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5
12월 28일. 선력 3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돌아보면, 매우 다사다난한 해였다. 끊이지 않는 사건으로 한가로운 삶을 조금도 누리지 못했다.
부디 내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이쯤 되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하는 드높은 빌딩에 걸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빌었다. 세상이 한 번 멸망한 마당이니,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빌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거기서 뭐해?”
은아가 물었다. 그녀는 호텔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가 궁금한 눈치였다.
“미안, 누나. 잠깐 뭐 좀 빌려고.”
“아직 빌면 안 돼. 소원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빌어야지!”
은아가 두 손을 머리 위로 활짝 펼쳤다. 어깨가 파인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입고 있던 나머지 겨드랑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누나….”
“아, 미안.”
은아는 다시금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캐주얼한 옷을 입고 다니던 그녀는 조신하게 행동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근데 안 추워?”
“차 타고 왔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파티회장은 호텔 안이잖아?”
“하긴….”
은하가 손을 내밀자, 은아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키가 작은 그를 상대로 팔을 바짝 끌어안았다.
“은하야, 은아야~! 김치~!”
앞서 걸어 나가던 아버지는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두 사람을 촬영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레드카펫을 밟는 두 아이가 사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 여기 아빠회사 사람들이 있는데?”
은하가 체통을 지키라는 식으로 넌지시 말했어도.
“왜, 뭐, 왜.”
아버지는 귓전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위협했다.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는 허겁지겁 사라지기 바빴다.
우리 아버지가 시리우스 디바이스의 전략기획경영부서 부장이라니. 이 회사, 정말 괜찮은 걸까.
은하는 시리우스 디바이스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디바이스 사업은 갤럭시 디바이스와 견주어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더해져도 미래가 바뀌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가급적 회사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기를 바랐다.
“어서 오십시오, 노 부장님. 일행은 자녀분 2명입니까?”
“아직 부장은 아닌데 말이야.”
“내년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부장님이지요. 이 기회에 아부나 떨어 보렵니다.”
“하하, 말은 고마워. 오늘은 나하고 아들, 딸 뿐이야.”
시리우스 그룹은 매년, 계열사들의 단합과 한 해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연말파티를 기획했다.
파티회장은 새벽그룹이 운영하는 새벽호텔 명동지점. 대연회장 앞에서는 아버지를 아는 직원이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되시기를.”
초대장을 확인한 직원은 아이들에게도 고개를 숙인 뒤, 연회장 문을 열어주었다.
“와~!”
연회장으로 발을 들인 은아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드넓은 공간. 슈트를 입은 남성과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즐거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새하얀 식탁보로 덮인 테이블마다 평소에는 보지 못한 음식이 즐비해 있었다.
“엄마랑 은애가 오지 않아서 아쉽다.”
종종걸음으로 테이블을 둘러본 은아가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리던 포니테일을 축 늘어뜨렸다.
어머니는 은애를 돌보느라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년 그랬듯이 홀로 파티에 참석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부장으로 진급하는 자리이니 아이들만이라도 데려가라며 권했던 것이다.
“우리가 엄마랑 은애만큼 많이 먹으면 되지.”
은하도 어머니와 은애가 오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은아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가까이에 있던 음식을 몇 점 가지고 왔다.
“우와, 맛있다! 은하야, 너도 먹어봐!”
은아의 얼굴이 금세 돌아왔다.
은하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연회장에 나오는 음식이 처음이었을지 몰라도, 그는 회귀 전에 몇 번이나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은하는 은아가 포크로 찍어준 음식을 우물거렸다. 시리우스 그룹에서 주관한 파티인 만큼 음식의 질이 굉장히 높았다.
어라? 이렇게 맛있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다. 시종일관 벌레 씹은 얼굴로 파티를 보내거나, 연회장을 지켜야 했던 경우도 있었으니 파티 음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말 안 먹을 거야? 이거 맛있다니까.’
‘유정 언니, 이것도 맛있어요!’
‘어? 이건 처음 먹어보는 초콜릿인데? 어느 파티쉐가 만든 거지?’
‘우와, 언니는 어느 파티쉐가 만들었는지도 알아요?’
‘당연하지. 내가 이래 보여도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는 얼마나 잘 살았는데. 뭐, 지금도 잘 살기는 하지만….’
‘우와~ 언니, 언니. 다음에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꼭이요!’
유정과 백련이 음식을 권하던 때도 있었다.
그때 그는 두 사람이 파티 음식을 즐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맛있네.”
“그치?”
그는 이 즐거움을 이제야 이해했다는 사실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일찍 이해했더라면, 두 사람을 더 살갑게 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배터지게 먹자.”
“…응, 누나.”
은아는 파티에 오기 전에 구두가 불편하다고 했으면서도, 이제는 접시를 들고 연회장 구석구석을 뛰어다녔다.
시리우스 그룹의 연말파티는 격식을 요구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은하는 은아가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녀도 크게 주의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도 그녀를 따라 접시를 들고 음식을 수북이 쌓는 중이었다.
“얘들아. 아빠는 회사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올게. 회장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다녀오세요.”
조금 전부터 아버지는 음식에 손을 대지도 못했다. 부장 승진을 축하한다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응?”
“누나, 입가에 소스 묻었어.”
“헤헤. 닦아줘, 닦아줘.”
어차피 은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멀어지는 아버지를 보낸 그는 은아의 입가에 묻은 파스타 소스를 닦아주었다.
그나 그녀나 첫 번째 접시를 비우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른 음식을 먹기 위하여 새로운 접시를 들려 했다.
“은하야?”
“서영 누나?”
신서영. 늘 어깨에 걸치고 다니던 가죽재킷이 아닌,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가 여기는 왜…?”
“시리우스 그룹의 후원을 받는 클랜이 창해클랜이니까.”
“그럼 경비로 온 거예요?
”
“나는 서브 클랜으로서 참석한 거야.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은 저기.”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뒤쪽을 가리켰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본 그는 사람들 사이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을 발견했다. 시리우스의 후원을 받는 클랜원들이 파티에 참석하는 한편, 경호를 동시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성준은 보이지 않네.
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창해클랜의 로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회주의자인 그가 격이 낮은 파티라지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 드물었다.
“그 사람은 요새 바쁘거든.”
신서영이 은하의 행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순간 씁쓸한 얼굴을 지은 그녀가 푸념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나저나 은하 네가 여기에는 웬일이야?”
“아버지가 시리우스 디바이스 사람이잖아요.”
“아, 그랬지. 아버지랑 같이 온 거구나. 그러면 이쪽이 네….”
신서영은 은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하와는 얼굴도 분위기도 전혀 닮지 않은 소녀.
하지만 그녀는 이전에 그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그의 누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의 체내 마나는 얼마나 하는지.
체내 마나가 유전적인 요소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이 차지하는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은하가 또래 아이 중에서 상당한 축에 속한다면 그의 누나는 얼마나 하는지 궁금했다.
얘 좀 봐라?
신서영은 가볍게 체내 마나를 살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나의 기류를 파악한 은아가 재빨리 술식을 전개한 것이다. 새벽백화점 테러 이후, 은하로부터 은신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미숙하게나마 자신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거론되는 캐스터.
어딜!
은아가 전개한 술식을 풀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아아…!”
은아는 겹겹이 전개한 술식이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자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술식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술식을 풀어헤치기까지.
그리고 신서영은.
“너, 플레이어 해보지 않을래?”
이전에 만났던 하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나. 연회장에 모인 플레이어들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마나량이었다.
신서영은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끝을 모를 정도로 방대한 마나를 품은 아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마나를 다루는 기술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장래가 기대되는 소녀.
그리고 신서영, 그녀는 바닥을 모르는 마나를 지닌 소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언니가 가르쳐줄게. 언니가 너 로 삼고 싶은데.”
“서영 누나!?”
은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녀가 은아를 만나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스승을 자처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은하 역시 은아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체내 마나가 적은 그로서는 은아에게 가르칠 마법도 더 이상 없었다.
은아가 결정만 내린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할래요! 플레이어가 되고 싶어요!”
즉석에서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전부터 이들을 주목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들으려 하지 않는가.
사전에 신서영이 도청방지 결계를 펼치지 않았더라면 연회장은 발칵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러네. 은아라고 했지? 우리 다음에 이야기하자. 내가 나중에 너희 집으로 전화할게.”
신서영도 기묘한 시선으로 은아를 주시하는 플레이어들을 알아차렸다. 결계를 해제한 그녀는 친한 아이들을 만난 것처럼 인사를 주고받고는 헤어졌다.
“누나….”
“와, 저기에도 뭔가 잔뜩 있어!”
“에휴, 일부러 피한 거네. 이건.”
은하가 낮은 어조로 부를 때에는 동생에게 혼날 때였다. 은아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다른 테이블로 뛰어갔다.
그러다 그녀가 눈독을 들인 음식은 초코퐁듀였다. 그녀는 콸콸 흘러내리는 분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먹고는 싶은데 먹는 방법을 몰라 아쉬운 듯이 바라보았다.
“누나. 이걸 이렇게 하는 거야.”
은하는 꼬치에 꽂은 과일과 마시멜로를 분수 속으로 집어넣었다. 분수에서 모습을 드러낸 꼬치는 초콜릿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나도, 나도 해볼래!”
눈을 반짝인 그녀가 새로운 꼬치를 만들었다. 온갖 과일 사이에 마시멜로를 꽂아서는 포니테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얼마나 먹으려는 거야.
“으~ 아까워.”
초콜릿이 뚝뚝 떨어지는 꼬치.
그녀는 그것조차 아까운지 식탁보 위로 떨어진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핥는 그녀였다.
어지간히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접시로 꼬치를 받친 채로 초콜릿으로 뒤범벅된 마시멜로를 입에 넣었다.
“와~”
아, 감동했네.
은하는 입가에 초콜릿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꼬치를 무는 그녀를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우리 엄마가 파티에서는 점잖게 행동하라던데.”
“파티 음식을 먹으면 안 된댔어.”
“그러다 어른들한테 혼날지도 몰라.”
두 사람이 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연회장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이들은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두 사람이 걱정되는지 말을 걸어왔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