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76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박상진은 집무실에 들어서서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선녀님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생각하더라도 끔찍했다.
이탈리아의 대사 젠코 마이론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십이좌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트레디치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플레이어도 아닌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자극해버리고 만 것이다.
선녀 임가을.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의 기프트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녀라는 입장으로서 체면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다음부터는 저희들에게 명령해주십시오. 호위사는 선녀님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선녀님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들을 멸하기 위해 있는 겁니다.
당신은 아직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여배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제 좀 선녀라는 자각을─.”
“박상진.”
가만히 듣고 있던 가을이 말을 끊었다.
“그 말은 호위사로서의 의견? 아니면 여배우 임가을의 매니저로서의 의견?”
상진은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그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주저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때 여배우였던 그녀의 마음은 읽을 수 있었어도, 선녀가 되기를 선택한 그녀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침묵 끝에 내놓은 대답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선녀로서의 자각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어휴, 겁쟁이.”
“뭐?”
상진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정현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저은 정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일만 잘하면 뭐해. 이 형은 아직도 여자 마음을 몰라서야.”
“이정현. 네가 그 말을 할 입장은 아닐 텐데? 내가 분명 감정 죽이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 죄송합니다.”
개구쟁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던 정현이 재빨리 차려 자세를 취했다.
가을은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나도 그만 욱하고 말았으니, 이번만은 용서해줄게. 하지만…, 알지?”
“넵.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정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가 내리는 벌이 감봉만으로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봉만 당하면 다행이지, 저번처럼 덜렁 산속에 던져져서는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오라는 소리는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조금 전, 케이크를 준비하러 나가면서 서기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에서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를 방한기념으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네. 이탈리아 대사관 직원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빅 마마가 애용하던 차라고 합니다.”
“그걸 지금 나한테 줬다는 말이지?”
임가을이 탁 하고 펜을 내려놓고는 물었다.
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만드는 위압감이었다.
이정현은 속으로 아차 하며 말을 수정했다.
“저도 그래서 물어봤거든요. 왜 빅 마마가 타던 차를 주냐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쪽에서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는 방탄 처리만이 아니라 마나에 대한 내성이 강한 합금으로 제조된 프리미엄으로….”
“이정현. 네가 호위사지, 자동차 딜러야? 요점만 말해.”
“넵. 죄송합니다. 빅 마마가 선녀님께 자신이 타던 그란투리스모를 친애의 뜻을 담아 선물하는 거라고 합니다.”
임가을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시선을 받은 정현은 뱀 앞에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야, 상진이 형! 나 좀 도와줘!
그가 곁눈질로 상진을 찾았다.
상진은 고개를 돌렸다. 괜히 지옥불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빅 마마가 선물해줬다는 말이지. 응, 너나 타라고 하고 돌려줘.”
“…네? 마세라티를요? 그란투리스모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정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타던 차이기는 했어도, 마세라티였다. 그란투리스모였다.
세계적인 스포츠카 회사에서 만들어진 승용차인 것이다.
더군다나 방탄처리는 물론이며, 마나 내성까지 완벽하게 처리된 프리미엄.
그녀는 이후, 국내에서 해외 스포츠카의 가치가 얼마나 올랐는지 모르는 것일까.
이정현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다른 사람이 탄 차는 타지 않아. 그리고 나는 람보르기니를 더 좋아하니까.”
“람보르기니도 좋지만, 마세라티도 얼마나 좋은데요.”
“너는 이탈리아에서 무례하게 굴었는 데에도 그깟 스포츠카를, 그것도 남이 탄 스포츠카를 받고 싶니?”
“저도 물론 이탈리아 스파게티 자식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보아하니 빅 마마는 정말 친애의 뜻으로 자신이 타던 차를….”
“안 되겠다. 너는 당분간 산에 들어가서….”
“네, 선녀님 말이 천부당만부당 맞는 말이옵니다!”
이정현의 태세변환은 즉각적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진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올 정도로.
“빅 마마가 친애의 뜻을 담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가을이 호위사들에게 말했다.
그녀는 빅 마마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단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을 통해 빅 마마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빅 마마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결코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 역시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하려는 플레이어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고.
단순히 친애의 뜻을 담아 그란투리스모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괜히 받았다가는 나중에 무언가를 내놓으라 할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친애의 뜻을 담아 보냈다지만, 결국 이탈리아가 한국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억측이 과하다고 하기에는 이탈리아 대사 젠코 마이론을 생각하면, 그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는 한국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생각하고 있던 바를 입으로 내뱉었다.
한때 국민 여배우라 불렸던 그녀는, 누군가가 머리 위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상대가 여자라면 더더욱.
“이탈리아는 어째서 젠코 마이론과 같은 작자를 보낸 걸까요.”
“…녀석들이 우리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거겠지.”
그녀는 호위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빅 마마는 젠코 마이론을 보낸 것일까.
그를 보낸 이유에는 모종의 이유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서.”
“불상사는 일어났지. 녀석이 선을 밟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그러던 그녀는 두 사람의 말에서 보이지 않던 실마리를 찾았다.
대사가 선녀에게 무례를 범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었다면 외교적 압박을 가하거나, 상대국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일로 끝날 터였다.
허나 세상은 한 번 멸망했다.
세상은 사람이 죽는 데에는 ‘죽은 사람이 약했기 때문이다’라는 이유가 붙어도 불평을 토로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대사가 무례를 범했다면, 그것도 심히 모욕적인 언사였다면 죽어 마땅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측에서도 강력한 비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빅 마마는 젠코 마이론이 어떤 이인지를 알 텐데도 대사로서 파견했다.
마치 젠코 마이론이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탈리아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건가?”
“네?”
“아무것도 아니야.”
현재로서는 이탈리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내린 결론도 추측에 불과했다. 굳이 호위사들에게 발설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빅 마마는 자신의 계획에 한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감히 똥을 넘겨?”
빅 마마의 선물에는 이러한 의도가 숨어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수록 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정말 빅 마마가 더러운 일을 떠맡긴 것이라면, 여기에서 끝날 리가 없을 터였다.
“이정현. 믿을 만한 사람을 풀어서 이탈리아 대사들을 지켜보라고 일러둬. 문제가 생기는 대로 즉각 보고하도록 이르고.”
“네, 알겠습니다!”
이정현은 이견을 품지 않았다. 그는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이제 집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녀와 상진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거래는 예상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둬서.”
그가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녀의 곁에 다가서서는 잔에 커피를 따라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커피 향을 음미했다.
“앨리스 제약의 포션 덕이 컸지.”
작년, 포션 시장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앨리스 제약의 신종 포션.
만약 신종 포션이 출시되지 않았더라면, 이탈리아의 마나합금을 얻는데 상당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이탈리아에게 더더욱 고개를 숙여야 했으리라.
“시기적절한 때에 출시돼서 다행이었지. 덕분에 다른 제약회사 아류작이 만들어진 데다, 단기간에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출 수 있었으니.”
“특히 정석훈 엔지니어의 최상급 포션까지 준비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맞아. 정석훈 엔지니어와 앨리스 그룹에는 빚을 지었어. 이탈리아와 거래가 마무리되는 대로, 감사의 뜻을 전할 준비를 해줘.”
“네, 보좌관에게 말해놓겠습니다.
그래도 이탈리아 대사를 자극한 건 위험했습니다.”
그가 그녀를 타일렀다.
그녀가 눈초리를 세워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는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옆방에 께서 대기하고 계셨으니, 문제가 일어났더라면 그건 내가 아니라 대사들이었겠지.”
“…정말이지. 조금도 지려 하지 않는군요.”
상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대로, 접견실 옆방에서는 이 대기하고 있었다.
남궁성운.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 최강이라 불리는 노인은 필시 그녀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위험한 짓을 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만일의 경우가 있었다.
호위사라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행동해야 했다.
그는 다시금 선녀로서의 자각을 가져달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녀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배우라면, 그리고 선녀라면 누구에게도 꺾여서는 안 돼.”
하, 어쩔 수 없군요.
상진은 입을 다물었다.
선녀가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강철과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
“루~ 룰루~ 루 룰루~ 루루~”
줄리에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병원에서 나온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듯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게 행복이라는 거구나.”
걸음을 멈췄다.
햇살이 따사로웠다. 초여름에 들어선 날씨는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날씨도 이랬던가.
그녀는 시칠리아에서 보냈던 나날을 떠올렸다.
나쁜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좋은 기억이 더 많았다.
그래서 가끔 고국을 그리워하고는 했다.
그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너에게는 보여줄 수 없겠구나.”
그녀는 자신의 배에 손을 얹었다.
아직 배는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뱃속에서 태동하고 있을 아이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축하해요. 임신이에요. 벌써 6주차에 접어들었네요.’
오늘, 그녀는 임신소식을 접했다.
이탈리아를 떠나고, 한국에 정착한 뒤로 줄곧 바라고 있던 소식이었다.
은애를 볼 때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얼마나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드디어 결실이 맺어진 것이다.
“아!”
가만히 배를 쓰다듬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마트폰을 꺼냈다.
“얼른 브루에게도 알려줘야지. …아, 이런 건 직접 알려주는 게 좋으려나?”
그럼 적당히 귀띔만 해줘야지.
줄리에타는 뚜 뚜 이어지는 신호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브루노가 전화를 받았다.
“브루! 나야!”
[응. 점심은?]“지금 먹으러 가는 중이야. 브루는? 밥 먹었어?”
[나도. 지금 먹으러 가. 병원은 다녀왔어? 몸은 괜찮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걱정 어린 목소리.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기분은 언제나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말해서는 안 됐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한 다음, 그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몸은 괜찮대. 저녁에 먹고 싶은 건 없어?”
[…딱히 없어. 요리하지 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만들어줄게.]“브루. 나도 나 요리 못하는 거 알아. 당연히 사려 그랬지.”
[…아, 그래.]“브루.”
[응, 줄리.]“오늘 일찍 들어와야 해.”
[…알았어.]전화를 끊었다.
행복했다.
이탈리아를 떠난 이래, 이토록 행복했던 날이 있었을까.
그녀는 걸음을 내딛었다. 도중에 걸음을 멈춰서는 배 위에 손을 얹기도 했다.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이 행복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초여름의 행복을 만끽했다.
앞으로도 행복이 계속─.
계속되─.
“─여~ 이게 누구야. 줄리에타 발렌타인이잖아?”
계속 계속 계속계 속 계속계속계속 계속계계계계속 속속속속계속 계계계계계속계속되계속속속 계속계속계속 계속계속 계속속계속되계속 계속되기계속 계속계속계속 계속게에소오옥 계속계속계속 계속계속 계속계속 계속계에에에속 계속되기를──.
“그 동안 잘 지냈어?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네.”
“아…. 아아아….”
“근데 이거 아쉬워서 어쩌지?”
젠코 마이론이 이죽거렸다.
“파랑새는 그만 새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거든.”
행복은, 계속된다.
꿈을 꾸는 동안에만.
리라이프 플레이어 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