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92
여름이 오면, 장마가 온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그날도 이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었다.
“─아이 참…. 옷이 다 젖었잖아. 왜 갑자기 비가 내려서는….”
“아….” “”…….””
세상은 미증유의 재앙을 맞이하며 처참히 멸망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멸망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계속 살아가야 했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사람들은 무너진 세상 위에 다시금 꿋꿋이 살아갈 토대를 세워나갔다.
“”…….””
도시마다 플레이어들이 득세하며 저마다 군주를 자칭하던 시절.
무력이 세상의 주류를 차지하고,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었으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세상을 재건하는데 힘을 썼다.
나 역시 그러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일터로 뛰어가 사람들과 함께 무너진 집을 세우고, 아이를 돌보거나 그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는 했다.
타닥타닥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에 난데없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필이면 그날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나는 가방으로 머리를 보호하면서 집으로 뛰어가야 했다.
하지만 머리 하나를 가려줄 만한 가방으로는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없는 법이었고.
결국 비를 맞고 흠뻑 젖은 나는 눈에 보이는 집의 지붕 밑으로 냉큼 뛰어 들어가야 했다.
“어쩌지…. 집에서 걱정할 텐데….”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나처럼 가방으로 머리를 보호하면서 뛰어오는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타닥타닥
그 사람은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황급히 지붕 밑으로 들어왔고─.
“”─…….””
나와 그이는.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타닥타닥
졸지에 같이 비를 피하게 됐지만.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기만 할 뿐, 서로의 존재를 애써 모른 척했다.
솔직히, 그때 나는 그 사람에 대한 호감보다는 두려움이 일었더랬다.
“그냥 맞고 갈까….”
“…….”
법이 의미를 잃은 세상.
그러한 세상에서 힘이 약한 내가 나보다 큰, 그것도 모르는 남자하고 단 둘이 있다는 것은 공포였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남자를 계속 무시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지려 지붕 끝자락으로 이동했었다.
그러던 중─.
“─어?”
별안간 그이가 뛰쳐나간 것이다.
준비동작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든 남자는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비를 폭삭 맞으며 멀어지는 남자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휴, 다행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다행히 그 사람은 나와 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했던 모양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억 속에서 그이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헉…! 헉…, 아직 계셨네요?”
빗줄기가 지면을 때리고.
저 너머가 물안개라도 낀 것처럼 희뿌얘진 세상을 보고 있던 와중.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그림자는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그이였다.
타닥타닥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우산을 쓴 그이는 지붕 아래로 들어와선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불쑥 말을 건 것이다.
“제가 집이 이 근처라서….”
“…….”
땀인지, 빗물인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그이가 겸연쩍어하며 말했더랬다.
그러고는 쓰고 있던 우산을 불쑥 내 머리 위로 기울여주었다.
당시만 해도 생판 모르는 남이었던 사람이 돌연 우산을 씌워주려 하니 나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얼떨떨해서.
그이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던 가운데.
그이는 횡설수설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전에 보니 비를 맞고 추워서 몸을 덜덜 떨고 계시는 것 같던데, 그러다 감기 걸려요.”
“…….”
추워서 덜덜 떨고 있던 게 아니라 당신 때문에 떨고 있던 건데요.
그 당시, 말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니 이거 쓰세요. 아…! 혹시 제가 불편한 거라면 이대로 우산만 쓰고 가셔도 돼요. 집이 근처니까 저는 뛰어가면 되거든요. 이미 다 젖기도 했고….”
“저….”
“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남자를 상대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고.
그리고 너무 놀랐던 나머지.
결국 다음 말은 감추지 못했었다.
“─절 아세요?”
“…….”
왜 저한테 아는 척하세요?
미안해요, 당신.
그때 이후로 누누이 말했던 거지만 너무 놀랐고, 기뻐서 그런 거예요.
어찌 됐든, 우리는 그 지붕 아래서 첫 만남을 가졌고.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나갔다.
쏴아아아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 좋다.
빗소리에 일상의 소리가 사무치고.
빗줄기가 지붕을 타닥타닥 치면서 숨 가쁘게 살아가던 나날에 한 번씩 쉼표를 찍는 것이 좋다.
그리고 몇 번의 쉼표를 찍으며─.
“─고생 많았어. 아주 예쁜 애야. 꼭 당신을 닮았어.”
“여보…. 저는 그렇게 못 생기지 않았어요.” “저기…, 당신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 이것 봐봐. 당신을 쏙 빼닮았대도?”
“아니에요. 여기가 못 생긴 게 꼭 당신을 닮은 것 같아요.”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비가 오는 날, 딸아이가 태어났다.
딸아이는 우리 부부의 축복이었고.
우리는 이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서 우리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바람은 이루어졌다.
비록 나는 그이를 잃고 말았지만.
다시금 몇 번의 쉼표 끝에.
딸아이는 걱정 따위는 조금도 없는 얼굴을 하고 노 서방을 데려왔다.
“─제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에요, 어머니. 인사해, 당신도.”
“안녕하세요. 저는….”
“그래, 거기서 소개하려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하렴. 그리고 너는 왜 갑자기 어머니라는 하지도 않던 말을 하고 그러니?”
“어머니, 제가 언제….”
“이제 와서 포장하려 해도 늦었다. 입에 붙지도 않은 말은 하지도 말고 얼른 들어와. 손님을 밖에 세워두고 이게 뭐하는 짓이니.”
“피, 엄마도 정말 너무해.”
“그러게 진작 엄마한테 잘하지.”
“예쁘고 착한 딸이 엄마 말을 지금까지 얼마나 잘 들었는데….”
노 서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노 서방에게서 그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세 보일 것 같은 얼굴.
반대로 마음은 무척이나 여리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것 같은 성격.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나 보다고.
나는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노 서방을 소개하는 딸아이를 보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 걱정은 들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부부가 됐다.
그이도 딸아이가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쏴아아아
그 이후로도 계속.
비가 내리는 날에는 생각지 못한 만남이 찾아왔다.
은아가 태어났고.
은하가 태어났다.
은애는 맑은 날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은애는 날 닮아서 그런지 비가 오는 날에 가만히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타닥타닥
그래, 이 소리.
나는, 그이는, 이 소리를 좋아했다.
파랑이를 집으로 데려온 날 역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이것도 무슨 인연인가 싶어 데려온 강아지는 이제는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게 참 다행이다.
탁 타닥 탁 탁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긴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지나왔던 인생을 더듬는다.
유리창에 부딪쳐 방울져 떨어지는 빗줄기와 흐린 하늘을 보면 볼수록 그때 시절이 떠오른다.
타닥타닥
오늘은 어떤 만남이 있을까.
빗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적막 속에서 실로폰을 치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들려오는 소리에 절로 마음이 흐뭇해진다.
나는 계속 비가 오는 하늘을 보며 즐거운 만남을 기다렸다.
역시나, 인연이 찾아왔다.
─쏴아아아
한 번 바람이 거세게 불었을 때.
나는 지붕 아래에 서 있었다.
우산도 없는 채로 지붕 아래에 선 나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림자를 찾을 수 있었다.
“아….”
희뿌예진 세상 저 너머에서.
우산을 쓰고 다가오는 한 남자.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는 지붕 아래로 들어오며 우산을 들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미안해. 너무 오래 기다렸지?”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그이였다.
그이가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오랜만에 그이를 본 나는 놀랐고, 그러다 장난스레 웃고 있는 그이가 너무 괘씸해서 눈에 힘을 주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그래도…, 이번에는 안 젖었잖아. 그렇지?”
“안 젖었으면 다인가….”
“처음 만났을 때에는 추워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잖아. 그때에 비하면 안 젖어서 다행인 거 아니야?”
“그때는 추워서 몸을 떨고 있던 게 아니었거든요?” “어? 정말? 그럼 왜….”
“너무 늦게 왔으니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이가 당황한다.
꼭, 은하가 난감해하는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보니 은하가 지 할아버지를 꼭 닮았구나.
“왜 웃어?” “당신 보니까 손주가 생각나서요.”
“은아? 은하? 은애?”
“맞춰보세요.” “당신,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는 우리 손주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도 못 했는데….”
“그러게 누가 그렇게 먼저 가래요. 절 그리 고생시키고 싶었어요?”
“…정말 면목이 없어. 힘들었지?”
“그럼 앞으로 잘해요.”
“아닌 말씀이겠습니까.”
비가 내린다.
나와 그이는 지붕 아래에서 멍하니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하고 싶은 말은 없어?”
“…괜찮아요.
”
하고 싶은 말.
그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았지만─.
“─이젠 제가 없어도 될 테니까요.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제가 없어도 다들 잘하겠죠.”
“…그래. 당신이 그런다면야.”
미련은 없고.
후회도 없다.
그래도 걱정이야 많이 있었지만.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이의 몸에 몸을 기댔다.
“그럼 이제 가자.”
“네.”
“좀 더 이리로 와. 비 맞겠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지붕 밑으로 나간다.
빗줄기가 우산을 때린다.
나는 그이에게 안겨 비가 내리는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냥…, 걷는 거지. 오래간만에 당신이랑 이렇게 걷고 싶었거든.”
“나쁘지 않네요. 좋아요. 걸어요.”
“그동안 어땠어?”
“당신 없어서 힘들었어요.”
“…….”
“그래도 행복했어요, 정말.”
“…애들은 어때? 잘 지내?”
“할 이야기가 많겠네요. 그때까지 우리 이렇게 계속 걸을까요?”
“그래, 걷자.”
빗소리가 멀어지고.
희뿌예진 세상 너머로.
나는 발을 내딛는다.
☆
비가 내리는 여름방학.
밖으로 나가 놀지 못한 어베니어는 어쩔 수 없이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심심함을 달래야 했다.
“─할머니! 나하고 놀자!”
“얘! 할머니 허락도 받지 않고서 마음대로 들어가면 어떡하니!? 너 엄마한테 혼나볼래!?”
“우리 엄마는 외계인! 살려줘!”
“얘가 진짜….”
제 집에서 노는 것도 질려.
어베니어는 줄리에타의 눈을 피해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그러고 바로 옆에 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고.
하필 그때 줄리에타에게 걸려서는 어베니어는 꽁무니를 빼며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우당탕
맨발로 복도를 질주한 어베니어는 발도 털지 않고 할머니의 집 안으로 뛰쳐들었다.
그 뒤를 줄리에타가 그를 잡으러 쫓아왔다.
“엄마! 나 잡아봐라!”
“쿵쾅쿵쾅 뛰지 말랬지!? 아래에서 또 은애 누나가 올라와서 화낸다?”
“어! 그건 안 되는데…!”
살금살금.
복도를 우당탕 뛰던 어베니어는 곧 발뒤꿈치를 들어 걸었다.
그러고는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나 왔어!”
어베니어는 흔들의자를 흔들었다.
흔들의자에 몸을 기댄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꼭, 빗소리를 음악 삼아 듣는 듯.
“할머니? 자?”
한편 반응이 없자.
어베니어는 할머니의 몸을 흔들며 할머니를 깨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사이─.
“─이 녀석! 10살이나 먹었으면 좀 어른처럼 굴어야 하는 거 아니니? 너 대체 누굴 닮아서 이러는 거야? 아빠는 너처럼 이러지 않은데….”
“내가 누구를 닮긴 누구를 닮았어! 당연히 엄마 닮아서 이러는 거지! 엄마도 맨날 이러면서!”
“이게, 이게…! 죄송해요, 어머님. 불쑥 들어와서 소란을 피워서….” “엄마? 왜 그래?”
“…….”
조용히 다가와 뒤에서 어베니어를 덥석 잡은 줄리에타.
그녀는 이내 할머니를 올려다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품에 안겨서 바동바동하던 어베니어는 그녀가 팔에 힘을 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가 엄청 졸린가봐. 내가 아까부터 흔들어도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아.”
“…많이…, 졸리셔서 그런 거야.”
“그래?”
“응….”
훌쩍 하고.
코를 들이킨 줄리에타는 어떻게든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어베니어를 꽉 끌어안고, 아들의 등에 얼굴을 반쯤 파묻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많이 졸리신 것 같으니 깨우지 말고 이대로 나가자.”
“응.”
잠긴 목소리.
어베니어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이어서 그녀는 조용히 어베니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그녀의 손에 이끌린 어베니어는 곧 복도를 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또 내일 봐요, 라고.
어베니어는 작게 중얼거렸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