묻지도 않을 거야. 형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지?”
“나 못 믿어?”
“…미안. 나도 안 이러고 싶은데, 어렸을 적에 유정이가 이것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거든….”
“들었어. 알아. 이해해.”
전날, 이유천은 은하에게 이유정이 장애를 안고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
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 이유정의 만남을 제한해왔다고.
그녀가 안고 있는 장애는 엘릭서도 치료하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또한 이유천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부디 여동생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무심코 던진 말이 그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달라며.
내가 왜 유정이를 상처 주겠어?
정신머리가 제대로 있는 사람이면 유정이한테 그런 말을 안 하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냥 나한테 죽는 거지만.
자신의 여동생이 상처를 입을까.
이유천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절대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당부했다.
“─열게.”
이윽고 이유천이 수긍하고.
그가 세 사람에게 말하고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유정아, 나야. 우리 면회 왔는데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이유천의 확인.
그리고 이유정의 승낙.
은하는 문 너머로 들린 목소리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유정이가 내 목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 반, 기대 반.
은하는 문이 열린 병실로 향했다.
이유천이 먼저 들어가고, 다음으로 한서현과 정하양이, 마지막으로는 은하가 병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문을 닫고 이유정을 찾았을 때─.
“─안녕하세요.”
사용인의 도움을 받으며.
어깨에 분홍 카디건을 걸친 그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유정아,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안 아파?”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네,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잘 지냈어요?”
이유천이 이유정에게 그가 데려온 사람들을 소개하고.
정하양이 반가워하며 곧장 그녀의 침대로 향했다.
이유정은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정하양이 익숙한 행동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안부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서현도 합세했다.
“─안녕.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와…, 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언니도 잘 지내고 있는 거죠?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죠?”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 그리고 우리 몸은 챙기지 말고 먼저 네 몸부터 신경을 쓰고. 그런데…. 확실히 괜찮아지기는 한 것 같네. 내 기억보다 근육도 많아진 것 같고 꽤 건강해 보여.”
“아, 제가 요새 좀 많이 먹어서요. 그래서 조금 쪘어요.”
“나도야! 나도 요즘에 너무 먹어서 찐 거 있지? 겨울이라서 다행이야. 아무도 안 보잖아. 서현이 언니도 그렇지?”
“그래서 나는 누구 때문에 밤마다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잖니. 그런데 너는 아카데미에 재학하고 있으면서 운동량이 부족….”
“저는 머리만 쓰는 사람이거든요? 언니, 너무해…. 그러지 않아도 나도 신경 쓰고 있던 건데….”
“에이, 하나도 안 찐 것 같은데요? 제 기억으로 손은 전에 만났을 때랑 똑같은 것 같아요. 착각이겠죠.”
“역시 유정이 너밖에 없어! 서현이 언니는 너무 깐깐하단 말이야.”
“살이 찌면 손이 찌는 게 아니니까 하는 말….”
“흥! 사실은 위로 쪄서 그런 거란 말이야.”
“결국 지방이 늘어났다는 거구나.”
“흑…. 유정아, 서현이 언니가 자꾸 나한테 뭐라고 그래!”
“에이, 언니가 장난을 치는 거예요. 알잖아요, 언니가 그러는 거.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자, 언니도 얼른 사과해야죠?”
“…말이 심했다면 미안해. 그냥…, 하양이 네가 당황하는 얼굴이 제법 재미있어서 그런 거야.”
이유천은 소외된 채로.
그들은 서로 근황을 주고받으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기도 했다.
셋이 친한가 보네.
하긴…. 서현이랑 원래부터 친했고, 서현이가 유정이한테 하양이도 소개시켜주었다고 그랬나.
치사하게…. 하양이도 소개시킬 때 나도 좀 소개시켜주지.
은하는 서로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서현도 그렇고, 정하양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유정이 저리도 격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번 삶에서도, 그녀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기뻤다.
“─너는 왜 거기 가만히 서 있고 그러니?” “맞아. 얼른 이리로 와. 유정이도 전에 너 보고 싶다고 했단 말이야.”
“은하야, 이리로 와. 유정아, 은하 소개시켜줄게. 내가 그동안 몇 번 얘기했었지?”
은하가 멍하니 보고 있던 그때.
이유정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불렀다.
정신을 차린 은하는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유정이 손을 내민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가 사람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
은하는 말없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
그녀의 표정이 변한 건 한순간.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 하듯.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오묘해지고.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사신…님…?”
그녀가 나직이 읊조리고.
“─안녕? 나는 노은하라고 해.”
장난에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노은하는 키득거렸다.
☆
‘가문의 수치가 따로 없군. 어디서 맹인 따위가 우리 가문에 들어와서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를 뀌어? 너, 내 눈앞에 띄지 마라.’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그렇게
도 부르지 말고.’
어렸을 적에 있었던 일이다.
이유정은 본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의 형, 이병인과 친해지려 말을 걸어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이유정에게 돌아온 것은 이병인을 포함한 이병인 일가의 경멸이었다.
그날 이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그녀는 가족들에게 각별한 보호를 받아왔다.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는 사람들.
또한 그녀가 친분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까지.
가족들이 철저히 선별해주었다.
‘─어머. 다음에는 오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았나요?’
‘…너희 가족들이 워낙 까다로워서 오기 싫다고 말했을 뿐이야. 다음에 오지 않겠다고 말을 한 적은 없어.’
‘네, 죄송해요.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그냥…, 답답해서 그냥 나와봤어. 너한테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안심할 수 있어서 온 거야.’
‘네?’
‘그런 게 있어.’
그러다 그녀는 한서현을 만났고.
그날 이후로 그녀는 한서현과 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서현의 소개로 정하양을 알게 되기도 했고.
‘─응! 은하가 단 걸 엄청 좋아해. 매달 루미너스 스위트에서 나오는 한정품을 맛보러 갈 정도야.’
그러다 언젠가부터.
한서현도 그렇고, 정하양도 그렇고.
이유정은 두 사람과 대화를 하면 걸핏하면 노은하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노은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자연히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노은하의 이름이 정재계에서 점점 알려지던 시기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그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 대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던가.
‘─네? 하양 님이랑 서현 언니가 노은하 그분이랑 사귀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게, 말도 마. 당당히 양다리를 걸치겠다고 말했다니까? 은하 걔가 이럴 줄 몰랐지만, 설마 하양이랑 한서현 누나도 이럴 줄 몰랐지.’
‘그만큼 두 분이 많이 좋아했었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잘 돼서.’
‘어? 유정이 너는 아무렇지 않아? 나는 은하가 양다리를 걸친다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네? 그런가요? 글쎄요….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해서….’
노은하와 정하양의 교제.
노은하와 한서현의 약혼.
이유정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듣게 되고서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더랬다.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니까.
물론, 노은하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야 그녀는─.
─저도 그렇게 해서 태어났는걸요.
그녀는 서출이었다.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아버지의 첩조차 되지 못한 어머니의 배에서 세상에 태어난 존재.
그럼에도 이유천의 어머니로부터 친자식처럼 사랑을 받은 존재.
그러다 보니 그녀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정하양과 한서현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컸을 뿐.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요.
여하튼 이유정은 두 친구의 정인에 호기심을 품었다.
필시 좋은 사람이리라.
그러지 않으면 정하양과 한서현이 하렘을 만들게 될 것을 알 텐데도 그런 선택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안녕? 나는 노은하라고 해.”
설마 그 노은하라는 사람이.
매일 밤마다 만나는 사신님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신님의 손이 맞아.
목소리는 틀림없었고.
또한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유정은 은하가 사신님이란 것을 확신했다.
내가 왜 우울해하는 거지?
친구들이 병문안을 온 날.
그녀는 억지로 웃었으나.
내심 우울해하고 있었다.
이유야 모르지 않았다.
노은하가 사신님이었으니까.
사신님한테는…. 이미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거네요.
이제는…, 만나면 안 되겠죠?
자신이 그동안 사신님에게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이유정은 적어도 자신이 사신님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더는 매일 밤마다 다른 사람 몰래 만남을 가졌던 사신님을 더 이상은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이미 임자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만나고 싶은데….”
만나고 싶건만.
만나서는 안 된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아니, 뭐라고 말하면 안 될 마음이 지금보다 더욱 커지기 전에 접어야 했다.
“이제는 안 오겠죠?”
사람들이 모두 가고 난 그날 밤.
이유정은 침대에 누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늘밤도 그가 창문을 두드려주기를 기다렸다.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그리고 그날 밤 역시─.
─똑똑
그는 창문을 두드렸고.
그녀는 재빨리 눈물을 닦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기다렸어요. 사신님.” “글쎄, 나는 사신님이 아니라니까? 앞으로는 이름으로 편하게 불러.” “…은하…, 님?” “그놈의 ‘님’ 자도 좀 빼고. 그냥, 말도 편하게 놨으면 좋겠어.”
“…응. 그렇게 할게, 은하야.”
경어가 몸에 밴 그녀였으나.
그녀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어 서투르게나마 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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