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79
클랜의 기본 업무는 관할구역 내의 마나적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나적 사태란 편재가 발생하거나 몬스터가 출몰하는 것을 비롯하여, 넓게는 마나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사태를 뜻했다.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어!”
“은하 너는 골목길을 나가는 대로 좌측으로 뛰어! 연화 너는 우측을 맡아주고!”
클랜에 실습을 나간 학생들은 대개 자잘한 행정업무를 처리하거나 혹은 기본 업무를 수행하고는 했다.
은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멘토 역할을 맡은 노은아, 류연화 그리고 레귤러스클랜 네비게이터와 파티를 짠 은하는 도심을 순찰하며 마나적 사태를 해결하고는 했다.
이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끽! 끼룩! 끼끽!
편재는 주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 발생하기 마련이었고.
그러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생성되고는 했다.
따라서 점심을 먹고 골목길이 많은 구역을 순찰하던 은하와 파티원들은 때마침 몬스터를 발견했더랬다.
“둘 다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어! 내가 떨어뜨릴 테니까!”
영장목의 제7위계 몬스터.
마치 털이 벗겨져 피부가 드러난 원숭이를 떠올리게 하는 몬스터는 그들에게 발견을 당하자마자 즉각 도망쳤다.
놈은 재빨랐다.
성인 남성의 다리 길이만큼 커다란 녀석은 건물 벽과 벽을 밟고 뛰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에 네비게이터로부터 몬스터의 정보를 들은 은아는 파티원들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렸고.
은하와 연화는 사람 한 명 정도가 지나갈 법한 틈새 속으로 뛰었다.
천보
은하의 시선은 뛰는 와중에도 계속 머리 위를 향했고.
길을 막고 있는 쓰레기더미를 밟고 틈새를 빠져나왔다.
대로변이었다.
은아의 지시를 기억한 은하는 즉각 왼쪽으로 뛰었고.
그사이 틈새를 빠져나온 류연화가 그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뛰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진형이 되었고─.
“─혹시 모르니까 머리 조심해!”
아직 골목길 안쪽에 있던 은아가 마나를 담아 외쳤다.
그녀가 석장으로 바닥을 치자.
석장에 걸린 고리가 짤랑거리더니 순간 거센 바람이 불었다.
끼이이이익!! 끼끼끽!
바람은 건물 지붕들을 넘나들면서 그들로부터 도망치려 하던 몬스터를 덮쳤고.
순간적으로 일어난 강풍은 녀석을 옥상에서 대로변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마침 그 아래에서 대기하던 은하와 류연화는 비명을 지르듯이 떨어지는 녀석을 보았다.
한매류
빙판길
먼저 움직인 사람은 류연화였다.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녀가 발밑에서 생겨난 얼음을 추진력으로 하늘로 솟구쳤다.
치링
긴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허리를 최대한으로 꺾은 류연화는 녀석이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창을 휘둘렀다.
단 한 차례 휘두른 것만으로.
창을 휘두른 궤적에 얼음이 일고.
공중제비를 하듯 떨어지던 녀석은 얼음을 머금은 창에 꿰뚫렸다.
끽….
가슴을 뚫고 나온 창.
그 순간, 녀석의 몸이 얼어붙었고.
최종적으로 녀석은 거울이 깨지듯 얼음 파편으로 나뉘어 사라졌다.
“─이다!”
“류연화야!”
창의 궤적을 따라 만들어진 얼음도 눈결정이 되어 흩어지고.
빛을 받은 눈결정이 반짝인다.
빛무리 속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지면으로 사뿐히 착지하는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눈결정, 창, 푸른 머리.
류연화.
사람들에게 류연화의 외모는 익히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길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연화 언니 사랑해요!!””””
“사진! 누구 사진 찍은 사람!?”
사람들의 격한 반응과 다르게.
바닥에 떨어진 마석을 주운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반응에 까무러치게 좋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은하에게 다가갔다.
“…….” “…왜 그래?”
은하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표정을 읽은 류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은하는 대꾸했다.
“아니, 나는 한 게 하나도 없어서.” “…은하 너는 만에 하나 몬스터가 도망치지 못하게 길을 차단했잖아.”
“그리고 내가 가만히 있는 사이에 누나는 몬스터를 토벌했지.”
“…미안. 화났어?”
오늘 처음 몬스터를 만났나 했더니 너무 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몸을 푸려던 은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장난삼아서 그녀에게 뚱한 얼굴을 보여주었더니.
류연화가 의외로 안절부절못해하며 은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다음엔 내가 양보할게. 그러니…, 화 좀 풀어주면 안 될까?”
“…….”
“빠빠.”
은하는 눈을 깜빡거렸다.
설마 류연화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용서를 구하려 할 줄 몰랐다.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불닭이가 타박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은하는 얼른 얼굴을 풀고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누나 앞에서는 농담 하나 제대로 못하겠다니까? 장난한 거야. 몬스터를 누가 죽이든 아무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냥 사람들한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는 거지.”
“…화 안 난 거지?” “누나는 내가 화난 게 보고 싶어?”
“아니. 보고 싶지 않아.”
도리도리.
은하와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류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긴 머리칼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는 그녀가 열렬히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약간, 어린애 같았다.
“내가 누나한테 왜 화를 내겠어. 그냥 장난친 거였어. 미안해. 이제 누나한테 장난 안 칠게.”
“…아니야. 나는 장난치는 것도 좋아해.”
“응?”
“누가 나한테 장난치는 거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해도 돼.”
“허….”
보면 볼수록 별난 사람이다.
엉뚱한 면이 있다.
가끔 보면 사람을 종잡을 수 없다.
이전 삶과 다르게 류연화와 친해진 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 그럼 그럴게….”
“응. 많이 해줘.”
류연화 나름의 친밀표현이리라.
당황한 감정을 추스른 은하는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이 주변에 떡볶이 포장마차가 많던데…. 우리 어묵 먹을래?”
“어묵? 방금 점심 먹지 않았니?”
“아까 보니까 맛있어 보이던데….”
“응, 당장 먹으러 가자.”
“누나는 배 안 불러?”
“…열심히 먹어볼게.”
못 먹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은하는 무언가 비장한 각오를 한 류연화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
사실 고등아카데미 3학년 학생들이 클랜에서 실습을 하는 동안 무리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노은하와 같은 유망주들의 경우야 그들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전투가 가능한 업무를 맡긴다지만.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편입생들의 경우에는 많은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찾았다. 우리 은하 여기 있었네. 근데 얘가 근무는 팽개쳐놓고 지금 떡볶이를 먹고 있네? 아주 꿀이나 빨고 있구나.”
베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귤러스 클랜원들은 운이 좋게도 자신들의 클랜에 실습을 나온 그녀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자신이 맡은 행정업무를 처리하자마자 남모르게 클랜회관을 빠져나왔더랬다.
그러고는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을 은하를 감시하러 나섰다.
“클랜 실습이 뭐 애들 장난인가? 누나들하고 재미나게 놀고 있네. 아휴, 순대 맛있게 먹는 것 봐. 이것들이 하라는 근무는 안 서고….”
노은하는 노은아, 류연화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분식을 먹고 있었다.
베베는 근처 건물 옥상에서 숨어서 그들의 모습을 염탐했다.
망원경을 쓸 필요도 없이 그녀는 학생들이 모르는 마법을 사용하여 마치 바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분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군침이 흘렀다.
누구는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혀로 입술을 핥으며.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녀는 집중해서 그들의 입술을 읽으려고 했다.
그녀에게 순독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먹으면 뻑뻑할 텐데….
연화 누나, 국물도 마셔봐.
입안에 잔뜩 들어가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는 류연화.
은하는 그녀에게 친히 어묵국물을 떠주었다.
…고마워.
류연화가 목 넘김을 하고.
은하에게 종이컵을 받으며 웃는다.
“…도 웃기는 하는 구나.”
그러자 베베는 신기하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업계에서 류연화의 성격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게 잘 알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은하, 노은아와 대화하는 류연화는 나이 또래의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이, 지 누나는 쏙 빼놓고 연화만 챙겨주겠다 이거지? 내가 남동생을 잘못 키웠네, 잘못 키웠어.
그건 그렇고 아주 재미있게들 놀고 있다.
노은아가 화를 내는 척을 하고.
노은하가 허겁지겁 그녀를 위해서 어묵국물을 떠주고 있다.
베베는 혀를 쯧쯧 찼다.
“먹지만 말고 좀 일하는 모습이나 보여주란 말이야. 내가 계속 너희를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
레귤러스 클랜 내에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입 안으로 먹는데 신이 난 노은하에 대한 욕을 중얼거렸다.
그러던 그때─.
“─왜 은하를 감시하는 거지.”
“…….”
눈 깜짝할 사이였다.
뒤통수에 날붙이 같은 게 닿았다.
아니, 날붙이가 맞았다.
노은하를 감시하느라 그만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로 뒤에서 검을 겨눌 정도로 내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말이야.
상대의 은신 능력이 뛰어나다.
베베는 노은하에게서 시선을 떼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항복의 의사표시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머, 창진 선배님. 이런 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베베는 눈앞에서 드리운 칼을 보며 생긋 웃었다.
칼을 손에 쥔 상대는─.
“─모르는 척 연기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당신이 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어머, 들켰네. 너하고 난 면식이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한창진.
머플러로 입가를 가린 그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
처음에는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창진은 그다지 베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요 며칠, 아무래도 그녀가 은하를 감시하는 정황이 보이고.
한창진은 그날 이후로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플레이어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보법이 아니야. 저건 살수나 쓸 법한 발걸음이야.
고등아카데미 3학년 편입생 베베.
그녀의 행동에서 어둠에 발을 담근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났다는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정체가 뭐지?
잠깐,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한창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머지않아 한창진은 그녀가 어둠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또한 떠올리기도 했다.
과거, 백서진을 따라 어둠의 세계에 들어갔던 기억을.
─틀림없어. 이야.
그때는 먼 위치에서 힐끗 쳐다본 수준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창진은 에 대한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베베와 똑 닮았더랬다.
아니, 베베가 그녀 본인이었다.
“─과연 야. 내가 이렇게 칭찬해줘야 하나, 후배님?”
“묻는 말에나 답해. 어째서 은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지?”
“글쎄…. 내가 후배님이 묻는다고 대답해줘야 할 의리라도 있나?”
“…….”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녀에게 이름이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름만이 아니다.
성별을 제외하고 나이도, 출신도, 성격도 그녀를 특정할 만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음지 속에서 은밀히 첩보활동을 수행하는 그녀를 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런 사람이 어쩐 일인지 난데없이 베베라는 가명을 사용해 아카데미에 편입했다.
그리고 은하를 감시하고 있다.
한창진은 그녀에게 검을 겨누면서 의구심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지? 그런 식으로 입을 놀렸다간 나한테 죽….”
“해봐, 어디. 죽여 보든가.”
“…….”
“과연 내가 곱게 죽어줄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 번에 나를 죽이지 못하면, 사람들은 너랑 내가 싸우는 걸 목격하게 될 테지. 과연 그때 가서 네가 날 먼저 공격한 걸 뭐라고 변명할까?”
“…….”
“아, 그런 방법도 있겠네. 너한테 겁탈을 당했다고 주장이라도 할까? 나야 대외적인 이미지는 없다지만, 너는 아닐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퍽이나 궁금하겠네.”
“협박하는 거냐.”
“협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에게 총애를 받는 네가 이렇게 머리를 굴릴 줄도 모르다니 그럼 어떡하니?”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망설임.
은 그것을 간파한 듯했다.
살수로 살아가는 법은 터득했으나, 막상 어둠에 몸을 담그지 않은 그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이제는 총애를 받았다고 말하는 게 좋으려나?”
그녀가 조소했다.
눈앞에 있는 칼을 보고도 대놓고 깔깔거렸다.
“이 그렇게 공을 들여 너를 단련시켰는데 말이야. 어떻게 너는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거니?”
“닥쳐.”
“우리 세계에 소문이 쫙 퍼졌단다. 네가 여자한테 푹 빠져서는 몸에도 맞지 않는 짓이나 하고 있다고…. 그래, 지금 이렇게 말이야.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나한테 되지도 않는 위협이나 가하고 있고 말이지.”
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런 동작으로 눈앞에 있는 칼을 치워버렸다.
그러고는 창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러니 이 너한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말한 거지.”
“……!”
“이대로 그냥 나를 모른 척하렴. 이 이상 네 스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설마 스승님께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
블러핑인가 아닌가.
한창진은 웃음으로 답하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선심을 썼다는 듯이, 그를 지나치며 말을 꺼냈다.
“높으신 분들 중에서 노은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 같니?”
“그들이 당신에게 은하를 감시하란 의뢰를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건데?”
“대체 왜 은하를….”
은 직접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사실상 한창진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한창진은 믿기지 않았다.
어둠이, 이 움직일 정도로 노은하를 감시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상황이.
아직 플레이어도 되지 않은, 일개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한 노은하를 말이다.
이에 은─.
“─튀어나온 못은 박히기 마련인데 그 아이가 좀 특별했니? 이제 와서 감시를 명하는 게 이상한 거지.”
친절한 어조로 답하는 .
한창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 이대로 나를 모른 척하렴. 내가 나쁘게 보고해서, 네 친구가 무서운 사람들한테 험한 꼴을 겪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
“나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거든. 그 아이에게서는 권력의 냄새가 나. 그런데 내 정체가 까발려지게 돼서 그 아이랑 척을 지고 싶지 않거든. 나는, 권력을 사랑하니까.” “당신에게 의뢰를 준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머, 이제 와서 존댓말?”
“…….”
“글쎄….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다른 사람도 가지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
“…….” “아니면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대체….”
“근데 내가 말하는 이야기를 너무 곧이곧대로 믿는 것 아니니? 만약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어쩌려고?” “……!”
놀리는 듯한 어조.
은 그대로 한창진을 지나쳐, 옥상을 내려가는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연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사람의 말을 무작정 믿을 게 아니라 의심부터 할 줄 알아야지 않겠니? 아무래도 헛배운 모양이구나.”
“…….”
“그렇게 촉망받던 애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한창진은 주먹을 부릅 쥐었고.
그녀는 혀를 쯧쯧 차기만 했다.
“그럼 누나는 그만 가볼게. 앞으로 우리 서로 아는 척은 하지 말자.”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로 더는 의 가 아니게 된 한창진.
그는 분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바로 그때, 은 손을 흔들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고는 그녀가 문을 잠갔다.
“아….”
한창진은 문이 철컥 잠기는 소리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같은 시각, 골목길 어귀에서.
이십오는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니 이 너한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말한 거지.]사전에 그는 자신의 주인 은하에게 언질을 받았었기에.
은하가 몬스터를 퇴치한 부근에서 멀리 떨어진 포장마차까지 구태여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알고 있다면─.
─거기에서 주인님을 감시할 만한 위치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이십오.
그가 역이 하나 떨어진 위치에서도 베베와 한창진의 대화를 도청할 수 있던 이유였다.
은하를 감시하기 적당한 위치에다 도청마법을 설치하고 그중 하나가 작동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주인님께서 쉽게 보려 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까이서 감시하는 건 피했는데….
주인님 말씀대로 그냥 피하는 게 정답이었네. 설마 까지 거기에 있었을 줄이야.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둘.
한 명은 이라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였다.
상대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도청마법을 공을 들여 설계한 그는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이거 생각보다 뜻하지 않은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과 .
그들은 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나머지 그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십오는 베베의 정체가 음지에서 이명만 알려져 있는 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잠입을 해서는 자신의 주인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또한 그녀가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암암리에 그 사람이 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진짜였나 보네.”
이십오는 한창진이 더는 백서진의 가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인님께 알려드려야겠네. 그런데 이라…. 아무래도 의 태도로 보아서는 내가 아는 것보다 뭔가 더 있는 사람인 모양인데…. 한 번 알아보기는 해야겠네.”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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