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721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주지….”
이유정으로부터 멀어지자.
정하양이 은하의 손을 잡고 가며 서운한 듯이 말했다.
그녀가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니. 말이나 해줬으면 우리가 적절히 상황을 조절했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니.”
그러자 한서현도 말을 보탰다.
다만 어조는 그를 탓하는 게 아닌 서운해하는 정하양을 다독이는 것에 가까웠다.
“미안해. 사실 줄지 말지 여기에 올 때까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래, 어쩔 수 없지.”
“아니야, 괜찮아. 친구 사이이니까 선물을 줄 수도 있는 거지. 난 이제 괜찮아.”
은하는 뒤늦게 사과했다.
두 사람에게 배려가 부족했던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이에 한서현은 시원하게 넘어갔고, 정하양은 애써 쓴웃음을 지으면서 넘어가주었다.
“은하야, 나는 앨리스그룹 애들을 만나러 가볼게.”
“같이 안 가도 돼?”
“음…, 애들이랑 만나서 놀 거야. 조금 혼자 있고 싶기도 하고….”
“알았어. 이따 봐.”
이내 정하양이 손을 놓았다.
은하는 앨리스그룹의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떠나는 정하양을 가만히 배웅했다.
그때, 한서현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은하 너.” “왜?”
“할 거면 확실히 하렴. 어쭙잖게 이도 저도 아니게 하지 말고.” “…….”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지 말고 똑바로 정하라고. 그러니까 유치하게 구는 것 아니니. 또 네가 망설이고 있으니까 나까지 어떤 스탠스를 취하면 좋은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고.”
감정과 이성.
한서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따끔하게 이르기만 했다.
은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휴….”
그리고 은하의 감정을 보았는지.
한서현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그녀도 정하양이 그랬듯 그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하양이 기분이 상해 있겠네. 나는 하양이를 챙기러 갈 테니, 혼자서 주변이나 돌고 있으렴.” “…부탁해.”
한서현의 배려였다.
그녀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은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편으로─.
“─서현아.” “왜 부르니?”
“…….”
은하는 한서현을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직후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
자신은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
자신의 아내에게 선뜻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의 마음을 읽고 먼저 말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은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
“서현이 넌…, 정말 괜찮아?”
“너도 미안하지? 그럼 잘해. 나랑 하양이한테.”
함축적인 물음.
안타깝게도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그녀에게 정확히 전해졌다.
그녀가 키득거린 것이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이 동하는 대로 해.” “…….”
그것 역시 함축적인 대꾸.
은하가 희망한 대답도 아니었고.
그녀의 대답 또한 아니었다.
다만 한서현은 그 말을 남기고는 정하양에게 향했을 뿐이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냐?”
“빠빠? 빠빠!”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정하양과 한서현을 바라보며.
은하는 불닭이에게도 물었다.
나비넥타이를 찬 불닭이는 주인의 질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갔다.
한서현과 정하양은 저희끼리 놀며 은하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은하는 마치 자신이 없어도 재밌게 잘 논다고 항의하는 듯한 두 사람을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은하도 유도준과 놀거나 클랜원들과 놀고는 했다.
간간이 은하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유정이도 즐거워 보이네.
은하는 항상 이유정을 찾았다.
그때마다 이유정은 최예장과 함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은하는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에게 저희 딸아이의, 무척 기쁜 소식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유명 악단의 공연이 끝이 나고.
이정인이 무대에 올라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각자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모두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 모두 이정인이 무엇을 말할지 눈치챈 듯싶었다.
유정이 약혼을 발표하려는 거구나.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유정아, 예장아. 둘 다 여기 위로 올라오도록 하렴. 사람들에게 너희 모습을 보여줘야지.]이유정의 걸음을 배려하며 곧이어 무대 위로 올라온 이유정과 최예장.
최예장이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무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좋은 의미로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그가 더욱 쑥스러워하면서 이유정의 손을 꼭 쥐었다.
“…….”
은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줍어하듯 고개를 숙인 이유정을 계속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이정인은 결국 두 사람의 약혼을 발표했다.
[─그러니 지금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은 제 딸의 약혼을 부디 힘껏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짝 짝 짝─
이정인이 사람들의 축하를 받아내, 누구도 그녀가 나중에 흠이 잡히지 않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뒤에는 이제 YH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짜증나네.”
“뭐가?” “내가 보는 앞에서 또다시 커플이 탄생하는 게. 이 자리가 루미너스가 주최한 교류회만 아니었다면 그냥 죽창 들고 무대에 올랐을 텐데….”
사람들이 박수를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은하도 어쩔 수 없이 박수했다.
그러던 중, 은하의 곁에 서 있던 배수빈이 별안간 그런 말을 꺼냈다.
그녀도 분위기상 따르고 있었으나, 얼굴과 목소리는 몹시 불만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근데 유정이는 저게 좋을까? 과연 저 사람과 약혼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고 나서 추가로 한 마디.
서울 침공 이후 클랜회관에서 잠깐 이유정과 어울린 적이 있던 수빈이 의문조로 내뱉은 것이다.
은하는 순간 멈칫했다.
이에 그녀가 답하기를─.
“─그야 저 사람이 말을 걸 때만 대답하고,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으니까.”
“뭐?”
“내가 클랜회관에서 말을 섞어본 유정이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아. 조금 더 적극적이었고, 우리들한테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어.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은 뭔데?”
“…….”
“묻는 말에나 대답하기만 하고…. 저게 그냥 자동 응답 인형인 셈이지 아니면 뭐겠어? 너희 같은 사람들은 저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 참석한 내가 보기에는 그냥 정략결혼에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네.”
“……!”
“그리고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기만 하지. 나하고 대화할 때는 적어도 눈높이를 맞추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또─.”
남아 있던 샴페인을 꿀꺽하며.
배수빈이 신랄하게 말했다.
그리고 은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이유정을 자세히 보고 있었건만, 그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아가─.
“─내 주관적인 생각이기는 한데, 유정이는 귀족처럼 저러고 하하호호 웃고 있는 것보다 너랑 같이 편하게 노는 모습이 나은 것 같다.”
“…….”
“그때 꽤 즐거워 보이던데.”
은하는 배수빈과 다르게 이유정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지 못했다.
그동안 그녀를 가까이서 본 나머지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작 그녀의 미래만 생각한 결과, 그녀의 현재를 보지 못했다.
[─그럼 예장아. 네가 유정이한테 약혼반지를 끼워주겠니?]이대로 약혼을 하게 된다면.
이유정은 정말 행복해질 것인가.
은하는 확신하지 못했다.
설령 자신이 인정하는 남자라 해도 확신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자신이 인정하지도 못하는, 눈에 차지도 않는 남자가 이유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물질적인 안정을 벗어나.
정신적인 안정과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은 그걸로 만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야. 어느 누구도 못할 테고, 그러니 어떤 녀석에게도 그런 일은 맡길 수 없어.
내가 그 꼴은 절대 못 봐.
은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유정이 조금 전 은하가 끼워준 반지를 빼는 것을 바라보면서.
최예장이 그녀의 비어 있는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려는 것을 보며─.
‘─네 마음이 동하는 대로 해.’
빠직
은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최예장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속에서 화가 들끓었다.
설상가상으로 한서현이 건넨 말이 그의 마음을 부추겼다.
소유욕,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수빈아.” “뭐야, 왜?”
은하는 배수빈을 불렀다.
두 사람의 약혼을 조용히 지켜보던 배수빈이 왜 그러냐는 듯 되물었다.
“─쟤네들, 찢어놓고 싶지 않냐?”
“뭐?”
“네 말대로 커플이 탄생하는 것을 억지로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꽤나 나쁘기는 하네.”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구나. 아니, 너는 더 악질인가.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커플을 하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놈이었구나?”
“그래서 어때? 나하고 같이 쟤네들 확 찢어놓을까?”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은하는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배수빈을 부추겼다.
“─이래야 우리 클랜로드지. 그거, 참 듣기 좋은 소리네.”
이에 배수빈이 흥미를 보였다.
그녀가 은하처럼 입가를 끌어올려 동참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운이 좋게도 주변에는 클랜원들이 드문드문 있던 차였다.
은하는 그들도 불러모았다.
“어머, 자기.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지만 스릴이 넘치는 일을 벌이려는 것 같네. 너무 멋져.”
봉구래가 눈을 빛냈다.
“뭐? 그거 하면 재밌냐? 알았다.”
진파랑은 뇌가 없었다.
그가 흔쾌히 동의했다.
“어? 은하야, 그건 좀 위험하지….”
“그냥 하라면 해.”
“저기 얘들아? 에휴….”
강시형은 반대를 표했다.
그러자 배수빈이 강요했고.
강시형은 이제 경험적으로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깊은 한숨으로 동참하겠다는 강압 아닌 의지를 표방했다.
그리하여 은하는─.
“─지금이야. 배수빈, 불 꺼.”
“라져.”
최예장이 이유정에 왼손 약지에다 반지를 낀 그 순간.
은하가 신호를 내렸다.
배수빈이 신나라 하며 사람들 몰래 마법을 발동했다.
──!!!
“”””꺄아아아악!!”””” “갑자기 왜 정전이야!?”
배수빈이 정전을 일으켰다.
나아가 그녀는 산신령의 눈을 통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녀가 마법으로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때를 맞춰─.
─크르르르르르!!
진파랑이 기프트를 발동했다.
다짜고짜 블레이드 울프로 변신한 그가 회장이 떠나가랴 포효했다.
“”””꺄아아아아악!!””””
“”””몬스터! 몬스터다! 으아악!!””””
정전이 되자 당황한 사람들.
그들이 단편적인 정보로 판단하고 큰 패닉에 빠졌다.
곳곳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죄송합니다! 저희 형이 술에 취한 나머지 그만 난동을 부리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자리에 있어 주세요!”
에라 모르겠다는 듯이.
체념한 강시형은 태도를 바꿔서는 답이 없는 클랜원들을 도와주었다.
그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혼란을 최대한 통제하려 했다.
크르르르!!!
“”””꺄아아악!!””””
그런 한편 진파랑과 배수빈은 아주 고삐가 풀린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진파랑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배수빈이 어둠 속을 돌아다니면서 마법으로 식기들을 부순 것이다.
플레이어들이 대처하려고 했으나, 갑작스럽게 암흑을 맞이한 그들은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빠빠!” “조용히 해. 가만히 있어.”
바로 그때, 은하는 재빨리 무대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꺄아악!?”
“유, 유정아! 대체 무슨 일이야!! 유정아! 유정아, 어디 있는 거야!?”
이유정이 비명을 지르고.
이정인이 허겁지겁 놀라며.
최예장이 자빠지든 말든.
은하는 곧장 이유정을 납치했다.
그리고 야음을 틈타 연회장 밖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
YH그룹의 직계 최예장.
이유정을 만나기 전까지 최예장의 생활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한서현과 파혼을 하고 정재계에서 남자로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이란 소문이 돌았을 때는 괜찮았다.
꾹 참다가 보면 사람들의 흥미는 금세 식어, 관심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어느 날을 계기로 현실이 되고 말면서부터.
소문은 더욱 거세지고, 최예장의 자신감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알아와!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반드시 고쳐내란 말이야!’
‘오빠, 좀 쉬어. 쉬다 보면 조금은 괜찮아지겠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그러니까 힘내.’
YH그룹의 회장 최윤혜.
할머니는 애지중지하던 최예장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발악을 부렸고.
여동생 최예진은 그를 위로해주며 은연중 후계자 자리에 탐욕의 눈을 들이고 있었다.
또한 기가 센 할머니에게 시종일관 실망 어린 눈빛은 견디기 힘들었고, 여동생의 동정은 최예장을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만 했다.
엘릭서로도 치료가 안 된다니….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이야!
오죽하면 최예장은 엘릭서를 얻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말하길, 현재 그가 남자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건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기에 엘릭서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차에 시간은 계속 흐르고, YH그룹 내부에서 최예진의 입지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결국 최예장을 회장으로 만들려는 최윤혜는 특단의 조치를 써야 했다.
‘─루미너스그룹의 여식과 결혼해 네 지지기반을 안정시키려무나.’
‘할머니, 하지만 저는….’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는 거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게 되어 있어. 그에 비해 루미너스그룹의 여식은 고칠 수 없는 흠을 가지고 있지.’
‘…….’
‘네가 꿇릴 게 없다는 거야. 그러니 그 애를 만나게 되면 당당해지렴.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고. 솔직히 우리가 밑지는 장사란다.’
이유정과의 약혼.
루미너스그룹의 회장 이정인하고 할머니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 최예장은 이유정과 약혼하게 됐다.
최예장으로서는 별 수 없었다.
할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 역시 자신의 여동생에게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그룹의 비호라도 얻어야 했다.
그래서 사실 최예장은 이유정에게 별다른 기대를 갖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리 예쁘진 않겠지. 하긴, 이제는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난, 난, 크윽….
이유정을 처음 만나기 전까지.
최예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유정을 처음 보고 대단히 감탄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이유정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와….’
‘…오빠? 왜 그러신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비록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하나.
이유정에게는 범접하기 꺼려지는, 마치 성스러운 기품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는 굉장히 고아했고, 그의 예상과 달리 무척 예뻤다.
전 약혼녀이자, 이제는 유부녀인 한서현과 다른 결을 지닌 사람.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이후로 여성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던 그는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유정이랑 함께 살다 보면 내 문제도 고칠 수 있을지 몰라.
이유정을 만나면 만날수록.
최예장은 그녀에게 푹 빠졌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정식으로 약혼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명색이 유정이 남자가 되는 건데, 유정이를 지킬 힘은 있나 친구로서 확인을 해봐야지.’
그런데 모처럼 그날이 왔건만.
노은하가 초를 쳤다.
자신의 전 약혼녀를 빼앗아 가서 자신에게 수모를 준 것도 모자라.
노은하는 납득할 만한 자격도 없이 자신의 남성성을 시험하려고 했다.
유정이가 보는 앞에서 내가 창피를 당할까보냐.
그래, 어디 열어주마.
유치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최예장은 이유정을 만나며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고.
그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최예장은 도발에 응했다.
그렇게 끝내 그의 바람과 다르게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날 실망시키지 마라.’
노은하는 그에게 반지를 끼웠고.
최예장은 그가 그때 내뱉은 경고에 움찔하고 말았다.
마치 거대한 맹수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육신이 덜덜 떨렸다.
그때 그는 노은하에게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유정아, 손 줄래?”
“네….”
수모를 당한 기억을 덧씌우듯.
마침내 최예장과 이유정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며.
최예장은 이유정에게 약혼반지를 끼워주게 되었다.
최예장은 이유정의 반지를 빼내, 조금 전에 겪은 창피와 작별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새로운 추억으로 핑크빛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듯, 자신이 그녀를 위해서 고른 반지를 끼워주었다.
“유정아, 앞으로 내가 잘해줄게.”
“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 근데 오빠.”
“응. 왜?”
“은하가 준 반지,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친구가 준 거라 집에서 보관하고 싶어서요.” “아, 이거? 그래, 그럼.”
이유정이 자신이 끼워준 반지보다 은하가 준 반지에 흥미를 보이는 게 서운하기는 했으나.
최예장은 대인배적인 행세를 하며 그녀의 손에 반지를 쥐어주었다.
어차피 그녀가 저 반지를 쓰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제 자신의 여자가 되었다는 증표가 있었다.
노은하의 반지가 이유정의 인생에 들어오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최예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
“─뭐, 뭐야!?”
“네? 왜 그러세요?”
갑자기 정전이 일어났다.
최예장은 화들짝 놀라며 이유정을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그의 품에 들어간 그녀는 당황한 눈치였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갑자기 정전이 발생한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니, 갑자기 정전이 돼…으아악! 가, 갑자기 뭔 소리야!?”
단순한 정전이다.
최예장이 그렇게 넘기려 했을 때.
별안간 늑대가 우는 듯한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최예장을 비롯해 사람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죄송합니다! 저희 형이 술에 취한 나머지 그만 난동을 부리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자리에 있어 주세요!”
물론, 직후에 플레이어가 상황을 설명해주기는 했다.
이 난리통 속에서도 귀에 선명히 박히는 소리가 그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한 플레이어가 늑대로 변해 연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피해를 볼지 모를 상황이었다.
“이래서 아인 놈들은 안 된다니까. 지들이 영웅이 됐다고, 아주 행패를 부려도 되는 줄 알아….”
“오빠?”
“괜찮아, 유정아. 나만 믿어.”
이때가 아니면 언제 있겠는가.
최예장은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러 험한 말투를 구사했다.
그러고는 이유정을 꼭 끌어안으며,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말을 건넸다.
필시 그녀도 반했을 것이라고.
최예장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꺄아악!?”
“뭐, 뭐야!?”
어둠 속에서 불쑥.
별안간 무언가가 최예장을 탁 하고 잡아당겼다.
그가 어찌할 새도 없었다.
몸에 힘을 주고 있었건만.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당기니, 뒤로 벌러덩 자빠진 것이다.
그리고 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유정을 안고 있던 손을 그만 풀고 말았다.
이유정의 비명이 들렸고.
최예장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유정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이거 놔.”
“……!!”
누군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공포에 떨게 한 것은 손목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악력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게 하는 음성이었다.
“노, 노은하…?”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최예장은 이유정을 끌어안고 있는 존재의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플레이어가 어둠을 밝히려 사용한 마법이 순간적으로 지나가며 남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노은하였다.
일순, 눈이 마주쳤다.
“─너한테는 못 줘.”
“…….”
흉흉하게 번뜩이는 시선.
최예장은 그저 압도되었다.
머리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유정을 되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노은하의 눈을 마주한 순간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
노은하가, 무서웠다.
발이 바닥에 딱 붙은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은 것처럼 서 있었더니.
노은하는 그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가 이죽거렸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찾을 수 없네. 이런 놈한테 유정이를 넘기려고 했다니…. 내가 진짜 멍청했구나.”
“……!”
그 말을 남기고.
노은하가 이유정을 어깨에 업고서 어둠 속에 잠긴 연회장을 나갔다.
최예장은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내 그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오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기다려! 유정아!”
어쩌면 이대로 이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발로였으리라.
최예장은 제 자신의 발을 묶고 있던 주박을 깨뜨렸다.
최예장이 곧장 노은하를 쫓았다.
자신의 여자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잡았다! 이놈!”
“오잉?”
그리고 마침내.
최예장은 목적을 달성했다.
어둠 속에서 노은하의 뒤를 쫓아, 그를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불이 들어왔을 때─.
“─자기, 이 손은 뭐야? 이건 대체 무슨 뜻이야? 나 오해한다?”
“…어? 어어….”
“안 돼. 못 도망가. 흥, 도망가기는 어디를 도망가려고? 자기는 나하고 이제 재미있게 놀아야 해.”
“……!!”
“근데 자기 손, 은근히 부드럽다?”
플레이어들이 사태를 정리하고.
연회장이 환히 밝아졌다.
이에 최예장은 자신이 붙잡고 있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아아….”
“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랑 의무실이라도 갈까?”
봉구래.
화장을 한 남자를 마주하고.
최예장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마지막 자신감이 박살이 났다.
☆
난데없이 은하에게 납치당했다.
놀람은 잠시였다.
은하의 품속이 익숙한 나머지.
이유정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하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이렇게─.
─쿵쿵쿵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다만 은하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들려오는 대답은 짧았다.
“─나도 몰라.”
이유정은 개의치 않아했다.
“응, 그렇구나.”
대답 따위는 아무렴 좋았다.
그저 은하와 이렇게 있다는 것이 좋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작게 키득거렸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갈 거야.”
“응.”
“화 안 내?”
“내가 화내야 하는 거야?”
“…아니야. 바람이나 쐬러 가자.”
“응, 좋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다만 네가 곁에 있으면 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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