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0
“─잡았다.”
남자는 방벽에 갇힌 은아를 끌어올렸다. 손목을 붙잡힌 그녀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어, 어떻게….”
“그거 하나도 뚫지 못해서는 플레이어라고 할 수 없지.”
그녀가 상대하는 건 몬스터가 아니라 플레이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몬스터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마나를 다루는데 익숙한 플레이어에게 교과서적으로 설계된 술식을 파훼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은아! 그대로 가만히 있어!”
“큭…! 이 년이….”
줄리에타가 마탄을 쏘지 않았더라면, 은아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는 탄환이 가한 충격에 방벽채로 옆으로 밀려났다.
바닥에 착지한 은아는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로부터 등을 돌렸다.
뛰었다. 전력을 다해.
“어딜 가려고!”
“은아!?”
“줄리에타 언니! 나는…, 괜찮아!”
겁을 먹기는 했다.
남자에게 잡힌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날, 크라켄의 시선을 뒤집어썼을 때를 떠올리면 남자의 시선을 떨쳐낼 수 있었다.
뒤에서부터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은아는 체내 마나를 발현하며 신체능력을 끌어올렸다.
“…시발.”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혀를 찼다.
그녀가 체내 마나를 아낌없이 방출해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는 사용할 수 있는 마나에 제한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전경이 트인 장소는 불리했다.
은아는 남자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마나로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았다.
그녀가 배운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거나, 막대한 마나를 발현해 위협을 가하는 것뿐이었다.
“어? 도망치는 건 포기했나?”
은아는 줄리에타가 전투를 벌이는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난감 코너에 들어섰다.
장난감 코너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발바닥에 마나를 모아 원숭이처럼 뛰어올라서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던졌다.
“…이 년이.”
방벽을 전개한 남자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떨어지는 물건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성가셨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니 짜증이 날만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진열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가가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진짜!”
남자가 진열대를 발로 찼다.
최상단에 올라갔던 은아가 진열대가 기울어지니 잠시 주춤거렸다.
“에잇!”
조금 전에 남자에게서 방벽이 파훼당하면서 배운 것이 있었다.
방벽은 몸을 지키기 위한 마법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어어어어?”
남자는 방벽을 전개한 채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녀를 보고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남자가 재빨리 방벽에 마나를 불어넣었지만, 그녀가 퍼부은 막대한 마나를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기어오르려고….”
“하나, 둘!”
방벽을 전개한 두 사람의 힘겨루기.
바닥까지 몸이 짓눌린 남자는 조금 전 방벽을 파훼했던 방식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은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한 번 꿰뚫린 방벽이었으니, 두 번 꿰뚫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였다.
판단은 재빨랐다.
남자의 손이 방벽으로 들어오는 순간, 방벽을 해제해버렸다. 오히려 남자의 방벽을 발판삼아서는 발밑에 모아둔 마나를 방출해 그대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줄리에타가 비니를 쓴 남자를 상대하면서 사용한 마법을 따라했다.
“마나 폭탄!”
“…씨, 이게 정…, 큭…!”
술식이 조잡했다.
이미지는 엉성했다. 폭탄이라는 이미지가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조잡하고 엉성한 술식에 마나를 억지로 우겨넣었다.
제대로 형체도 갖추지 못한 마나가 장난감 코너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폭발했다.
“줄리에타 언니!”
폭발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난 은아는 바닥에 떨어진 야구방망이를 주워들고 줄리에타를 구하기 위해 뛰어갔다.
줄리에타는 맨발로 복도를 내달리며 비니를 쓴 남자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은아가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주의력을 흩뜨린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몸을 틀어 마탄을 발사했다.
한 발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 틈에 방벽이 약해진 측면을 노릴 생각이었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 옆으로 이동해서는 몸을 지탱해 한 발.
몸을 굴려 기둥 뒤로 숨은 다음에 다시 한 발.
연달아 날아간 탄환이 남자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자꾸 짜증나게 굴기는….”
남자는 날아드는 마탄을 막아내는데 신경질을 부렸다. 조그마한 탄환이 묵직한 충격을 전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플레이어로서 강하지는 않았지만, 베테랑 플레이어의 공격을 피할 정도로 날렵했다.
마치 고양이를 쫓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그것이 더더욱 남자의 성깔을 돋웠다. 잽만 날리며 도망치는 그녀를 상대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빡치네 진짜. 별 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그녀는 예상보다 끈질겼다. 그리고 겁이 없었다.
남자는 처음 핸드건을 꺼냈을 때만 하더라도 일이 쉽게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핸드건을 겨누더라도 겁을 먹지 않았다.
마치 총을 상대하는데 익숙하기라도 한듯, 총구가 향하는 방향을 예측해 공격을 피하거나, 핸드건의 탄환 수를 세며 탄창을 갈아 넣는 사이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안 좋은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래서는 괜히 시간만 끌 뿐이었다.
이제는 여자아이까지 견제를 가하고 있었다.
남자는 붉은 비니를 푹 눌러쓰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서둘러 백화점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탈출은커녕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플레이어들에게 붙잡히게 생겼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여자들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수단이었다.
현명한 수단이지만.
“너무 아까운데.”
너무 아까웠다.
눈앞에 있는 외국인이나, 끝을 알 수 없는 마나를 품은 아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도망치는 건 하늘에 맡기고…, 전력으로 응해볼까?”
네가 고양이처럼 도망다니면 어쩌려고.
네가 고양이면 나는 표범인데.
그 동안 간만 보며 상대하고 있던 남자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탄환이 떨어진 핸드건을 아래층으로 집어던져서는, 애용하는 칼을 꺼내들었다.
무기는 칼 한 자루면 충분했다.
남자는 전투가 길어질수록 드러나는 그녀의 속살을 바라보며 칼날을 핥았다.
“…은아야, 물러서 있어.”
“하지만 언니….”
“느낌이 좋지 않아. 뒤로 가 있어.”
남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줄리에타는 비니를 쓴 남자가 어디에서 공격해오더라도 피할 수 있도록 발끝을 세우고 허리를 최대한 낮췄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만을 집착한 나머지 발밑에서 전개된 마법을 알아차리는데 늦었다.
“이건 또 예상 못했지?”
발밑에서 일렁거리는 푸른 기운. 넘실거리던 기운이 푸른 뱀의 형태가 되어 다리를 옭아맸다.
줄리에타가 다리를 조이는 뱀을 잡아떼려했지만,
“어디 뗄 수 있으면 떼어보든가.”
남자가 가만둘 리 없었다.
뱀처럼 바닥을 미끄러져 나아간 그가 칼을 겨눴다.
혀를 날름거린 남자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찢었다.
“─줄리에타 언니!”
그녀의 말을 듣고 뒤로 물러나 있던 은아가 소리쳤다.
은아는 남자에게 붙잡힌 줄리에타를 구하기 위해 발을 움직이려 했다.
“아.”
그녀만이 아니었다.
은아는 발밑을 내다보고서야 자신 역시 뱀과 같은 것이 기어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얼른 풀어야 해!
마음과는 달리 다리를 옭아맨 마법이 풀리지 않았다.
파훼할 수 없었다.
마나를 쏟아도,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속박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되는 대로 마나를 퍼부었다.
“허어, 저거 참 대단하네. 체내 마나가 얼마나 하면 무식하게 저럴 수가 있지?”
붉은 비니를 쓴 남자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은아가 아예 바닥을 뜯어낸 것이다.
“그래도 안 되지. 오빠한테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그때 장난감 코너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줄리에타에게 뛰어가려던 그녀를 붙잡았다.
“아….”
“노은아! 도망쳐!”
예상도 하지 못했다.
은아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남자를 올려다보고는 굳어버렸다.
“어,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냐고? 아니면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냐고?”
“아….”
“왜 이래. 오빠야. 오빠 몰라? 설마 내가 겨우 그걸로 당할 거라고 생각했어?”
몸이 굳었다.
남자의 표독한 얼굴을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나. 이거 하나만은 명심해.’
문득 예전에 은하가 얘기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어떤 새…, 남자가 누나한테 해코지를 해온다?’
‘해코지? 그게 뭐야?’
‘그 자…, 나쁜 사람이 누나한테 나쁜 짓을 해온다는 뜻이야.’
‘헤에. 아빠 같은 사람이?’
‘은아야! 왜 거기서 내가 나오는 건데?’
‘…뭐, 아빠 같은 사람이지.’
‘…하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가 시간만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애들이 나만 보면 껌뻑 죽었을 때로 돌아갈 텐데….’
‘아무튼.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돼.’
아버지의 넋두리를 무시한 은하가 그때 뭐라고 말했던가.
‘거시기를 차버려.’
“…응, 맞아.”
은아는 학교에서 장난을 치던 남자아이들이 급소를 맞고 눈물을 흘렸던 일을 떠올렸다.
아버지도, 은하도 별 수 없었다.
남자는 모두 같은 약점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하나, 둘!”
“응? 여기서 또 뭘 하….”
뭐지? 설마…!
남자는 은아가 휘두른 야구방망이가 생각보다 낮은 위치를 향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에~~~잇──!!”
“……………!!”
남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줄리에타 언니!”
은아는 이번에야말로 남자가 가랑이에 두 손을 모으고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제 줄리에타를 구할 일만 남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속박마법에 붙들린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였다.
“깜~짝 놀랐잖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쓰러졌을 남자가 팔을 붙들고 있었다.
☆
여기서 이성을 잃었다가는 모든 것이 끝나리라.
그녀는 남자를 벌레 씹은 얼굴로 바라보며, 떨어진 어깨 끈을 끌어올렸다.
“속옷도 예쁜데?”
남자는 끊어진 원피스를 끌어올리려던 줄리에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 기세로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이거 안 놔?”
줄리에타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미간을 노렸다.
“어허. 어디서.”
그녀의 눈앞으로 칼끝을 들이미는 남자.
그러더니 씩 하고 웃었다.
“어서. 마나 풀어. 얼른.”
남자가 칼을 꼬나 쥐며 건들거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가락 끝에 모아두었던 마나를 풀어야 했다.
“Ti ammazzo.”
죽여버리겠어.
그녀가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아쉽게도 남자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무슨 말일지는 예상이 갔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그런다고 뭘 할 수 있는데.”
남자는 휘파람을 불었다.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었다.
신라클랜에서도 유망주로 손꼽히던 플레이어는 옷을 벗기려하자마자 울며불며 잘못했다고 빌었는데,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뭐, 여기서 따먹을 수는 없지. 돌아가서 기대하라고. 내가 아주 절경이 뭔지 보여줄 테니.”
“Che…, 큭…!”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그녀가 반격을 가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남자는 일단 그녀를 붙잡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여기서 벗어난 뒤에 즐겨도 늦지 않았다.
남자는 복부를 얻어맞고 쓰러진 그녀를 어깨에 짊어졌다.
“돌아가서, 재밌게 놀아볼까?”
“Cazzo!”
그녀가 침을 뱉어도,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그녀를 손에 넣었으니까.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야, 거기도 얼른 끝내.”
“어, 알았어. 잠깐 기다려봐.”
동료 역시 여자아이를 붙잡은 뒤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당할 대로 당한 동료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동료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여자아이가 눈앞에 드리운 칼을 보고는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너, 사람 죽여 본 적 없지?”
저거 또 병 도졌네.
비니를 쓴 남자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동료는 여자아이를 상대로 재미있는 장난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얼른 끝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밖에 없었다.
비니를 쓴 남자는 어깨에 들친 여자의 엉덩이를 더듬으며 남은 시간을 헤아리기로 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