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803
제3기 십이좌가 발표되었다.
그동안 제3기 십이좌 구성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발표는 그들의 논란을 종식했다고 할 수 있다.
“선녀정부가 갑자기 십이좌 필두를 이 아닌 로 한다고 번복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십이좌 인원 구성을 이렇게 한 거였구만.”
“가 필두라니…. 도대체 선녀정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 정치 싸움에서 이겼다 생각하면 되겠지.”
“내가 알기로 는 정치적인 화제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라이브러리의 관리를 모라율에게 양도하고.
제3기 십이좌 필두가 된 .
사람들은 정부가 결정을 번복하며 예정되어 있던 필두를 로 바꾼 것에 의아해했다.
다만 정치적인 싸움이 있었으리라.
그렇게 예측했을 뿐이다.
한편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은 이면에서 일어난 정치싸움을 얼추 더듬을 수 있었다.
“가 십이좌가 됐어. 제3기 십이좌 후보들은 실력 평가를 통해 십이좌가 됐는데, 반면 는 갑자기 십이좌가 됐다는 건데….”
“이 십이좌가 되지 못하면서 헌터 부문이 비어버리게 되긴 했지. 그러면 헌터 부문을 따로 뽑아야지 로 대뜸 내정해버리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야.”
“는 과거 의 였었지. 그것도 무관하지 않을 거야. 결국 이건….”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은 모른다.
이 나라가 어둠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집단이었다.
이에 선녀정부는 지금까지 어둠을 관리하기 위해서 어둠의 관리자를 십이좌로 두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가 어둠을 계승하게 된 거야.”
“앞으로 어둠은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겠군. 백서진은 뒷방으로 물러나는 거겠고….”
한창진.
선녀정부, , 은 한창진을 어둠의 새로운 관리자로 인정한 것이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들은 모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어둠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파격적인 인사 조치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들도 이제는 그 세상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리라.
혹은 어둠에게 잡아먹히리라.
이 를 다음 어둠의 군주로 임명했다.
5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한창진.
어둠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그러한 이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명은 어느덧 세상에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며, 십이좌의 이명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허, 판도라클랜에서 십이좌가 두 명이나 나왔군.”
클랜로드들은 허탈하기만 했다.
가 십이좌 필두가 되면서 네비게이터에게 배정돼 있던 자리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대신해, 뜬금없이 헌터 부문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클랜들은 지원도 못 하고, 그 자리는 에게 넙죽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었다.
“판도라클랜이 로비를 벌인 거야. 정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십이좌를 두 자리나 가져가다니….”
명백했다. 틀림없었다.
클랜로드들은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따질 수 없었다.
지금 판도라클랜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말인가.
특히 판도라 클랜로드의 인지도가 지금 어떻다는 말인가.
오히려 평범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판도라클랜이 제3기 십이좌 자리를 두 자리나 차지하고 있다는 상황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 만세! 만세!! 만만세!” “노은하를 이 나라의 군주로!!”
“정부가 우리 말을 들어주는구나!!”
민심은 판도라클랜에 있었다.
클랜 관계자들은 항의하지 못했다.
항의하는 순간 이 나라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클랜 관계자들 중에서는 판도라클랜에 호의적인 사람들 또한 많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서로 입장도 달라서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다.
“”””…….””””
한편 마지막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 상황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했다.
판도라클랜이 십이좌 자리를 2개나 가지게 되었다.
한창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연히도 운이 좋았다.
하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했다.
이번 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사람은 누구일까.
한창진?
그럴 수도 있다.
십이좌가 되며 새로 이명을 얻은 진파랑?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건 그들이 아니라─.
─판도라 클랜로드다.
노은하.
비록 십이좌가 되지는 않았지만.
두 명의 십이좌를 거느리게 되고.
그중 한 명은 어둠을 관리하게 될 터였다.
선녀정부는 어둠을 관리하려 한다. 그렇기에 어둠을 관리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나관리기구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을 보라.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가.
정부 소속의 마나관리기구가 아닌 일개 플레이어가 거느리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짜 어둠의 주인은 따로 있다.
은 연막에 불과하다.
진짜 주인은 이다.
이명 그대로.
한창진은 그림자다.
의 불에 비치는 그림자.
노은하란 왕의 그림자이니 당연히 모든 그림자들의 왕이 아니겠는가.
한창진은 어둠의 실세이되, 사실은 어둠의 실세가 아니란 점에서 정말 인 것이다.
노은하는 군주를 목표로 한다.
아니, 그는 이미 군주다.
그 순간, 사람들은 전율했다.
거리를 나서면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아라.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고 있던가.
을 이 나라의 군주로!
노은하는 민심을 손에 넣었다.
또한 어둠이란 권력을 거머쥐었다.
민심도, 권력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다.
무력, 말할 것도 없었다.
노은하는 이번에 제2위계 매구를 퇴각시켰다.
재력, 더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의 부인들이 누구였던가.
이, 이 나라의 실세다.
사람들은 연일 군주를 외쳐대지만.
그들이 외치는 군주는 이미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3기 십이좌 인사 조치는 그동안 의혹으로 여겨지던 노은하의 행동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이 개막했다.
☆
한편 진파랑, 한창진이 십이좌로 선발되게 되면서.
판도라클랜에서는 그들을 축하하러 연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얘들아, 실컷 마셔라! 오늘 이건 은하가 날 위해 한턱 내는 거란다! 우히히!!”
“”””건배!!””””
클랜원들에게 조용히 축하를 받는 한창진과 다르게.
진파랑은 아예 고삐가 풀렸다.
그가 대뜸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건배사를 제의하기도 했다.
클랜원들은 그가 엉덩이를 흔들며 신이 난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저 형이 정말 십이좌가 됐다니…. 이제 십이좌가 됐으면 저런 식으로 경박하게 웃지 좀 말지.”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클랜원들로부터 떨어져 술을 홀짝이기나 했다.
북적거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클랜원들도 이제는 워낙 많아져, 그들 사이에 끼기 꺼려졌다.
게다가 초창기 클랜원을 제외하면 클랜원들 대부분 클랜로드인 은하를 어려워하기도 했다.
판도라클랜도 이제는 나름 체계가 잡히게 되었으니…. 새로 들어오는 애들이 거의 엮일 일이 없는 나를 어려워할 만도 하지.
그래서 은하는 클랜원들을 배려해 위층에서 떨어져 연회에 참석했다.
은하 외에도 어쩌다 보니 클랜에서 위엄 있는 이미지를 갖게 된 이들도 위층에 있었다.
그들도 아래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진파랑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잔 비었는데, 따라줄까?”
“어, 고마워, 유정아.”
위층에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은하는 편안한 얼굴로 연회를 즐길 수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이유정은 귀신같이 그의 잔이 비는 순간에 술을 가득 따라주고는 했다.
꼭 은하의 술잔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내가 취하는 거 봤어?”
“그래도. 적당히 마셔야지.”
“알았어.”
그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러자 그녀가 몸을 기대어왔다.
은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정면에 앉아 있던 한서현, 정하양이 게슴츠레한 눈을 했다.
“─유정이만 네 아내고, 우리는 뭐 앞에 앉은 들러리인가 보구나.”
“둘이 사이, 엄청 좋네?”
“”…….””
한서현, 정하양.
은하와 이유정은 가시 돋친 소리에 슬그머니 떨어졌다.
주위에서 그 모습을 본 클랜원들은 혀를 쯧쯧 찼다.
“그나저나 파랑 아주버님의 행동을 개선해야 하는 건 맞기는 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파랑 오빠도 이제는 십이좌가 됐는데, 어디 가서 옷을 훌러덩 벗고 다니거나 그러면 문제가 많이 될 거야.”
“…그건 그렇지.”
이내 한서현이 말을 꺼냈다.
정하양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이 맞았다.
진파랑은 이제 공인이었다.
앞으로 그가 하는 모든 행동, 말은 선녀정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어디 선녀정부뿐인가.
진파랑이 적을 둔 판도라클랜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저 형을 괜히 십이좌로 한 건가?
아니야, 그래도 집어넣을 수 있는 부문에서 적당한 인재가 저 형밖에 없기는 했어.
저 형이 의욕이 충만하기도 했고.
은하는 진파랑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클랜원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위엄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다소 불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은하는 진파랑을 추천한 그때 자신의 확신을 믿기로 했다.
저 형만큼 내 말을 따르는 사람은 판도라클랜에 별로 없어.
진파랑은 은하에게 말을 잘 듣는 늑대(개)나 다름없었다.
이성보다 감정을 더 중시하는 그는 은하가 시키면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곧잘 따르고는 했다.
무엇보다 진파랑은 아인이었다.
제1기 십이좌 오건후 이후 새로이 아인의 몸으로 십이좌가 된 플레이어.
덕분에 진파랑은 가만히 있음에도 자연히 아인들의 지지가 따르고 있었다.
새로이 십이좌가 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단단한 지지층을 얻고 있는 게 바로 진파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잘할 거야. 저 형도 마냥 바보는 아니니까, 이제부터 자신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겠지.”
“맞아, 파랑 오빠도 잘할 거야.”
그러니 은하는 진파랑을 믿었다.
물론, 클랜 차원에서 진파랑에게 십이좌로서 모범이 될 수가 있도록 교육을 시키기는 해야 할 것이다.
은하는 이유정을 돌아보았다.
“유정이 네가 바보 형한테 예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응? 내가?”
“서현이랑 하양이나 다른 사람들은 일 때문에 바쁘니…. 유정이 너밖에 저 형한테 예절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바보 형이 네 말은 또 잘 듣잖아.” “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너 말고 행동 하나하나에 그렇게 선이 예쁜 애가 어디 있다 그러니. 나도 찬성이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유정만한 적임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예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을 가르쳐주는 것에 무척 능숙했다.
한서현처럼 말로 사람 마음을 푹푹 찌르지 않았고, 정하양처럼 지식만 풍부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은하는 당분간 진파랑에게 이유정을 붙여주고자 했다.
이에 생각에 잠겨 있던 이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해볼게.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도 너희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걸.”
“너는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어.”
“은하야….”
“”…….””
은하는 이유정의 손을 잡았다.
이유정의 목소리에 물기가 찼다.
그녀도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금방 손을 풀고 차렷 자세를 취해야 했다.
앞자리에서 싸늘한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기 때문이다.
“왜? 더 하지 그러니. 우리는 그냥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면서 너희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을게.”
“그래, 맞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마저 해. 아이, 보기 좋다.”
“”크흠….””
아내가 셋이라.
애정행각도 마음대로 못 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따끔했다.
은하는 헛기침을 했고.
이유정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에 은하는 냉큼 화제를 돌려서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해수 형은? 회식에 오지 않은 건가?”
“지금 시리우스 디바이스 본사에서 용광로 제작을 참관하고 있다더라. 오늘 완성된다는 모양이야.”
“그 형은 진짜…. 일만 하지 말고 회식 좀 하다 가지.”
한서현의 대답에.
은하는 끙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판도라클랜은 이번에 의정부에서 많은 전리품을 가져왔다.
벽해수는 전리품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것인 마냥 좋아했다.
그중에서 그가 특히나 좋아한 것은 세탁기였다.
세탁기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그는 그날부로 곧장 용광로 제작에 착수했을 정도다.
그 용광로가 오늘 완성된다고 하니 회식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용광로를 보러 갈 만도 했다.
덕분에 지금 애들 전용 디바이스 제작이 미뤄지고 있는 중이지.
사실 클랜원들도 새로운 용광로가 제작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이번에 의정부에서 고된 전투로 인해 디바이스를 잃고 말았다.
디바이스를 새로 맞춰야 했다.
은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새로 맞추는 겸, 더 좋은 용광로로 디바이스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조만간에 보물고에 들어가 아티펙트를 구하기도 할 거니까….
결국 현재 벽해수는 수리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클랜원들은 백현율이 문장을 새긴, 클랜에서 보유하는 디바이스를 대신 사용하는 중이었다.
은하의 경우, 한손직검이 있었기에 별도로 맹고슈를 챙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얼른 새로 제작된 용광로가 벽해수의 공방에 들어오기 기다려졌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그러던 은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하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려고? 이 시간에?”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보문동.”
“””…….”””
보문동에 간다.
그 말만으로도 세 사람은 은하가 어디에 갈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5년.
한창진을 포함해서, 이제 은하와 친한 사람들 몇몇도 그가 독자적인 정보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원이 법의 울타리에 걸쳐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리고 뭐라도 챙겨가고.”
“알았어, 그럴게. 밑에 가서 뭐라도 챙겨가지. 고마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존재다.
판도라클랜과 그들의 관계는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서현은 이십오의 존재를 알면서도 에둘러 말했다.
그러고는 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잘 잡아두라고 에둘러 조언했다.
은하는 순순히 그녀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
보문동과 숭인동의 경계선.
은하는 늘 만나는 접선 장소에서 이십오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이십오가 나타났다.
“오늘 클랜 회식한다면서 여기에는 무슨 일이래요?” “자, 이거.”
“응? 이건 뭐예요? 와, 보따리에 바리바리 싸들고 왔네. 혹시 저한테 먹으라고 주는 거예요?”
“네 주인마님들이 챙겨주라더라. 맨날 부려먹지만 말고.”
“와…. 이래서 결혼이 좋은 거네요. 마님들이 주인님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었네.”
“입.”
“그래서 이걸 주려고 온 거예요?”
오늘따라 주인님이 웬일이래.
이십오가 곱슬거리는 머리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은하는 보따리 속에서 음식 하나를 꺼내먹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십오.”
“네, 주인님.”
은하가 그를 불렀다.
이십오가 벌떡 일어났다.
이내 능청스럽게 대꾸하려던 그가 은하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은하의 얼굴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이십오는 은하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은하는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어?”
“…….”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십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듯했다.
그러자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저하고 주인님이 만난 지 시간이 얼마나 됐죠?”
“…….”
“대략 11년 정도인가. 그 질문을 이제 와서 하는 거예요?”
“질문에나 답해.”
“쭉이요. 그날, 주인님이 제 이름을 가르쳐줬을 때부터 결심한 건데요. 근데 사람의 충성심도 모르고, 그걸 이제 와서 묻는 주인님 센스 참….”
“변함없는 거지?”
“이제 와서 마음 돌릴 수도 없죠. 주인님 뒤치다꺼리를 너무 오래해서 주인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에는 늦었거든요. 주인님 성격도 아는데, 주인님 자리를 넘보다 어떻게 될지 뻔히 예상이 가기도 하고요.”
심드렁한 답변이었다.
그리고 말이 길었다.
이십오다웠다.
은하는 이십오가 하는 말을 듣고 굳은 얼굴을 풀었다.
“자, 받아.”
“이게 뭔데요? 어…?”
은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클랜에서 가져온 스킬석을 이십오에게 던져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스킬석을 받게 된 이십오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스킬석의 정체를 듣고─.
“─괴시니의 스킬석이야. 이번에 의정부에서 쓰러뜨린 군단장 꺼.”
“……!!”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제3위계 오버랭크 괴시니.
이십오도 의정부에 있던 군단장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건데요?”
마치 흥분한 사람처럼.
이십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킬석을 쥔 손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하는 그런 그에게 답했다.
“앞으로도 잘 좀 도와달라고.”
“그렇다고 이걸 줘요? 이번에 십이좌가 된 한테 줘도 될 텐데….”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네가 사용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괴시니의 스킬석을 어떻게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은하가 내놓은 답은 바로 이십오였다.
자신의 어둠을 담당하는 존재.
은하는 그를 선택했다.
“이번에 결정했어.”
“뭐를요?”
“나만의 어둠을 만들겠다고.”
“…….”
군대가 의정부를 포격하면서.
그것이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면서.
은하는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이 온전히 백서진의 손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아가 기존의 어둠은 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확신할 수 없기는 해도─.
─아마겟돈의 지분도 있겠지.
마인들도 암약하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백서진의 어둠에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감시당하는 꼴이다.
그러니 독자적인 어둠이 필요했다.
오직 자신의 명령을 위해 존재하고 통제되는 어둠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십오 네가 내 어둠이 되어줬으면 해. 골목길 세력으로만 만족할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세력 범위를 넓혀줬으면 해.”
“…후회 안 하세요? 그러다 백서진 그 사람이랑 전쟁 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상관없어.”
설령 백서진과 부딪치게 될지라도.
은하는 자신의 어둠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 나라 모든 어두운 부분을 장악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창진이 형은 선생님의 어둠을 장악하고, 교란해나갈 거야. 그사이 너와 이강혁은 어둠에 대항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해줘.”
“…진짜 군주가 되려는 겁니까.”
“그래야만 한다면, 돼야지.”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그건 플레이어가 되기로 하면서 각오한 바야.” “주인님만 죽는 게 아닐 텐데도요? 마님들은요?”
“…다들 각오했어.”
“미쳤네요.”
“미쳤으니까 나랑 결혼했지.”
“후….”
“그리고 죽음은 각오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어둠을 만든다.
한창진과 이십오를 양팔로 두고, 이 나라의 모든 어둠을 장악한다.
은하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미안한데 나는 죽을 생각 없어. 더는 실패하고 싶지 않거든.”
“알다가도 모르는 소리나 하고…. 후우, 진짜 미치겠네요.”
“날 만나기도 전부터 미쳤으면서 미치기는 무슨.”
“그래요, 저 미쳤어요. 그래서인지 주인님 제안이 퍽 끌리네요.”
이십오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은하는 손을 내밀었다.
이십오가 그 손을 잡았다.
“잘 따라와.”
“주인님이야말로 죽지나 마시죠.”
한창진이라는 그림자와.
이십오라는 그림자.
그들이 자신의 어둠을 지탱하리라.
☆
한편 그 시각.
시리우스 디바이스 본사는 밤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벽해수의 용광로 때문이었다.
“─때깔 한 번 죽이네.”
마침내 용광로가 완성됐다.
벽해수는 용광로의 표면을 탁 치며 흡족해했다.
“이걸로 애들 디바이스를 만들어주면 되겠네. 그동안 전용 디바이스도 사용하지 못하고 싸워야 했을 텐데, 얼른 만들어줘야지.”
용광로에서 풍기는 마나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장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것은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올 용광로라고.
“헤파이스토스의 용광로. 이름은 그걸로 딱이겠구만.”
벽해수는 머릿속에서 불쑥 떠오른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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