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24
은하가 결혼하기로 했다.
아들내미에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은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회장님의 딸이랑 약혼을 한 건데, 파혼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게다가 서현이는 한 번 파혼까지 한 몸이니 또 파혼을 하기 꺼려질 테고….”
은하가 서현이와 약혼했을 때부터.
은하가 그 애와 결혼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다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20살에 결혼을 하겠다니…. 가만 있어봐, 내가 몇 살에 결혼했더라? 어쨌든 참 어린 나이에 결혼하네.”
비록 정략결혼이라고 하나.
은하도 썩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으면 어떻게든 결혼을 안 하려 방법을 찾아다녔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은하가 직접 나와 회장님에게 결혼하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리고 하양이한테도 결혼하자는 고백을 했다지.
“얘는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덕분에 아빠는 죽을 노릇이란다.
요새 회장님이 딸을 빼앗겼다면서 애꿎은 나한테 일을 왕창 몰아주고 있는 상황이거든.
이제는 정말 사돈이 될 텐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디 그뿐인가?
기본적인 업무 외에도 은아은하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다가.
또 하양이 아빠랑 이야기를 해서 약혼은 언제 할 거고, 어떻게 할지 의논까지 해야 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나는 하양이 아빠를 만나면 못난 아들을 인정해줘서 고맙다고 굽실거려야 했다.
“그런데다가 은애한테까지 신경을 써줘야 하는 판이지….”
자식들이 왜 이리 고생을 시키는지 모르겠다.
은애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은애가 시리우스그룹과 계약하고 은랑화를 재배하게 된 이후로.
은애는 나이도 어린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다행히 딸아이는 돈에 눈이 멀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빠가 알아서 해줘!’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막둥이는 지 통장에 찍힌 금액이 얼마인지 보지도 않고 냅다 나한테 맡겼더랬다.
그러다 보니 나는 요새 딸내미의 재산까지 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내 눈을 피해서 은애에게 들러붙는 날파리들이었다.
“다행히 요새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영입하는 시기가 되어서 찾아오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지.”
은랑화를 재배하게 되면서.
플레이어들은 은애의 능력을 보고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방연지의 재림.
그들은 전 십이좌의 이름을 꺼내며 은애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 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부디, 딸아이의 가능성을 그놈들이 제시하고 제한하지 않았으면 한다.
제발, 집까지 찾아와서는 은애랑 아내가 겁을 먹는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마 얼마 전에 본보기로 삼아서 몇 사람의 인생을 파탄 내버리니까 잠잠해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지만.
“아예 다 잡아버릴까. 선녀정부도 은하랑 은아에게 호의적인 모양이니 뭔 짓을 저질러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만한 힘도 있고.
명분도 있다.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라고 있는 힘이었다.
그러니─.
“─은애한테 신경 쓸 겨를도 없게 클랜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야겠어.”
방법이라면 많다.
칼춤이라면 많이 쳐봤다.
정신머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클랜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전화가 걸려왔다.
막둥이 은애였다.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하나 싶어 전화를 받았다.
[아빠!]“어, 그래, 은애야. 무슨 일이니?”
전화를 받자마자 스마트폰 너머로 활기찬 소리가 들려왔다.
꼭 기운을 북돋는 듯한 목소리.
절로 기운이 솟아난 나는 은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막둥이 왈─.
[─나 통장 있잖아. 아빠가 전에 엄~청 많이 벌었다고 그랬지?]“어, 그렇지. 왜, 뭐 사고 싶은 거 생겼어? 굳이 네 돈을 쓰지 않아도 아빠 돈으로….”
[그 돈으로 오빠한테 클랜회관을 세워주고 싶어!]“…….”
은애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막둥이의 스케일 하나는 굉장했다.
[오빠가 이번에 클랜을 만든다는데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런데 오빠가 클랜회관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해서 내가 해주려고. 마침 오빠가 내년에 결혼한다니까 내가 선물을 해주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되지?]“그래…. 안 되는 건 아닌데….”
아, 뭐지.
이상하게 오빠랑 여동생의 역할이 바뀐 것 같은 이 기분은.
보통 여동생이 결혼 축하 선물로 오빠한테 건물을 사주고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 큰 혼란이 찾아왔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은하가 좋아하겠네….” [그치이?]
은애야, 내가 은하하면 안 되겠니.
우리 딸, 참 돈 많다.
☆
앞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몬스터들이 서울을 침공하게 되며 강북 일대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그런 땅에다 클랜회관을 짓겠다고? 그러다 건물 짓자마자 바로 무너질 일이라도 있게?
그렇기에 클랜회관을 강북 지역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한편 은하는 거점으로 활동할 지역으로 강북 일대를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몬스터들이 쑥대밭으로 만들고 간 지역은 개척 붐이 이는 것과 함께 편재로 몸살을 앓게 될 테니까.
“클랜회관하고 주요 활동 지역을 따로따로 설정하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뭐가? 안 될 것도 없잖아.”
“안 될 것은 없지. 마나관리기구가 과연 너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니. 그래, 네 말대로 규정에는 문제가 없어.”
그러나 미래를 모르는 클랜원들은 은하의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클랜회관과 활동 지역이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그들도 아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물며 강을 걸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한서현과 클랜원들은 은하에게 재고해보라는 말을 건넸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은하는 밀어붙였다.
“강북에도 하나 만들 거야. 근데 그게 지금이 아닐 뿐인 거지.” “네 돈이 아니라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결국 클랜원들은 마지못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은하는 그들에게 고마워하며, 이튿날 한서현과 클랜회관을 세울 부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음, 서현이 언니가 클랜회관을 사주기로 했다고? 그럼 강북에 지을 클랜회관은 내가 사줄게!]“은애야, 고마운데 마음만….”
[내가 지어줄게! 나 돈 많아!]“…….”
은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은애 왈, 자신이 클랜회관을 하나 세워주겠다고.
은하는 그녀와 전화를 하는 내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전화를 마친 그는 넋이 나간 듯이 한서현을 따라다녔더랬다.
“여동생한테 건물 받으니까 좋니? 오빠가 돼서 잘하는 짓이구나.” “나도 그래서 마음만으로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은애가 계속 자기가 지어주겠다잖아….” “그걸 변명이라고 하니.”
“끙….”
“나중에 은애한테 뭐라도 해주렴. 네 지분이라도 챙겨주든가.” “어…, 그래야겠다. 받기만 해서는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은하는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생각을 정리하고 여동생의 선물을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두 사람은 벽해수의 공방 앞에 도착했다.
“여기야?” “응, 여기야. 마침 시리우스그룹이 아주버니의 공방과 연관된 시설을 만들기로 했었는데 잘됐지. 건물은 얼마 전에 완공됐대.”
정확히 말하면 벽해수의 공방 옆.
은하는 10층 건물을 올려다보며 그저 감탄하기만 했다.
지하까지 합쳐서 15층이라 했나? 클랜회관으로 쓰기에는 건물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은하는 드높이 솟은 건물 밑에서 그자체로 압도되었다.
자신은 3층짜리 건물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었건만.
설마 10층짜리 건물을 얻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과한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완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에 발을 들인 한서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다섯 개의 그룹이 달려드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니?” “레귤러스클랜도 이 정도는….” “네 목표가 고작 레귤러스클랜이면 그 정도에서 만족해야겠지.” “…….”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시야를 윗사람들이 보는 방식으로 바꾸라고 말이야.” “…….”
“한 사람의 권력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내려다보는 눈높이야.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이, 위치 또한 사람을 만드는 법이야. 네가 정말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고자 한다면, 너한테 고개를 숙이게 될 사람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것도 당연하게 여길 수가 있는 위치에 있어야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소한 것 하나가 너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법이거든?”
한서현이 조언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그는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해 의뢰를 접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의뢰인이 신병 보장을 요구하거나, 의뢰인의 신분에 따라 별도로 2층에 접수처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지.”
한서현이 미소를 지었다.
이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는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은 원래 각종 음식점이 들어올 예정이었대.”
“조리시설도 완비돼 있는 것 같고, 3층은 클랜 전용 식당으로 쓰는 게 나을 것 같네.” “내가 루미너스그룹에 연락을 해서 클랜회관 안에 들어올 급식업체를 알선해달라고 할게. 그리고 나중에 클랜원들의 요청을 받아서, 카페나 다른 음식점도 입점하도록 해볼게. 일이 꽤 많아지겠네….” “그러고 보니까 누나 일을 도와줄 사람들도 필요하겠네. 손발이 맞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 알아서 추려서 고용해줘.”
“한 3~4사람 고용하면 될 것 같아. 클랜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다면 1년마다 회관 내 입점한 업체들 중 가장 성적이 낮은 업체를 내보내고, 새로운 업체를 입점시키도록 할게.”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병사의 사기는 그날 먹는 밥에서 나오는 법이야. 그걸 무시하지 마. 그만한 돈도 있으니까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알았어.”
건물 위치가 채광도 좋았다.
두 사람은 3층을 둘러보며 앞으로 어떤 음식점들을 끌어들일지 간략히 이야기했다.
그녀는 은하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치킨업체를 우선적으로 알아보기로 약속했다.
“4층부터 6층은 거주공간으로 쓰면 어떻겠니?” “그럼 비는 방이 많을 텐데….”
“지금이야 많겠지. 하지만 앞으로 클랜원들이 들어오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그러겠네. 그러면 방마다 필요한 가구를 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단 앨리스그룹에 연통을 보내서 침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 “할 일이 많겠네, 힘내.” “그러게. 남편 되는 사람 때문에 고생하고 이게 뭐니.”
4층과 6층의 구조는 똑같았다.
듣자하니 시리우스그룹에서는 본디 오피스텔로 사용할 예정이었다는 모양이다.
이어서 그들은 7층으로 올라갔다.
7층에는 영화를 볼 수 있을 만큼 상영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었다.
“7층은 영화관으로 쓸 예정이었대. 여기서 두 번째로 큰 상영관에서는 클랜원들의 복지 차원에서 영화를 상영해주는 건 어떻겠니?” “가장 큰 상영관은 어디에 쓰고?”
“영상자료가 필요한 회의가 있으면 사용해야지.”
“그럼 다른 방들은 어떻게 할까?”
“문화시설로 바꾸면 좋겠는데….”
“이건 다 같이 고민해봐야겠네.” “그래, 그럼 그러자.”
상영관이 5개나 있었다.
이외에도 공간이 몇 개 있었다.
두 사람은 7층을 어떻게 사용할지 차후에 논의하기로 하고는 8층으로 향했다.
8층에서 인상적인 것은 수영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8층은 레저 스포츠 시설로 사용할 예정이었다고 하나봐.”
“수영장도 크고…. 클랜원들이 꽤 좋아하겠네.”
“여기 어디에 사우나 시설도 있는 모양이야.” “오, 그것도 좋은데?” “이외에는 클랜원들하고 협의해서 어떤 시설을 들여올지 생각해야지. 일단 내가 동해그룹에 연통을 보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들을 만들어달라고 해볼게.”
8층 시설을 둘러보고 난 다음.
두 사람은 9층에 올라갔다.
9층은 텅텅 비어 있었다.
건물 기둥만 보일 뿐이었다.
기둥에 손을 댄 한서현이 말했다.
“9층은…. 내 생각에는 하양이처럼 네비게이터들이랑 텔레파시스트들이 근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떨까. 플레이어 라이브러리에 접속하고, 텔레파시를 보내기 용이한 환경은 높을수록 좋다고 하니까.”
“편재는 아래로 몰리는 법이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도 두 부문이 쓰기에는 공간이 넓은 것 같은데….”
“앞으로 클랜이 맡게 되는 의뢰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자료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는 건 어떠니. 네비게이터들도 옆에 자료실이 있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게 낫겠네.”
한서현의 제안.
은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9층을 재설계하는 것은 정하양과 진서나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10층에 올라 전경을 감상했다.
발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내려다보는 건 좋아. 은하 너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
“하지만 발아래에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하지 마. 저들이 있기에 네가 저들 위에 있다는 걸 명심해. 오만해지려 하지 마.” “…알았어. 명심할게.”
은하의 옆에 선 한서현.
그녀가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조언했다.
은하는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10층은 내 집무실로 쓸 거지?”
“너뿐만 아니라 클랜 운영에 있어 중요시되는 부서는 10층에 배치할 생각이야. 당연히 나도 이 층에서 일할 예정이고.” “그렇게 하자. 그런데 지하는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까? 훈련장은 지하에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하 1층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클랜원들의 활약을 홍보하는 장소로 사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지하 3층이랑 4층은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건 어때?”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고…. 2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 의논해봐야겠다.” “지하 5층은 생각해봤어?”
“앞으로 아주버니가 만들어주는 건 클랜원들의 소유가 아니라 클랜의 소유라고 할 수 있어. 아티펙트나 디바이스 등을 보관할 수 있는 데로 사용하는 건 어떻겠니. 내 생각에는 보물고로 운영하는 게 좋을 듯한데 어떠니?”
“보물고라…. 그거 좋네.”
“이것도 동해그룹에 부탁해야겠네. 시설 자체를 클랜원들의 훈련에도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야 할 테니까. 보물고까지 고려하면 보안도 신경을 써야 할 테고….”
10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은 건물 지하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여기는 네 집무실로 하자. 가장 채광이 좋은 것 같으니까.”
이윽고 그녀가 한 방에 들어가더니 말을 꺼냈다.
은하는 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나쁘지 않았다.
그가 동의했다.
“네 집무실은 어디에 두게?”
“옆에 방이 있으니까 거기에 두면 좋을 것 같아.”
“그러면 모르는 일이 있을 때마다 옆방으로 찾아가면 되겠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응?”
이내 두 사람은 한서현의 집무실로 예정이 될 방에 들어갔다.
은하가 방을 둘러보고 있던 와중, 그녀가 대뜸 그의 집무실과 맞닿은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손등으로 벽을 두드렸다.
“여기에다 비밀 문을 하나 만들어, 복도를 통하지 않고 방에서 방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면 되는 거니까.”
“응?”
은하를 보며 미소를 짓는 한서현.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하는 의문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러자 한서현 왈─.
“─생각해보렴. 만약에 몬스터들이 내 집무실에 들이닥친
다면 곧바로 너한테 도망칠 수가 있는 비상구를 만들어두는 게 낫지 않겠니?” “응?”
코쿤도 있는 마당에.
이 높이에서 몬스터가 나온다고?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네. 동해그룹에게 부탁해서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게끔 문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네.”
“굳이 그럴….” “어쩌면 일이 바쁠 때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할 일도 많아질 테니, 집무실 한쪽에다 침대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지?”
“그래도 되나….” “클랜로드랑 행정관은 그래도 돼.”
은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고.
한서현은 그저 키득거렸다.
☆
주말을 맞아.
은하는 친구들과 간만에 백현율을 만나러갔다.
“현율이 걔, 요새 주구장창 그림만 그리고 있다니까. 잠만 자던 애가 잠도 자지 않고 말이야.”
“아니, 어쩌다가?”
“은하 때문에.”
백현율은 최근 집을 나가지 않고 그림만 그리고 산다고 한다.
연성진이 그들을 안내하며 말했다.
민지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연성진은 주저하지 않고 뒤를 돌아 은하를 가리켰다.
“이번에 은하랑 가 싸운 게 방송을 타고 그랬잖아. 현율이 걔가 그 방송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건지 은하 네 그림만 계속 그리더라고.”
“노은하가 잘못했네.” “은하가 잘못했네.”
“삐삐삐 빠빠빠 뿌뿌뿌!”
연성진의 설명에.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김민지.
그리고 얄미운 진서나 한 마리.
이내 은하는 두 사람에게 동조하는 불닭이의 머리를 가볍게 톡 때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현율이한테 부탁해도 돼? 이런 건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한테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럴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이왕 알고 지내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현율이가 그림은 잘 그리잖아.”
내년부로 서울대학교 수리과학부에 입학하는 게 결정되었다는 연성진.
그가 은하에게 의문을 표했다.
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은하가 백현율을 찾는 것은 클랜을 상징하는 문장을 만들어달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백현율의 실력은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은하는 그를 찾은 것이다.
“현율아! 죽었냐, 살았냐? 들리면 대답 좀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은하와 친구들은 백현율의 화실에 도착했다.
화실은 백현율의 집 마당에 있는 컨테이너였다.
이내 연성진이 문을 벌컥 열고.
그가 불도 켜지 않은 화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
화실은 엉망이었다.
바닥에 아무짝에나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종이를 밟지 않으려고 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머지않아 그들은 천이 씌워진 이젤 앞에 드러누워 있는 백현율을 찾을 수 있었다.
“얘 또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네? 야, 그만 일어나!”
“나 잘래….”
“은하 왔어, 임마. 일어나.” “은하?”
“그래, 은하 왔다.” “오랜만이야.”
연성진이 백현율의 어깨를 잡고는 이리저리 흔들었다.
불쾌한 듯 눈을 뜬 백현율은 이내 은하라는 말을 듣고 표정을 바꿨다.
백현율의 시선이 은하에게 향했다.
“…싸운 거 봤어. 멋지더라.”
“그래? 네가 칭찬해주니 기분….”
“악마와 악마의 대결. 꼭 괴수들이 누가 더 힘이 세나 대결하는 듯한 그림이었어.” “이게….”
여전히 몽롱한 어조로.
백현율이 은하에게 말했다.
이윽고 그가 캔버스에 씌워진 천을 걷어냈다.
“은하 너 줄게.”
“”””우와….””””
“…….”
은하와 강현철이 격돌하는 그림.
불꽃의 망토를 두른 은하의 눈은 보는 사람들을 빨아들이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클랜회관 지하 1층에 걸면 딱이겠는걸? 우리 클랜로드는 바로 한테 이긴 사람이라 홍보를 하는 거지.”
그림 앞에 가까이 다가간 친구들.
김민지가 괜찮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나가 귀를 쫑긋하며 동의했다.
“하지 마. 사람 껄그럽게….”
“왜? 이게 어디가 어때서? 하양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현율아. 똑같은 걸로 하나 더 그려줄 수 없을까?”
“귀찮아….”
반면 은하는 격렬히 반대했고.
서나는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정하양은 눈이 하트가 되어 백현율을 보챘다.
“그림 얘기는 나중에 하자. 현율아, 네가 클랜 문장으로 사용할 그림을 그려줄 수 있을까?”
“클랜 문장?”
“얘는 아마 너희가 클랜을 만들었다는 것도 모를걸? 말해줘야 알아.”
이러다 잡담이 길어지겠다.
은하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가 최근에 클랜을 만들었으며, 현율에게 클랜 문장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한순간 눈을 반짝인 현율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판도라의 상자를 끌어안은 여자를 그려달라….”
이젤에 캔버스를 고정하는 백현율.
자리에 앉은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생각을 마쳤는지 빠르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건 어때?” “”””…….””””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현율의 손놀림은 빨랐다.
그렇다고 해도 대충 그린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은하와 친구들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좋아, 괜찮아. 마음에 들어.”
옆으로 누운 채.
황금색 상자를 소중하다는 것처럼 꽉 끌어안고 있는 여성.
검은 실루엣의 여성의 머리카락은 양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꼭, 하백련을 떠올리게 했다.
그림을 본 은하는 뭔가에 홀린 듯 백현율의 그림을 칭찬했다.
“─이걸로 하자.”
그리하여.
판도라클랜의 문장이 만들어졌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