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82
십이좌 이도진.
한동안 지방 출장을 다녀야 했던 그는 오랜만에 신라클랜을 찾았다.
“─금일부로 신라클랜에 복귀하여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지방을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바로 클랜 일에 복귀하지 말고 며칠은 쉬지 그래. 휴가는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아니요. 일을 하는 게 좋은 걸요. 그리고 휴가를 얻어도 할 게 없어서 답답하기만 하더라고요.”
“사람이 그렇게 재미없게 살아서야 인생의 보람이 있나….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연애라도 하지 그래. 도진이 너 좋다는 사람들이야 많잖아.”
“연애…. 저도 하고 싶기는 한데, 주변에 마음이 가는 사람도 없고, 일하느라 만날 시간도 없어서요.”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고…. 그래, 그럼 오늘부터 클랜 업무로 복귀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올해로 30대 초반에 접어든 그는 신라 클랜로드 김유진에게 얼굴을 비췄다.
서류 업무를 하고 있던 김유진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반겼고.
이내 그녀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지. 업무에 복귀한다고 해도, 이번 달 시프트는 이미 작성했으니 마땅한 자리가 없을 거야. 그러니 이참에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때?” “다른 일…, 말씀인가요? 어떤….”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꼬꼬마들이 실습을 나왔거든. 그 애들 선배로서, 또 클랜도 홍보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애들을 돌보는 건 어때?”
“애들이요? 아, 그러고 보니 아마 이맘때쯤이면 아카데미에서….”
“일단 일어나자. 그냥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게 낫겠지.”
아카데미 학생들의 클랜 실습.
김유진의 말은 들은 이도진은 곧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아카데미 3학년 학생들의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그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현철이 때문에 힘들었지. 현철이가 사고를 쳐서 벌을 받으면 나까지 벌을 받아야 했으니까….
그런 놈이 이젠 한 클랜을 이끄는 클랜로드라니…. 그때는 나도, 걔도 상상도 못했을 거야.
이도진은 옛 기억을 떠올리고 그만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집무실을 나와 그와 걸음을 나란히 걷던 김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녀는 늘상 있는 일이란 듯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실습을 나온 애들은 꽤나 각광받고 있는 애들이거든. 그러니 그 애들이 우리 클랜에 관심을 갖게 네가 잘 좀 대해줬으면 좋겠어.”
“각광을 받는 애들이라…. 클랜로드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꽤 대단한 애들인가 보네요.”
“아마 너도 나중에 그 애들 실력을 확인해보면 놀랄 거야. 노은하 사단이라고, 들어는 봤지?”
“노은하 사단이요?” “…몰라?”
“제가 일에 치여만 살아서….”
“주변에 그리 관심이 없어서야….”
노은하 사단이라는 말을 듣고.
이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짱을 낀 김유진은 혀를 쯧 차며 노은하 사단에 대해 설명했다.
그제야 그는 들어본 적이 있다며 대답했다.
아,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였구나.
분명…, 척사 다뉴조문경을 얻은 학생이라고 했던가.
작년에는 제4위계 몬스터 각군봉을 쓰러뜨렸다고 하고….
노은하.
웬만해서 서울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방을 전전하던 이도진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야말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것은 김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노은하를 지목해서 아카데미에 제안서를 넣고는 했지. 그런데 걔가 앨리스그룹의 직계랑 사귀고 있어서….” “하긴, 그러겠네요. 어쩔 수 없죠, 혜림이네 클랜에 간 것도. 그러면 이번에 온 애들은 노은하의 친구란 거죠?”
“그래. 아쉽기는 하지만 걔네들도 제법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더라고. 바로 얼마 전에는 둘이서 합공해서 당원이를 몰아붙이기도 했다니까?”
“도당원 선배님이요?”
도당원은 신라 클랜에서 손꼽히는 여섯별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아직 플레이어도 되지 않은 학생이 둘이서 힘을 합쳐서 여섯별을
몰아붙였다니.
이도진은 김유진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애들인 거지?
아직 그들을 만나지도 않았건만.
그는 벌써부터 아직 만나지 않은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진이 안내한 곳은 클랜회관 내 훈련실이 있는 곳이었다.
“어떤 애들인지는 이제 네가 직접 확인해보고. 네가 당분간 맡게 될 애들은 저기에 있는 애들이야.”
“…….”
김유진은 훈련실 한편에서 클랜원들과 무어라 떠들고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이도진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보기로 했다.
한 사람은 머리를 묶은 여학생.
다른 한 사람은 늑대 귀를 지닌 아인 남학생이었다.
그들이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
“…어?”
“아무래도 알아봤나 본데?”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러고는 대뜸 그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꼭 전차가 달려오는 것 같다.
이도진은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 사이, 그들은 그가 있는 바로 앞까지 달려왔더랬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한 사람이 외치기를─.
“─안녕하…컥…! 김민지 너…!”
“─꺄아악! 도진 오빠!!!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어어…, 그래. 안녕.”
여학생이 달라붙을 정도로 다가와 눈을 초롱초롱 반짝였다.
이도진은 여학생의 열렬한 환영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일 먼저 그에게 접근했던 남학생은 여학생의 팔꿈치를 맞고서 나가떨어졌더랬다.
“십이좌 일은 전부 끝나신 거예요? 일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아하하…. 나는 괜찮아. 넌 이름이 뭐니?”
“김민지입니다!”
“김민지?”
이름을 물으니.
대뜸 답하는 여학생.
이도진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순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봄직한 이름.
하지만 그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김민지라는 이름이 워낙에 흔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리라.
그녀 역시 상관하지 않아 했고.
이도진은 자신과 악수를 하자마자 자지러지듯 기뻐하는 그녀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형!”
“…응?”
김민지를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인 남학생이 대뜸 그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남학생은 당돌했다.
이도진은 그의 기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형이 뭐야, 형이! 도진 오빠가 왜 빙구 오빠 형인데?”
“나보다 잘 나가면 형인 거지, 뭘! 그리고 지도 오빠라고 부르면서….”
“오빠랑 형은 다른 거거든?” “아무튼 됐고, 됐고!”
“어…. 얘들아? 싸우지 말아줄래?”
김민지와 자신을 진파랑이라 소개한 남학생이 티격태격 다툰다.
이도진은 그들의 다툼을 중재하려 끼어들었다.
그러다 진파랑이 대뜸 그를 향해 입을 연 것이다.
“─형! 형! 형! 저랑 한 판 해요!” “어?”
“빙구 오빠! 버릇없게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럴 때 아니면 십이좌하고 언제 또 싸우겠어? 네? 형! 형! 저하고 한 번 싸워요.”
너무나 당돌한 남학생이다.
그게 또 학창시절에 곧잘 다퉜던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게 해서.
이도진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좋아. 하지만 형은 너희가 학생이라고 봐주는 거 없다?”
“형! 역시 우리 형이 최고야!”
“어, 전 도진 오빠랑 싸우고 싶지 않은데…. 빙구 오빠 때문에 이게 뭐야….”
☆
유수진.
최연소로 십이좌가 된 그녀도 이제 템페스트클랜 내에서 중역을 맡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 그녀의 업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떳떳하게 태업을 했으니까.
“음….”
클랜 회의 도중이었다.
자리만 차지하고서 꾸벅꾸벅 졸던 그녀가 어쩌다 잠을 깼다.
그녀가 잠에서 깨자마자 든 생각은 두 가지였는데─.
─여기는 어디?
배고파.
이성보다 욕망에 충실한 그녀.
욕망으로 행동방식을 정한 그녀는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회의를 진행하던 간부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수진에게 고개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갑자기 자리는 왜?”
간부들이 벙찐 가운데.
템페스트 클랜로드 강예희가 말을 꺼냈다.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안경을 쓴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드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배고파서요.” “”””…….””””
는 그 자리를 순식간에 침묵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좌중은 그녀가 내뱉은 말에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강예희가 흉흉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밥 먹고 올게요.”
“”””…….””””
유수진은 당당히 강예희를 지나쳐 회의실을 나갔더랬다.
강예희를 비롯한 간부들은 이제는 말리기도 싫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편 회의실을 나온 유수진은 먼저 클랜회관 내 식당에 들어섰다.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전부.”
“그래, 디저트는 필요 없고?”
“…감사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그녀의 식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디저트라는 말에 침을 주룩 흘린 그녀가 팔뚝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러고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는, 하나하나 나오는 음식을 맛봤다.
그녀가 음식을 먹어치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총.”
배를 가득 채웠을 때.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회의실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사라져 있었다.
식후 운동이라고.
유수진은 대물 저격총을 지고서는 지하 사격장으로 향했다.
─탕
클랜원들이 한창 일하는 시간대.
사격장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여긴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클랜원들을 발견했다.
아니야.
이내 그녀는 부정했다.
클랜원이 아니라 저들은 얼마 전에 아카데미에서 실습을 나온 학생들이었다.
유망주라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원체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그녀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당연히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고.
“─앙. 음, 맛있어!”
“…….”
그래서 그냥 무시하려 했더니.
한쪽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여학생에게 시선을 향했다.
“역시 사격장에서 먹는 소시지가 최고라니까! 노은하는 모르겠지?”
“…맛있겠다.”
조명 아래 의자에 앉아서는.
다리를 붕붕 흔들며 소시지를 먹고 있는 여학생.
분홍 머리 양 옆에 비늘이 있는 아인은 그녀의 존재도 모르는 채로 소시지를 하나 더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 유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웅? 오! 말 없는 언니다!”
“…….”
“안녕하세요!”
“…안녕.”
유수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반 소시지와 다르게 유난히 붉은 소시지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내 아인 여학생도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아, 이거요? 이번에 은하은하가 간식이나 먹으라고 선물해준 건데, 아, 은하은하가 누구냐면요….”
“어디 꺼야?”
“루미너스에서 나온 거래요! 엄청 빨갛죠? 이게 꽤 매콤한 거 있죠? 술안주로 딱일 것 같은데….” “…….”
“한 입 드실래요?”
“…한 입만?”
무언가 재잘재잘 설명하는 여학생.
하지만 유수진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 입만’이란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야, 여학생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소시지가 몇 개 더 있었으니까.
“…한 개만.”
“이건 그래구래 주려고 남겨두고 있던 건데….”
“한 개만.”
“잘 먹어요?”
“응, 나 잘 먹어.” “잘 마셔요?”
“응, 나 잘 마셔.” “나중에 저한테 술 사주시면 한 번 생각해볼게요.”
“응, 좋아.”
정상적인 사람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극적인 타결을 맺었다.
유수진은 아예 여학생의 옆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건넨 소시지 껍질을 천천히 벗겼다.
“아….”
“맛있죠? 그쵸?” “응.”
한 입, 또 한 입.
유수진은 소시지를 맛봤다.
어째서 여학생이 조금 전에 다리를 붕붕 흔들었는지 알겠다.
그녀도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야.”
“아리엘!”
“나는….”
“언니 이름은 알고 있어요! 유수진 맞죠?”
“응.”
“히히, 십이좌랑 친구했다.” “친구?”
“같이 소시지도 나눠먹었으니까 친구죠! 원래 먹을 걸 나눠먹으면 다 친구가 되는 법이라고요!” “응, 맞아.”
유수진.
그녀는 흘러가는 바람에 그냥 몸을 맡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리엘이라는 여학생이 뭐라 하든, 유수진은 먹을 것 앞에서는 아무렴 어떻다는 듯이 긍정을 표했다.
그러다 잠시 후─.
“─어머?”
“그래 구래 봉구래?”
“자기, 옆에 있는 분은….”
“나랑 친구 먹었어!”
“친구했어.” “어머?”
사격 소리가 끝나고.
사격장 끝에서 키가 큰 남학생이 걸어왔다.
유수진은 당황해하는 남학생에게 서슴없이 인사했다.
그러는 한편 남학생이 가지고 있던 과녁판이 눈에 들어왔으니─.
“─줘봐.”
“…여기요.”
유수진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남학생이 주춤하고는 사격 표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탄환이 지나간 흔적을 천천히 더듬더니─.
“─잘 박았네.”
“어머.”
“야간사격 상태로 멀리 떨어져서 움직이는 표적을 쏘는 것 같았는데, 괜찮네.”
유수진이 남학생을 칭찬했다.
남학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거, 헤카테?”
“네, 이게 제일 잘 맞아서요. 그럼 선배님도….”
“맞아. 개조하기는 했지만.”
봉구래와 유수진.
그들은 서로 디바이스를 비교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만 말수가 많아지는 그녀였다.
한편 그동안 소시지만 우물거리며 끼어들 틈을 보고 있던 아리엘은─.
“─나만 빼고 놀지 말란 말이야!”
아리엘이 두 팔을 방방 흔들었다.
☆
경기도 시흥시.
구호 작업에 나온 은아와 차은우는 박혜림의 지시에 신속히 대응했다.
“A급 위험 환자는 이쪽으로!”
“언니! 이분 상태가 많이 위급한데 제가 치료해도 될까요!?”
“그래, 은아 너한테 부탁할게.”
“C급 위험 환자는 저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은우 너는…. 아니야, 부탁할게!”
부상자가 워낙에 많았다.
그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서포터들이 집합해 광역 치료마법을 펼치면서 상황은 나아졌다.
어느덧 여유를 얻게 된 박혜림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차은우를 쳐다보았다.
치료마법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제4위계 몬스터 각군봉에게 당한 학생들을 중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이쪽 분야에 안성맞춤인 기프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치료에 열중하고 있는 차은우.
박혜림은 아직 학생에 지나지 않은 그녀가 긴장하지 않고서 신속하게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연습과 실전은 달랐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학생들은 대개 실전에 투입되면 생각과 전혀 다른 현실에 벌벌 떨고는 했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떨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치료하고 있었다.
대단한 애야.
실전을 많이 겪어봐서 그런가?
실전은 중요하다.
그러한 지론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한때 아카데미 학생이었던 은아에게 병원에 실습을 나가보라고 권유한 이유였다.
그런데 차은우는 그런 실습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을 텐데도 솜씨가 좋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가 재학한 031기 기수는 워낙 많은 사건을 겪었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박혜림은 곧 치료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 하는 차은우에게 다가갔다.
“응? 혜림 언니?”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힘들 때는 쉬어두는 것도 좋아. 그렇게 무조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아.”
며칠 동안 숙식을 함께하면서.
박혜림은 차은우에게 언니라고 불릴 정도로 친해졌다.
물론, 박혜림이 언니라고 부르라고 강요한 것이었지만.
여하튼 그녀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며칠 동안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나한테 배워볼 생각 없니?”
“네?” “이제 와서야 를 너에게 권유하는 건 이상할 것 같기도 하니 그냥 나한테 배워보는 건 어떨까?”
일정 자리에 오른 플레이어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는 그들은 자신이 죽은 후의 세상을 생각하게 된다.
혹은 걱정하게 된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누군가 자신의 유지를 계승하기를.
플레이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유지를 이을 사람을 키우려 했다.
박혜림 역시 그러했다.
“─배워보고 싶어요!!”
평소 를 동경했던 차은우는 고민의 여지도 없이 답했다.
☆
노은아와 차은우는 남기로 하고.
어느 정도 구호작업을 끝낸 은하와 류연화는 클랜으로 복귀했다.
오전에 편재를 해소하는 일을 마친 은하는 지하 수련장에서 류연화와 대련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누나는 대련할 때마다 계속 강해지는 거지?
은하는 그녀의 창을 막아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레귤러스클랜에 실습을 나오고.
그녀와 대련을 하게 된 것은 이제 세 번째였는데.
류연화는 그때마다 몰라볼 정도로 다른 면모를 보이고는 했다.
…왼쪽.
그녀는 약점을 빠르게 극복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단순 대련이기는 했으나.
첫째 날에는 그녀에게 승리를 취한 은하는 둘째 날에 똑같은 수법으로 그녀를 상대했다가 패하고 말았다.
오른쪽….
어?
그리고 세 번째 대련.
이때는 클랜원들에게 소식이 퍼져, 수련장에는 시간이 남은 클랜원들이 구경을 왔더랬다.
클랜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는 베베의 눈초리를 받으며.
은하는 류연화를 상대했다.
휘릭
처음에는 호각이었다.
그런데 류연화가 재빠르게 흐름을 제 것으로 만들어서는 몰아쳤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공격을 막으며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유도공격에 당하고 만 것이다.
오른쪽으로 휘어지던 창대가 돌연 역회전을 해서는 왼쪽으로 휘었다.
치링!
공격을 잘못 예측한 은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그야─.
─내껀 또 언제 따라했대?
네가 어제 보여줬으니까.
은하가 광무를 사용할 때 이따금 취하는 공격방식이었으니까.
그녀와 시선으로 생각을 주고받은 은하는 거리를 크게 벌렸다.
그러자 류연화가 거리를 좁혔고.
은하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돌진했다.
“……!”
공격 범위가 긴 류연화로서는 돌연 그가 달려드는 것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은하는 그녀의 창을 피해, 거의 슬라이딩을 하듯 미끄러져서는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러고는 한쪽 손으로 바닥을 치고 반동으로 냉큼 그녀의 등 뒤편으로 돌아갔다.
“…내가 졌어.”
그리고 몇 번의 공방 끝에.
한 번 뒤를 빼앗긴 류연화는 끝내 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했다.
은하는 그제야 검을 거뒀다.
“언제 또 그렇게 강해졌대?”
“은하 너야말로. 이제는 나도 너를 따라가지 못하겠어.”
“누나는 애초 도 사용하지 않았으면서 뭘 그래?”
“그러는 너도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잖아. 이제는 불도 쓸 수 있고.”
“그래도 나는 얼음을 다룰 수 있는 누나한테 이기지 못할 걸?”
“한 번…, 해볼래?”
“뭐? 여기서? 아니야, 됐어. 그러다 다치면 어떡하려고.”
“하긴….”
클랜원들이 박수를 친다.
두 눈으로 은하의 실력을 확인한 그들이 환호성을 보낸다.
은하는 그들에게 가벼이 인사하며 연화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그때였다.
“어?”
“”””…….””””
사람들의 환호성이 수그러들 즈음.
별안간 수련장에 나타난 플레이어.
변지성.
그는 수련장에 들어서자마자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다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일은 안 하나 보지?”
“”””…….””””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대뜸 짜증을 토하는 변지성.
이내 그는 가장 큰 대련장에 있던 은하와 류연화를 발견했다.
“하….”
그러고는 코웃음을 쳤다.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그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뭐 류연화가 대련이라도 한 수 가르쳐주고 있었나 보지?” “…….”
“그래, 어디 많이 배웠냐?”
“변지성 선배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건지….”
“답답해서 검이나 휘두르려 왔더니 너희가 이렇게 있더라고. 저것들은 무슨 구경이라도 났나….”
변지성이 씨부렁거린다.
은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류연화는 은하의 앞을 막아서서는 변지성을 상대하려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변지성의 시선과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 아카데미의 유망주라며? 류연화는 너랑 친분이 있어서 아마 많이 봐줬을 텐데 실력 확인은 잘 했나 모르겠다.”
“…….”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잘됐네. 안 그래도 몸 좀 푸려고 그랬는데 네가 좀 도와주면 되겠다.” “”””…….””””
“너도 네 실력이 어떠한지 한 번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을 거 아니야. 류연화 얘는 네가 노은아 동생이라 많이 봐줬을 테니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겠지.”
“선배님.”
“류연화 너는 가만히 있고. 어디서 선배가 말하는데 함부로 끼어들려 그래?”
“”””…….””””
“어때? 내가 한 수 좀 가르쳐주마. 아니, 이거 내가 배워야 하는 건가. 제4위계 몬스터를 혼자 쓰러뜨린 게 정말 맞냐는 의혹이 무성한 한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변지성이 폭소한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바로 조금 전,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은하와 류연화의 대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뒤였다.
그리고 은하는─.
“─한 수 가르쳐드릴까요?”
“…뭐? 지금 뭐라고 했냐.”
변지성이 류연화를 대하는 태도에 기분이 상한 은하는.
톡, 까놓고 말했다.
“─마법은 쓰지 않고 검술만으로. 그걸로 되죠?”
“어린 것이 예의도 없게….”
“”””…….””””
이때, 그는 알지 못했다.
결코 노은하에게 예의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예의 없는 어린 것한테 어디 한 번 배워가세요.”
예의는 회귀 전에 밥 말아먹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583(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