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1
가끔 꿈을 꾸고는 했다.
체내에 쌓인 마나가 전신을 짓누르는 감각이 드는 날이면, 필연적으로 꾸는 꿈이었다.
그것은 눈을 뜨고 일어나도, 기억에 남는 선명한 꿈.
힘을 원하나?
백색의 세계.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무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 세계에서 자신은 혼자였다.
나 혼자, 정말…?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지만, 그 세계에서는 무언가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힘을 원하나?
이처럼.
체내 마나를 방출하지 못하고, 몸에 열이 돌아 침대에 누워 있던 날마다 들려왔던 소리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은 목소리.
그녀는 백색의 세계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귀 기울이지 마.’
어느 날, 은하가 진지한 어조로 꺼냈던 말을 상기해내고는 했다.
은하는 말했었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고.
두 번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할머니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들었던 조언이었다.
‘왜?’
‘위험하니까. 이번에는 무사히 끝났을 수도 있어도, 다음에도 무사히 끝날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귀 기울이지 마.
아무것도 바라지 마.
누나가 바라는 건 내가 이뤄줄 테니까.’
‘그럼 은하 네가 바라는 건?’
‘어?’
그때 은하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은아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다짐했다.
‘그럼 은하 네가 바라는 건 내가 이뤄줄게.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이뤄줘.’
‘…응, 그럴게. 그럼 두 번 다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안 돼? 약속이야.’
‘응, 약속!’
아직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아침의 약속이었다.
☆
“너, 사람 죽여 본 적 없지?”
“…어?”
“몬스터도 죽여본 적 없지?”
남자는 뒤늦게야 자신이 그녀를 플레이어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녀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초등학생에 불과했건만.
아직 몬스터도 죽이지 않았을 그녀가 인간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무의식 어딘가에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브레이크가 걸려 있을 터였다.
그래서 그녀가 눈앞에서 폭탄처럼 터뜨린 마나는 별 다른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만한 마나를 우겨넣었다면 일대를 일소해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도, 빛과 소리만 요란한 폭탄에 지나지 않았다.
급소를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자의 급소를 걷어차는 순간, 무심결에 힘을 가감하고 말았다.
남자는 다리 사이로 불쑥 들어오는 공격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더군다나 중간에 허벅지로 붙잡지 않았던가.
그녀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를 쓰러뜨릴 가능성은 없었다.
가령 이렇게.
“자.”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그녀에게 건넸다.
“…어?”
칼끝이 부러진 칼을 받은 그녀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찔러. 이걸 찌르면 내가 저 언니 풀어줄게.”
자신을 찔러보라는 남자의 유혹.
손 안에 칼이 있다.
남자를 죽일 수 있는 흉기가.
“괜찮아. 오빠가 화 안 낼게. 찔러봐, 어디, 한 번.”
남자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팔을 잡아당겨, 가슴을 찌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기를 콱 찌르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어.
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지?”
시퍼런 칼날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칼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자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무기는 손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터였다.
타파할 수 있겠지만,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성격 한 번 고약하군.”
줄리에타를 어깨에 걸친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하는 짓은 가벼운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찌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설령 찌르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 즉시 마나로 몸을 보호할 것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버리면서까지 저지른 행위가 실패했을 때 울부짖을 그녀를 보고 싶었다.
“적당히 하고 돌아가자.”
목적은 완수했다. 덤으로 여자들까지 손에 넣었다.
1층을 점액질로 뒤덮은 몬스터도 소멸할 조짐이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 것이다.
“아, 그래야지.”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비니를 쓴 남자의 말에 동의했을 때였다.
“─큭!”
은아가 쥐고 있던 칼로 남자의 팔을 찌른 것이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을 당한 바람에 대응이 한 발 늦어지고 말았다.
살갗이 찢어졌다. 새하얀 소매가 빨갛게 물들었다.
“하아…, 하아…!”
생각하지 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자의 팔을 찌르고 도망친 은아는 무언가가 호소하는 소리를 어떻게든 듣지 않으려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년이 오냐오냐 하니까 아주….”
“꺅─!!”
바닥을 부유하며 달리던 은아는 줄리에타에게 닿긴 직전에 엎어지고 말았다.
뒤따라 달려든 남자가 위에서부터 내리눌렀기 때문이다.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가 바닥을 내리찍는 충격보다도,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새까매지는 감각이 더 무서웠다.
그래도…!
아직 할 수 있다.
그녀는 자물쇠가 잠긴 상자를 풀어헤치는 것처럼 마나를 풀어헤쳤다.
“이게…!”
남자가 당황했다. 그녀가 체내 마나에 대한 제어를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통제를 잃고 체외로 발현한 마나는 양날의 칼이었다. 흘러나온 마나는 칼날이 되어, 남자를 강타하는 동시에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으윽, 아파…!”
은아는 무언가가 몸을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참지 못했다.
정신이 번쩍 뜨였지만, 머리가 뜨거웠다. 팔다리를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아직 할 수 있었다.
“애새끼가 아주…! 사람을 고생시키고 있어!”
여기서 그녀가 폭주라도 일으키면 무사하기 힘들었다.
욕지거리를 퍼부은 남자가 휘몰아치는 폭풍을 비집고 들어갔다.
한시라도 그녀를 기절시켜야했다. 그래야 일대를 뒤덮기 시작한 마나가 편산할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힘겹게 중심지로 들어온 남자가 있는 힘껏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꺄악!”
체내 마나를 제어할 수는 없어도, 흘러나오는 양을 늘릴 수는 있었다.
남자의 손이 닿기 직전, 순간적으로 방출량을 늘린 그녀는 줄리에타를 구하기 위해 힘겹게 걸음을 내딛었다.
조금만 더.
할 수 있었다.
“이게 미쳤나!”
남자가 다급한 어조로 손을 휘둘렀다.
일대를 휘감은 마나가 심상치 않았다. 이 이상 폭주했다가는 자신은커녕 일대 전체가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지금 다 죽으려고 작정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녀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부렸다.
“얼른 좀…, 잠이나 자란 말이야!”
조금만 더.
아직 할 수 있다.
조금 더,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 힘을.
줄리에타 언니를 구할 힘을.
힘을…!
힘을 원하는가?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은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했었다.
약속했었다.
두 번 다시는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은하야.
지키고 싶은 게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날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날처럼, 홀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은하라면 어땠을까.
은하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키고 말 것이다.
설령 약속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도, 나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약속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힘이 필요했다.
그녀를 구할 힘이.
상황을 타개할 힘이.
무력감을 떨쳐낼 힘이.
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줄 수 있었다.
그러니 힘을─,
“힘을…, 주─!”
─어?
백색으로 물든 세계가 유리창처럼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파편이 투명하게 녹아들고, 조각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색이 퍼져나갔다.
세계는 다시금 색과 소리를 되찾고─.
“─브루노, 아저씨?”
무너지는 세계 저편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
“─내 아내한테서 손 떼.”
성난 곰이 투기를 발했다.
☆
짙은 마나를 휘감은 거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곁눈질로 상황을 살펴보고는, 마지막으로 붉은 비니를 쓴 남자의 어깨에 업혀 있는 여성을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투기가 폭발했다.
“큭…!”
숨을 쉬기도 괴로울 정도로 짙은 마나였다.
거한이 일대를 투기와 살기, 마나로 메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브루노, 아저씨. 줄리에타 언니가, 언니가….”
“잘했다.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라.”
거한은 바닥에 엎드려있는 은아를 다독였다.
이윽고, 마나폭주를 일으킨 나머지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보아하니 체내 마나를 과도히 사용한 모양인데, 어린 나이에 여기까지 버틴 게 용했다.
거한은 걸치고 있던 재킷으로 그녀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겨우 한 걸음.
그것만으로 일대가 진동한 것만 같았다. 대기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뭐야. 너는 누구야?”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위압감에 짓눌린 채 말을 걸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이 녀석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는 이만한 강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애초 이만한 강자라면 모를 리도 없겠건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거한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망쳐야 해!
조금 전,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는 마나폭주를 저지하려던 나머지 기력을 상당히 소모하고 말았다.
거한을 상대할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거한을 상대할 수 있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고.
남자는 거한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목숨만이라도 구하겠다는 심정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가지.”
“헉…!”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팔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맴돌던 마나가 가시덩굴이 되어 사지를 옭아맨 것이다.
남자는 어떻게든 가시덩굴에서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가시덩굴이 점점 조였다. 게다가 날카로운 가시는 마나를 흡수해서는, 몸집을 부풀리기까지 했다.
“이, 이게, 뭐야…!”
어느새 남자는 가시덩굴에 먹혀,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한은, 아니, 브루노는 덩굴에 파묻힌 남자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사, 살려….”
“문답무용.”
얼굴을 붙잡힌 남자가 처절하게 애걸했지만, 용서하지 않았다.
그가 손아귀에 가벼이 힘을 준 것만으로도, 두개골에 금이 갔다.
“끄, 끄아아아─!!”
자신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소리는 섬뜩한 차원을 넘어 공포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는 점진적으로 파장을 넓히더니,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되었다.
남자가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에는, 형체도 없이 머리가 박살난 뒤였다.
“…미친.”
붉은 비니를 쓴 남자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비니를 쓴 남자는 브루노가 손 안에 남은 파편을 돌멩이를 던지듯 아래층으로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공포가 무엇인지를 직접 눈으로 새겼다.
그는 머리가 박살이 나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시발!”
남자는 어깨로 받치고 있던 줄리에타를 점액질로 뒤덮인 1층 광장으로 집어던졌다.
브루노가 멈칫했다.
남자는 브루노가 망설임도 없이 1층 광장으로 뛰어내리는 행동을 보는 즉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거한은 자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여자들을 구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도망치지 못하고 당했으리라.
붉은 비니를 쓴 남자가 3층으로 내려와, 간신히 긴장을 풀었을 때였다.
“─네 놈이, 감히.”
중저음의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젖혔다.
“헉!”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브루노가 있었다. 한 손으로는 줄리에타를 어깨에 들쳐 메고, 반대쪽 손으로 3층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줄리를 집어던져? 그리고─.”
난간을 붙잡고 있는 팔뚝에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한 손으로 턱걸이를 하는 것처럼 3층으로 올라온 브루노가 비니를 쓴 남자를 노려보았다.
“─줄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눈이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짙은 마나에 감싸인 나머지, 투기로 번뜩이는 눈이 꼭 붉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뭐, 뭐야.
붉은 비니를 쓴 남자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
브루노의 몸이 점점 부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쩍쩍 갈라지고, 틈새 사이로 부풀어 오른 근육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비니를 쓴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죽였던 여자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이 눈앞에 드리우니, 살고 싶다는 본능이 튀어나온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릴 정도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애원할 정도로.
상대는 그야말로 곰이었다.
붉은 비니를 쓴 남자는 흉폭한 몬스터를 마주한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빌었다.
“죽음으로 갚아라.”
브루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전력을 다해 오른팔을 휘둘러, 붉은 비니를 쓴 남자의 오른쪽 뺨을 강타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 용했다.
“……!”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컥 하는 신음을 내기도 전에 왼쪽 뺨이 흔들렸다.
무언가가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부서졌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히 공포였다.
머릿속에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애써 현실을 잊으려 했다. 잊고 싶었다.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고 싶었다.
죽음을 앞둔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는 살려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살려달라는 말도 살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죽고 싶었다.
불과 몇 초도 안 됐을 시간인데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한차례 공격이 끝났을 때에는 머리와 몸의 감각이 따로따로 떨어진 것 같았다.
이상하게 머리에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입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입이 있던 자리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입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이물질이 치아인지 뼛조각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치아가 뼛조각이구나.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남자는 정신줄을 놓았다.
이제는 고통이 현실 같지도 않으니, 온갖 고통이 다른 고통을 억누르고 있으니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몸에서부터 무언가가 감각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 무언가가 몸속에서 터지는 것이, 때때로 시야에 기괴하게 틀어진 신체가 보이는 것이 끔찍했다.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Che il diavolo ti porti.”
지옥으로 떨어져라.
브루노는 형체를 알아볼 여지없이, 그저 숨만 쉬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핏덩이를 들어올렸다.
손에 든 덩어리를 난간 너머로 집어던지는 데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진작 정신줄을 놓은 남자는 마나로 몸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직격하고 말았다.
마치 바닥에 달라붙어 죽은 벌레처럼, 바닥에 눌러 붙어 부들부들 경련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남자들의 결말이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