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593
회귀 전.
그날은 비가 내렸고.
동시에 고등아카데미 입학시험의 합격 발표가 예정된 날이었다.
…합격했어.
은하는 고등아카데미 입학 합격을 통보받았다.
학교를 마친 그는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다.
조금이나마….
할머니한테 보답할 수 있겠지.
그가 플레이어 아카데미를 지원한 명목상의 이유는 가족들을 살해한 몬스터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자면.
가족을 잃고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늙은 몸으로 홀로 키워준 할머니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그 마음이 컸다.
그동안 할머니한테 걱정만 끼쳤어.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려야지.
그 당시, 은하에게 고등아카데미 입학이란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감정의 문을 닫고 살던 지난날에 대한 청산이었고.
가족들을 대신해 자신을 사랑해준 할머니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계기가 될 터였다.
하지만─.
─쏴아아아
비가 억수로 내렸던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은하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잃고 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네.”
이후로 기억은 희미했더랬다.
장례식장을 찾은 친척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부분 할머니가 은하를 거두면서 거의 인연을 끊고서 살다시피 하던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그때까지 연락을 이어오던 할머니의 지인들도 아주 적었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은하의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도 별로 없는 빈소를 지키던 것뿐이었다.
“…….”
그저, 멍하니.
은하는 할머니의 영정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은하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저 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울지를 않지? 아까 봤어요? 애가 애다운 얼굴은 없고 영혼 없이 무뚝뚝하게 대응하는 거….”
“그나저나 큰일이네. 쟤 보호자도 이제 계시지 않으니, 우리가 쟤를 맡아서 키워야 하는 건가….”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요. 저는 저런 아이를 우리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까.”
“17살이라면 다 컸지. 이제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나이인데 우리가 뭘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그래? ”
“플레이어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며. 그거 참 다행이네. 거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면서. 근데 거기서 생활하려면 돈이 들 텐데…. 재계그룹의 후원은 못 받았다지? ”
“고인께서 돈이 조금 있었잖아요. 쟤 부모 보험금도 남아 있을 테고, 집도 있으니….”
“흠…. 우리가 은하를 맡게 되면 그 돈이 전부 다 우리한테 들어오는 건가?
” “가만 있자…. 은하는 어차피 결국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될 테고, 이제 지가 알아서 다 할 수 있을 테니까 양육비도 그리 많이 들지는….”
“”””…….””””
“거,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여기서 꼭 그런 얘기를 해야겠어요? 사람들 진짜 인정도 없게….”
“인정만으로는 세상을 살 수 없어. 왜 당연한 걸 말하고 그래? 혼자서 고상한 척이나 떨고….”
“그나저나 애가 참 너무 음침하다. 잘 챙겨주고 싶어도 너무 음침해서 챙겨주지를 못하겠어. 소름 돋아.”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던 이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던 소리.
그들은 그가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멍하니 할머니의 영정을 보던 그는 유독 그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도 들렸더랬다.
그래서,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제 내 편은 이 세상에 더는 없는 거구나.
그렇게, 할머니의 타계는 은하에게 크나큰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리고 시간을 되돌아가.
─쏴아아아
할머니의 타계는 이전 삶에서보다 3년이나 늦춰졌다.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가 되며 할머니의 건강에 주의를 기울이던 은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점점 걱정을 떨쳐갔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실 거라고.
언젠가부터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은하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할머니의 타계를 겪어야 했다.
언젠가 돌아가실 건 알았지만…. 그래도 좀 갑작스럽네.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하던 미래가 현실로 찾아오자 은하는 모든 사고가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다만─.
─할머니는 돌아가신 거구나.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은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처음 가족들은 흔들의자에 앉아서 편안히 잠을 자는 것처럼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눈물을 그치고 난 이후에는 할머니를 보고 웃었더랬다.
할머니는 호상이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었고.
할머니는 천수를 모두 누리고 그만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좋게 가셔서 다행이야. 자다가 홀까닥 했으면 호상이지, 뭘.”
“편안하게 가셨다니 다행이에요.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좋은 데로 가셨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말어.”
그래서 빈소를 찾은 사람들은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인지 어머니나 은아가 사람들을 맞이하며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하지만 금세 눈물을 그치고 점잖게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너희 왔구나. 어서와.”
“대장, 정말 괜찮은 거지?” “애들한테는 내가 전화를 돌렸어. 민호랑 은우하고 다른 애들은 내일 오기로 했어.”
“너 괜찮은 거지?”
“나는 괜찮아.”
이전 삶과 비교했을 때.
빈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솔직히 은하는 조문객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러던 중에 친구들이 찾아왔다.
최은혁, 김민지, 진서나.
세 사람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은하에게 모여들었다.
“와줘서 고마워. 안 와도 되는데 이렇게 와줘서….” “무슨 소리야, 대장! 이런 자리니까 우리가 당연히 와야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래, 맞아. 이건 당연히 와야지. 그런 소리하지 마.” “…고마워.”
크게 걱정하는 최은혁.
딱 잘라 말하는 김민지.
조심스레 배려하는 진서나.
은하는 친구들의 걱정을 받고서는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러고는 은하는 시선을 친구들의 어깨 너머로 옮겼다.
“─왔어?” “응. 괜찮아?”
“괜찮아. 와줘서 고마워.”
“정말…, 괜찮은 거지? 잠은 잤어? 너도 몸 챙겨….”
“아직 하루도 안 지났어. 그래도…, 잠은 제때 자기로 할게.”
정하양이 근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가 은하의 손을 꼭 쥐었다.
“어떡해….”
“왜 하양이 네가 울고 그래?”
“하지만….”
“호상이었어. 울 일도 아니야.”
그러더니 울먹거리는 정하양.
은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녀를 부드러이 다독였다.
이내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애써 눈가를 닦았다.
“그건 그렇고 빙구 오빠는?”
“맞아. 파랑이 형은 어디 있어?”
“그 형은 지금 안에 있어. 나보다 그 형을 더 챙겨줘.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더라고.” “…그래, 알았어. 파랑이 오빠한테 얼른 가봐야겠다. 은하 너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너희 들어가면 나도 들어가야지.”
은하의 안내를 받으며.
친구들은 할머니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인도받았다.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과 인사한 친구들은 할머니의 영정을 보고는 찔끔 눈물을 흘렸다.
“─와줘서…, 고마워.”
큰 절을 올린 진파랑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상복이 영 어울리지가 않는 그는 바닥을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친구들이 그에게 뭐라 말을 해도, 진파랑은 되도록 말을 아꼈다.
“너희, 밥 안 먹고 왔지? 파랑이랑 은하랑 같이 밥 먹으러 가. 그리고 와줘서 정말 고마워.”
그 모습이 짠했던 것인지.
은아가 눈가를 훔치며 친구들에게 말을 건넸다.
눈치가 빠른 민지와 서나는 냉큼 진파랑의 팔을 붙잡아 그를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안 먹어도 된다니까….”
“그러지 말고 가자, 오빠. 응?”
“우리만 먹으라고? 원래 이런 건 빙구 오빠가 같이 먹어줘야만 하는 거란 말이야. 얼른 가자!”
“은하야, 너도 가자.”
“그래, 대장!”
친구들은 은하와 진파랑을 억지로 끌고가려고 했다.
결국 친구들을 이기지 못한 그들은 빈소를 나가 밥을 먹어야 했다.
한편, 어베니어는 바닥에 주저앉아 영정사진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엄마.”
“응. 왜 그러니?”
“이제 할머니 못 보는 거지…?”
“…….”
울지는 않았으나.
어베니어는 어베니어 나름대로 조의를 표했다.
☆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밤을 새주겠다면서 한쪽에 자리를 잡은 가운데.
이후로도 다른 친구들이 찾아왔고, 그들 중에는 한서현도 있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와줘서 고마워.”
한서현이 오자마자.
한쪽에서 화투를 치고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지인들이었다.
다시 말해, 시리우스그룹의 사람들.
그들은 한서현에게 예의를 표했고, 그녀는 그들에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은하의 가족들에게 절을 했다.
“사실 언니랑 아버지께서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너무 어수선해질 것 같아서 제가 대표로 왔어요.”
“아니야. 회장님은 일을 하셔야지. 그래, 와줘서 고맙다. 서현아.”
한서현은 가족들과 대화를 나눴고.
어느 정도 대화를 마친 그녀는 곧 은하에게 다가갔다.
“밥은 먹었니?”
“아까 애들이랑 같이 먹었어.”
“애들?” “친구들. 하양이도 같이 있어.” “아, 그렇구나.”
한서현이 나긋한 어조로 물었다.
은하는 어깨를 으쓱였고 턱짓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하양을 비롯해 은하의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너는 저녁 먹었어?” “일이 끝나고 바로 와서….”
“가자. 왔으면 뭐라도 먹어야지.”
은하는 한서현을 데리고 나왔다.
빈자리에 마주보는 상태로 앉자, 직원들이 상을 차려주었다.
이어서 음식에 손을 댄 그녀는─.
“─자.” “…나는 먹었대도?”
“얼굴이 반쪽이 돼 있으면서 잘도 먹었다는 소리를 하는 구나.”
“내가 언제 반쪽이 됐다고….”
“먹어, 많이. 너 먹는 거 좋아하잖니.”
“배부른데….”
“배 안 부른 거 다 알아. 먹어.”
“후….”
한서현의 강압적인 권유.
은하는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사실, 은하는 조금 전에 친구들과 밥을 먹었을 때에도 몇 숟가락도 채 뜨지 않았더랬다.
억지로 먹을 생각도 없었기에.
그냥 술이나 마셨다.
그런데 한서현이 그걸 간파했는지, 은하의 입에다 억지로 음식을 넣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와도 괜찮아? 내일도 일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여름방학 중이었다.
한서현은 한서연의 일을 도우면서 경영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학기를 다닐 때보다 방학 기간에 더 바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은하는 밤이 늦게 찾아와서 시간을 보내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번 주는 쉬기로 했어.” “그래도 돼?”
“소유권이 아버지한테 있는 데다, 경영자가 언니인데 과연 누가 나한테 뭐라 할 수 있겠니? 그냥 내가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지.”
“…….”
“그래서 발인이 끝날 때까지 나도 여기에 있기로 했어.”
“뭐?”
태연하게 말하는 한서현.
은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따져보면 나도 너희 집 사람이야. 무엇보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
부담을 가지지 말라면서.
한서현이 은하에게 말했다.
그녀는 밤을 새는 것을 대비해서 세면도구까지 챙겨왔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벌써부터 시집살이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
“…알았어. 엄마한테 말해놓을게.”
한서현의 태도가 완고했다.
결국 은하는 손을 들었다.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방은 있지?” “여자들끼리 같이 쓰는 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좀 좁을 거야.”
“상관없어. 방 크기가 문제니. 근데 저기 있는 애들도 밤을 새기로 한 거니?” “어, 맞아. 은혁이랑 민지랑 서나는 내일까지 보낸 다음 다른 애들이랑 교대를 한다고 하고, 발인식에 다들 참석하기로 했어. 하양이는 이대로 발인식까지 있겠다고 하고….”
이전 삶에서는 거의 혼자서 빈소를 지켰더랬다.
그런데 이번 삶에서는 빈소를 지킬 사람이 많아 탈이었다.
은하는 친구들이 돌아가며 자신과 밤을 지새워준다는 말에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저 애들하고 인사를 하는 게 낫겠네…. 이런 자리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건 그렇지만….”
“가자. 내가 소개시켜줄게.”
“그래, 가자.”
같이 밤을 지새우는 사이다.
그런데 한서현은 은하와 하양 외에 다른 친구들과 면식이 있지 않았다.
서로 존재를 알고 있기야 했으나, 지금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은하는 한서현을 배려해 그녀를 데리고 친구들에게 향했다.
마침 두 사람에게 시선을 줬었는지 그들이 당황하지 않고 맞아들였다.
“─안녕.”
“언니, 어서와.”
“””…….”””
정하양이 반기는 가운데.
김민지, 진서나, 최은혁.
세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서로 입을 모아─.
“””─안녕하세요….”””
세 사람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
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빗소리에 눈을 떴을 때.
은하는 어떤 피로도 느끼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쏴아아아
새벽을 때리는 소리.
친구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은하는 그들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빈소를 나왔다.
딱히 어디를 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바람을 쐬고 싶었다.
“…날씨가 참 흐리네.”
이내 장례식장 밖으로 나온 은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지붕 아래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일도 비가 오려나….”
그러면 안 되는데.
입 속으로 중얼거린 은하는 여전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생각하는 게, 싫었다.
그런 한편 가슴 한편이 이상하게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3년이나 오래 사셨으면…. 그걸로 된 거지.”
오랜만에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회귀하고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
은아가 싫어해서 피우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올까 싶었다.
…아니야.
그냥 있자.
만사가 귀찮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은하는 계속 계단에 앉아 있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것이나 보기로 했다.
대체 이 비는 언제 그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3일 내내 비만 내렸었지.
그때는 장마도 아니었는데.
문득 과거를 떠올린 은하는 그대로 과거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깊이, 더 깊이.
아래로, 더 아래로.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온갖 감정이 응어리진 심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잊어갔고.
끝내, 마음의 문을 닫으려 했다.
바로 그때─.
“─오빠 여기서 뭐해?”
“아….”
바닥도 알 수 없는 심해로 빠지던 은하를 불쑥 건져 올린 목소리.
은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여동생이 옆에 앉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일어났어? 더 자지.”
“잠이 안 오더라고. 그래서 잠깐 바람 좀 쐬려고 나왔지! 오빠는?”
“…나도 바람 좀 쐬러 나왔어.”
화사한 목소리로 말하는 노은애.
은하는 여동생과 대화를 나누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빗소리 너무 좋다. 그치?”
“…그런가?”
“눈을 감고 한 번 들어봐. 소리가 너무 예뻐.”
아무래도 은애는 자리를 떠나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하는 옆에서 재잘재잘 말을 거는 여동생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타닥타닥
단순한 빗소리였다.
빗방울이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할머니는 비가 올 때면 이렇게 눈을 감고 소리를 듣고는 했었어.” “…….”
“빗소리를 들을 때면 정말 행복한 얼굴을 하시더라. 그래서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어.” “…뭐라고?”
“할머니는 왜 비가 내리는 소리를 좋아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있지─.”
여동생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눈을 뜬 은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은애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서는 그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쉼표를 찍을 수 있어서 좋대. 지나온 인생에 쉼표를 하나 찍고, 옛날 생각에 잠기거나 나 자신에게 휴식하는 시간을 줄 수 있어서.”
“…….”
“사람이란 계속 눈만 뜨고 있으면 언젠가 지쳐 쓰러지고 마는 법이래. 그래서 때로는 두 눈을 감고 쉬면서 숨을 돌릴 틈을 만들어줘야 한대.” “…….”
“그래서 빗소리를 듣는 게 좋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수 있고, 빗소리도 너무 예쁘잖아.”
“…….”
“그러니까 오빠도 좀 쉬어. 어제 밥도 많이 안 먹고, 잠도 잘 자지 않았지?”
“아닌데….”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데, 여동생인 내가 모르겠어? 나한테는 그런 거짓말 안 해도 돼.”
노은애가 손을 뻗는다.
은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뻗어서는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오빠는 너무 열심히 살아. 보면 맨날 눈만 뜨고 있는 것 같아.”
“…….”
“열심히 사는 게 나쁘지 않겠지만 그래도 쉴 때는 쉬어야지. 오빠도 쉼표를 찍어야 해.”
“그런…가…?”
“당연하지! 사람이 어떻게 안 쉬고 숨 가쁘게 살 수 있겠어? 가끔은 잠시 쉬면서 지나온 길도 돌아보고, 앞으로 갈 길도 되짚어보며 충전을 할 줄 알아야지!” “…….”
“자! 다시 눈을 감고 오빠도 이제 빗소리만 듣는 거야. 다른 소리에는 일절 귀 기울이지 않고.”
타닥타닥
비가 내리고.
은하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여동생은 은하의 뒤로 돌아가 그의 목을 확 끌어안아주었다.
은하는 그 상태로 귀를 기울였다.
타닥타닥
쉼표를 찍는다.
지금 이 순간은 빗소리에 주목하며 온갖 잡념을 떨쳐낸다.
적막 속에서 지면을 때리는 소리와 비 특유의 냄새가 그를 보듬는다.
그때, 은애가 귓가에 속삭였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돼.”
“…….”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다른 사람들은 다 울었는데, 오빠는 아직 울지 않았잖아.”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러엄!”
울어도 돼.
그 말을 듣고 은하는 멈칫했다.
그는 지금껏 울려고 하지 않았다.
울면, 나약한 모습을 들킬까봐.
울면, 그대로 무너지고 말까봐.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고.
그러한 삶을 살다 보니 우는 법을 거의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은애는 마치 그의 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
“─슬프면 그냥 울면 되는 거야. 참지 않아도 돼. 사람이 울 수도 있는 거지.”
“……!”
“오빠도 쉼표를 찍자. 참지 말고 울어도 돼. 내가 허락할게!”
이내 뒤에서 은하를 껴안던 은애는 자리를 이동해 그의 앞에 섰다.
아직도 한참이나 작은 여동생에게 안겨 있던 은하는 이제는 그녀에게 안아달라고 손을 뻗었다.
“그동안 계속 참느라 힘들었지?”
여동생이 그를 안아주었다.
여동생에게 안긴 은하는 품속에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울어도 괜찮아. 마침 비도 오잖아. 꼭 오빠를 보고 쉬라고 하는 것처럼.” “응….”
“분명 할머니가 오빠 보고 쉬라고 계속 비를 내리시는 걸 거야!”
“그게 뭐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은하는 키득거렸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안긴 채로.
그는 눈을 감고 비가 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놓았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으며.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헤쳤다.
타닥타닥
비가 내리고.
은애는 은하의 등을 토닥였다.
모든 소리는 빗소리에 사무쳤고.
모든 감정은 빗줄기에 섞여들면서 어딘가로 흘러갔다.
“─괜찮아. 울어도 돼. 내가 오빠가 우는 걸 비밀로 해줄게.”
여동생의 위로를 들으며.
은하는 한참이나 그녀를 껴안았다.
아이가 된 것처럼, 그렇게.
쏴아아아
마치 가슴 속 응어리진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소리.
아, 그렇구나.
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울면 되는 거구나.
이전 삶에서는 감정을 꾹꾹 담아, 그대로 죽을 때까지 살았더랬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
타닥타닥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자신은 이렇게 했어야 했다.
가족들을 잃고 엉엉 울고.
할머니를 잃고 펑펑 울고.
다 울고 나서 새로 살아갈 이유를 찾았어야 했다.
가끔은 쉼표를 찍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되짚어보아야 했다.
무작정 죽을 때까지 혹사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게 아니라.
무엇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할머니에게 감사를 표해야 했다.
그저 멍하니 있을 게 아니라.
쏴아아아
회귀를 하고 19년.
너무 늦게 돌아왔지만.
은하는 뒤늦게 진심을 토했다.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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