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53
어쩌다 보니 시져 호퍼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은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대장두터비를 상대할 생각이었는데 사람이 없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러게 미친 오징어는 이 시국에 강원도로 파견을 나가서는….
강현철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은하는 이 자리에 없는 강현철의 이름을 씹어댔다.
여하튼 이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군단장은 삼각지 대장두터비였다.
“제4위계라고는 하지만 군단장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지. 모라율…, 아니, 판도라클랜 정하양 서브로드. 그래, 강북 남부방면 보고는 자네한테서 받는 게 좋을 것 같군.”
턱을 쓰다듬는 백서진.
그에게 이름이 불린 정하양은 곧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현재 뜻하지 않게 항체를 채취해, 대장두터비의 독에 대항할 수 있는 치료마법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일정에 문제가 없다면, 저녁쯤에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고요.”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군. 그래서 남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는데? 자네 의견에 따르지.”
“”””……!!””””
신뢰감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클랜로드들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정하양도 순간 멈칫했다.
그녀도 설마 백서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부는 우리에게 맡기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기는 하네.
괜찮아 라고 말하듯.
은하가 책상 밑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꼭 잡은 그녀는 그제야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군단장들은 저희 판도라클랜에서 토벌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젯밤에 뜻하지 않게 기습을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승기는 확실하게 저희한테 있었으니까요.”
“무모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군. 그 말은 군단장을 쓰러뜨리기 위해 다른 클랜에서 인원 차출을 필요치 않다는 건가? 잘 생각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백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드러이 타이르는 듯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판도라클랜의 말을 따르려 했건만, 믿음직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양은─.
“─네, 군단장들을 쓰러뜨리는데 지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장두터비 두 마리는 저희 쪽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걸세.”
“책임, 질 수 있습니다.”
“흠….”
“다만─.”
책임을 질 수 있다.
어쩌면 건방질 수도 있는 발언.
자신 있게 말한 정하양은 말꼬리를 길게 늘렸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움직여서는, 팔목에 붕대를 감은 황산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군단장은 쓰러뜨릴 수 있지만, 남부를 방어하는데 병력이 부족할지 모르겠네요.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KK 클랜로드께 요청합니다.”
“…무슨 요청입니까.” “마포구에서 인원을 차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칠대호도 둘 이상 차출해주실 수 있을까요?”
KK 클랜로드 황산군.
그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황산군이 입을 열었다.
“둘은 너무 많군요. 저희도 현재 인원이 부족한 상황이니, 한 명을 차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둘이 아니라 한 명을 주겠다.
황산군이 단칼에 거절했다.
정하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 백서진이 끼어들었다.
“─셋.”
“네? 장관대리님, 그게 무슨….”
“”””…….””””
“둘이 아니라 셋을 보내면 남부는 훌륭히 방어할 수 있는 거겠지?”
“…네. 그렇게 해보이겠습니다.” “장관대리님…!”
“그래, 황산군. 자네가 나한테 어디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 …없습니다. 장관대리님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대뜸 목소리를 높인 황산군.
백서진이 비릿한 웃음을 보였고.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실적이 없던 황산군은 쭈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지.”
☆
회의가 끝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일어났다.
예경, 시져 호퍼를 상대하기로 한 사람들은 저녁때까지 집합장소에 모이기로 했다.
일단 나도 이태원으로 돌아가서, 챙길 것들은 챙겨야 하니까.
부랴부랴 온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장비가 빈약했다.
어제 전투를 치르느라 홀스터에는 포션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은하는 정하양과 이태원에 돌아가 부족한 장비를 채우기로 했다.
“누구 데려갈 사람은 없어?”
“각 클랜에서 차출한 플레이어들로 파티를 만들게 될 거라 데려갈 사람은 딱히 없을 것 같은데….”
정하양이 짐을 챙겨주었다.
은하는 다시금 포션을 확인하고는 현재 이태원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클랜원들을 살폈다.
그러다 분홍 머리를 발견했다.
“텔레파시스트 하나로 충분할 것 같은데? 너희랑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은 데려가야지.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겠어.” “그럼 파랑 오빠를 보낼까?”
“너희는 대장두터비를 상대할 텐데 유능한 인재를 데려갈 수는 없지. 쟤, 지금 애들이랑 땅따먹기나 하는 아리엘이나 데려갈게. 쟤로 충분해.”
은하는 아리엘을 지목했다.
정하양은 은하가 걱정이 되었는지 한사코 전투가 가능한 진파랑을 데려가는 것은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만 놀고 나랑 일하러 가자.”
“앗! 노은하!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가 지금 한가하게 놀고 있는 걸로 보이는 거야!?”
“한가하게 놀고 있구만, 뭘.”
은하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리엘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아이들과 놀고 있던 아리엘의 머리에 턱 손을 얹었다.
아리엘이 발버둥을 치든 말든.
은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서는 때마침 종로구로 보급을 갈 거라는 보급물자 트럭에 올라탔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마나관리기구에 일하러.” “쳇, 나는 소풍 가는 줄 알았는데.” “이 시국에 무슨 소풍이야.”
보급물자 트럭은 한 번에 종로구로 가는 게 아니었다.
중구 여러 지점을 거쳐 최종적으로 종로구로 가는 것이었다.
─여기도 보급을 해주네?
그러다 보니 은하는 아리엘과 함께 보급물자를 트럭에서 내리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게 트럭은 보급지 중 하나인 중구 명동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마나교가 있는 곳이었다.
☆
사람들이 마나교에 몸을 의탁했다.
몬스터들이 침공해왔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신을 의지하려 몰려든 것이다.
그들 중에는 부상자들도 많았다.
“오, 리야야. 아무래도 네가 나가 사람들을 보살펴야겠다. 듣자하니 여기로 오는 도중에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당한 이들이 많다는 구나.” “네, 제가 가볼게요. 교주님께서는 다치지 않은 분들을 맡아주세요.”
이리야는 바삐 움직였다.
교주와 부교주가 나서서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애를 쓰는 사이.
그녀는 비상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사람들을 치료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오늘 아침에도 3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왔다니….
몬스터들이 강북을 침공하고부터 이 지경이 되고 있었다.
이리야는 홀로 사람들을 치료하며 진땀을 빼야 했다.
마나교에는 치료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그녀는 치유마법이 그리 필요치 않고, 약을 바르는 것으로 치유가 가능한 사람들은 마나교의 신도들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런데 부상자들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못 믿겠습니다! 성녀님께서 고쳐주세요!”
“이런 상황에서 상처에 병균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더 심해질 거예요! 성녀님께서 치유마법으로 바로 낫게 해주세요!”
“저 사람보다 제가 먼저 왔는데, 저는 왜 성녀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받아야 하는 거죠?”
“…….”
성격 좋은 부상자들도 있었지만, 성격 나쁜 부상자들도 있었다.
그때 이리야는 마나신에게 어째서 그들을 이기적으로 만든 것이냐고 묻고 싶었더랬다.
여하튼 그녀는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며 일을 해야 했다.
지난 밤, 호퍼 계열의 몬스터들이 중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고.
신도들과 마나교에 몸을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느라고 먹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때─.
“─보급물자다! 트럭이 오고 있어!”
“뭐!? 어디, 어디!?”
저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한창 사람들을 치료하던 이리야는 물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다.
물자는 다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열중하며.
이리야는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듣자하니 재계그룹들이 강남에서 동작대교를 통해 물자를 지원했다는 듯했다.
재계그룹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그녀도 그들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안 그래도 붕대랑 약도 부족했는데 의료약품들도 지원받을 수 있다면 좋겠네.
이리야는 안심했다.
그러는 사이 트럭이 성당 앞에서 보급물자를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때쯤 비상진료소에 있던 이들도 보급물자를 지원받기 위해서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휴….”
그녀는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마나도 너무 많이 소모했다.
그녀는 치료를 중단하고는 잠시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리야 너는 조금만 쉬고 있거라. 이 사람들은 내가 돌볼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부교주님.”
“네 몫의 물자는 따로 빼놓았으니, 이따 교주님께 받아가렴. 어제처럼 또 다른 사람들한테 주느라고 정작 네가 먹을 게 없어지게 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부교주가 그녀를 찾아왔다.
이리야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에게 부드러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부교주님. 저는 바람을 좀 쐬고 오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부교주에게 허락을 받고.
이리야는 후원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나섰다가는 사람들에게 붙잡힐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물자를 받으러 간 사이, 상대적으로 한산한 후원을 거닐며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아, 시원해. 살 것 같아.”
바람이 불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이리야는 모자를 벗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바람을 맞고는 금세 증발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내내 모자를 쓰고 있었던 그녀는 그렇게 해방감을 느꼈다.
배고프다.
내가 언제 밥을 먹었더라?
그때 배가 꼬르륵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점심은 먹지도 못했다.
치료마법을 펼치며 간간이 물이나 마신 것이 전부였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트럭이 가고 나면 사람들을 다시 치료하게 될 테니…. 먹을 수 있는 때는 지금밖에 없겠네.”
이리야는 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그녀는 교주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배정받은 물자를 받아가기로 했다.
달달한 게 당겼다.
보급물자 중에 초콜릿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희망하며 돌아가려는데─.
“─여기는 사람이 적네.”
“오, 그러게! 저기 벤치도 있다!”
“……!”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리야는 황급히 모자를 썼다.
그러고는 태연히 그들을 지나쳐서 교주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
명동대성당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은하는 먹을 것을 달라며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와…, 여기는 사람이 많네?”
“몬스터들이 강북에 들이닥쳤으니 다들 냅다 놀라서 여기로 도망쳐온 거지. 우리는 바람이나 쐬고 있자.”
“좋아! 좋아!”
은하는 마나교 사람들하고 가급적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리엘을 데리고서는 사람이 많이 있지 않은 곳을 찾아 나섰다.
“초코파이 먹을래, 몽쉘 먹을래?”
“몽쉘.”
아리엘이 과자상자를 품에 껴안고 따라나섰다.
트럭을 타고 오면서 벌써 몇 개나 과자를 까먹은 그녀는 아직도 배가 부르지 않은
듯했다.
그녀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더니 포장지를 하나 까서는 은하에게도 건넸다.
뒤로 오니까 한산하네.
여기서 시간이나 때워야겠다.
명동 대성당 뒤편.
사람들이 물자를 배급받으러 가서 뒤편은 한산했다.
은하는 가까이에 앉은 의자를 찾아 털썩 앉았다.
“앙. 음, 맛있어!”
“너 배 안 불러?”
“내 위장은 무한대거든!?”
아리엘도 과자를 입에 우물거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과자를 까먹으며 시간이나 보내려고 했다.
그러던 그때─.
“─당신은….”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리야.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기하게도 그녀도 미간을 찌푸려 은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보급물자 배달하러.”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탐탁지 않은 어조로 물었고, 은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내 그녀의 얼굴이 풀어졌다.
또 다시 그가 신에 대한 모독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 듯했다.
“그럼 편히 쉬다 가세요. 전 이만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는 하나 이리야는 은하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금세 몸을 돌려서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와! 언니 눈 진짜 예쁘다!”
“네?”
은하에게 과자박스를 넘기고 벌떡 의자에서 뛰어내린 아리엘.
아리엘이 그녀에게 총총 뛰어가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뭔가요?” “아니, 눈이 예뻐서요!”
아리엘의 거리감 없는 반응.
이리야가 초면부터 바짝 다가오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리엘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음…. 뭔가 이상하네? 아, 언니 모자가 삐뚤어진 것 같아요. 제가 다시 씌워줄게요!”
“네?”
아리엘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아리엘이 까치발을 들어서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어?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와…. 모자를 벗은 쪽이 훨씬 더 예쁜데요? 너무 예뻐요!”
불쑥 그녀의 모자를 벗긴 아리엘.
그녀가 설마 모자를 벗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이리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야, 너 뭐하는 짓이야?”
“아, 죄송해요! 갑자기 모자를…, 응? 어라?”
이리야의 갑작스런 비명에.
아리엘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그녀에게 사과하려 했다.
은하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녀를 꾸짖으려 다가갔다.
그런데─.
“─언니도 아인이었어요?”
“아인 아니거든요!”
모자 속에 감춰져 있던 이리야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고.
별안간 그녀의 귀가 길고 뾰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황급히 두 귀를 감췄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은하는 할 말을 잃었다.
“…아인이었어?”
“아인 아니라니까요! 태어났을 때 마나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됐을 뿐이거든요!?”
“귀 귀엽다! 만져 봐도 돼요? 대신 제 귀도 만지게 해줄게요!”
“그런 건 필요 없거든요!?”
이리야가 평소의 이미지답지 않게 크게 소리쳤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