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816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거대한 사건은 사회 계층의 변화를 꾀하고는 한다.
서울 재앙.
마나교 반혼제 테러.
제2차 의정부 탈환전.
지금까지 일어난 세 개의 사건은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활발하게 신분 상승을 할 수가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단,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그동안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했던 아인과 외국인들은 이 기회를 통해 그들이 진출할 수가 있는 사회적인 영역을 늘렸다.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던 그들의 열망은 더욱 강렬했다.
반대로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안주해 있는 이들도 있었다.
혹자는 그들의 나태함을 욕했고, 혹자는 그들의 성실함을 두둔했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논하자면, 하나밖에 없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순수 한국인에게 주어진 권리를 되찾읍시다!!』
『아인 타도, 외국인 척결!』
사람 또한 동물이다.
이성을 지닌 동물인 그들은 때로는 이성이 아닌 감정에 지배당한다.
최근 발발한 사건도 그러했다.
언제나 자신보다 아래에 있으리라 경시하고 있던 아인과 외국인들이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자, 그들의 이성은 날아가 버렸다.
동물도 서열에 신경 쓰는 법인데, 인간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미개하다 생각한 사람들이 위에 서는 흐름에 극도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그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동물이되, 인간이었다.
사회적이고 이성을 지니는 그들은 자신이 품은 마음이 저급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속에 봉인했다.
하지만 봉인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틀어지고 말았다.
아니, 그들도 내심 자신의 마음을 두둔할 명분을 필요로 했다.
“은 십이좌 자리에서 물러가라! 그 자리는 아인의 자리가 아닌 사람의 자리다!!”
“텔레파시스트가 십이좌라니 이게 웬 말이냐! 네비게이터를 십이좌로 만들어라!!”
그런데 극단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진파랑에게 달걀을 던졌다.
그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 열등감을 분출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인, 외국인들에게 품고 있던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방송을 보며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연히 그들에게 지탄받는 아인, 외국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특히 아인들은 심하게 반응했다.
“우리도 사람이다! 순수 한국인!? 개소리하고 있네! 나 역시 이 땅에 한국인 부모를 두고 태어난 사람이란 말이다!!”
“우리는 그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했다! 우리는 떳떳하다!!”
아인들도 거리로 나섰다.
최근 광화문에서는 한쪽에 아인이, 다른 한쪽에 순수 한국인을 외치는 사람들의 운동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아직까지 부딪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이 충돌을 하게 되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 쪽은 아인들이 될 터였다.
아인들의 수가 적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힘을 가감해 사용해야 하는 그들은 적들의 수를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 플레이어, 내가 이리 고개 숙여 부탁하겠네. 부디 자네가 집회에 나와서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어줬으면 하네.”
광화문에서 시위를 주최하고 있는, 전국 아인 연맹의 대표인 백진호는 진파랑을 찾아왔다.
아인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세 명 있었다.
진파랑, 진서나, 아리엘.
진파랑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아인이었다.
더욱이 그는 얼마 전에 방송에서 달걀 폭탄을 맞으며 아인을 비롯해, 일부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진파랑만한 적임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거리로 나선 이유는 자네가 그 사람들에게 당한 것 때문에 공분해서 나선 게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동참을 해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게.”
호랑이 귀를 한 노인.
그가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진파랑은 그를 내려다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이윽고 진파랑은 대표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꺼냈다.
진파랑 역시 고개를 숙였다.
백진호가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쯤 진파랑도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이 나라의 십이좌에요. 그런 제가 특정 단체의 이익을 지지하러 시위에 나설 수는 없어요. 그건…, 아, 뭐였더라. 아, 선녀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다는 뜻이니까요.”
“특정 단체의 이익이라니…. 자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특정 단체인가? 자네가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자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아인들의 지지도 있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자네를 지지해준 그들을 배신하겠다고?”
백진호가 호통쳤다.
진파랑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는 공인이었고, 선녀의 검이었다.
십이좌는 공적으로 존재해야 하지, 사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됐다.
또한 그는 판도라클랜의 이미지도 생각해야 했다.
“진파랑 플레이어. 아인의 권익을 신장시키려 한다면 자네가 이렇게 나와서는 안 되네. 자네의 입장도 내 감안하겠네. 그럼 에둘러서라도 우리를 지지한다고 말해주게.”
“죄송해요, 대표님.” “자네, 진짜 이럴 건가?”
이에 백진호가 한 발 양보했다.
그래도 진파랑의 뜻은 변함없었다.
진파랑을 구심점으로 내세운 다음 아인들의 지지를 끌어올린다.
백진호의 생각이 틀어진 것이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 많이 변했군. 전에는 그렇게 아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운동권에도 뛰어들고 그러더니….”
“…….”
“그때의 자네는 어디 갔나?”
백진호는 하다못해 파랑의 기억을 자극하려고 했다.
몇 년 전, 파랑이 전아연이 주도한 운동에 참여한 기억을 언급했다.
그것이 오히려 패착이었다.
“그때 이후로 많은 걸 배웠거든요.”
진파랑은 더욱 흔들리지 않았다.
그때, 자신은 실패했었다.
자신만 아니라 많은 아인들이 그때 실패를 겪고, 전아연에게 실망하지 않았던가.
결국 많은 아인들이 이상을 잃고 전아연에게서 등을 돌렸었다.
그러다 보니 전아연의 위세는 현재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남의 클랜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전아연 대표님.” “진서나 플레이어….”
“그리고 말은 바로해야죠. 파랑이 오빠가 아인들의 지지를 받은 덕에 십이좌가 된 건 맞아요. 근데 그게 전아연 덕분은 아니죠.” “전아연이 아인들의 대표 아닌가?”
“옛날이라면 먹혔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요즘에는 거의 유명무실해진 단체 아닌가요? 전아연을 포함해서 아인들의 이권을 위한 단체가 지금 몇 개나 있는데요.”
“자네도 전아연에 몸을 담갔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
“지금은 담고 있지 않으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죠. 지금은 아니에요. 저도, 파랑 오빠도, 리엘이도 대표님 단체랑 아무 관련도 없으니까 제발 저희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실래요?”
“…자네도 많이 변했군. 대기업의 직계가 되니 지난 삶이 생각이 나지 않는 모….”
“대표님이야말로 많이 변하셨네요.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진서나.
정하양의 일을 돕고 있던 그녀가 소식을 듣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키가 큰 백진호에게 당당히 말했다.
말에서 밀리지 않았다.
나아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데 저희랑 같은 세대에 있는 아인들은 대표님이 주도하시는 운동에 절대 참여하지 않을 거예요.”
진서나는 평소에 노인을 공경하는 그녀답지 않게 세게 나갔다.
백진호는 피식 웃었다.
“자네가 무슨 힘으로….”
“아카데미 인맥이면 말 다 했죠.”
“…….”
“그러니 돌아가세요, 얼른.”
“…아인은 뭉쳐야 하네. 자네들은 그걸 모르는군. 실망했네.”
현재 아인들의 사회는 여러 개의 파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전아연의 규모가 가장 크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전아연에 가입한 아인들 대다수는 30대 후반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반대로 젊은 세대에 속한 아인들은 규율이 자유로운 단체에 가입하거나 아예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서나를 비롯해, 진파랑, 아리엘을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파랑 오빠, 잘했어. 앞으로도 절대 저 사람들한테는 신경도 쓰지 마.”
“도와줘서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저 할아버지를 쫓느라고 힘들었을 거야.”
결국 이번 사태에서 아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 상태였다.
전아연을 따르며 운동에 참여하는 1세대의 아인들과.
진서나, 진파랑, 아리엘을 따르면서 침묵으로 대응하는 2세대 아인들로 말이다.
참고로 아인들은 세상이 멸망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등장했기에 아인들의 세대로 따지면 현재로서는 2세대까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외국인들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순수 한국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용산구, 중구에 와서 시위를 벌이며 외국인들을 자극했다.
외국인들이 사는 구역으로 들어와 그들을 욕한 것이다.
“너희 땅으로 물럿가라! 이놈들아! 너희 나라로 돌아가!!”
“이것들이….”
유치하고, 치졸한 발언들.
하지만 사람을 화가 나게 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그것이었다.
우르르 몰려온 운동가들은 그렇게 주거구역이 떠나가랴 외쳐댔다.
외국인들은 그들을 무시하면서도 점점 열이 받는 중이었다.
“그냥 총으로 쏴버릴까요? 아니면 저것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든지…. 지금 저것들이 집회도 허가 안 된 주거구역에 들어와서 난리를 치는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하지 마라. 가만히 있어. 판도라 클랜로드의 명령을 어기지 말고.”
한 외국인이 씩씩거렸다.
몇몇이 총기 슬라이드를 당겼다.
도미니크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는 팔을 뻗어 막았다.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았던 거냐. 우리가 먼저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여론은 우리 편을 들지 않을 거야. 너희 마음은 이해하지만 참아라.” “큭….”
도미니크가 사람들을 다독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옛날이었으면 혈기를 이기지 못해 운동가들에게 달려들었겠지만, 이제 어엿한 클랜로드가 된 그는 상황을 읽을 줄 알았다.
저 운동가들도 그것을 노리고 괜히 자신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리라.
“판도라 클랜로드와 아버지의 명을 절대 어기지 마라. 그냥 무시해버려. 어차피 놈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이 땅은 이제 우리 땅이니까.”
이내 도미니크는 피식 웃었다.
저 운동가들이 백날 떠들어봤자, 자신과 외국인들은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터였다.
판도라클랜이 창설되고 6년.
다시 말해, 판도라클랜이 용산구와 중구에서 외국인들의 활동을 보장한 시간이 6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역구 주민들은 이제 외국인들을 자신의 이웃처럼 반기고 있었다.
지금 저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우습게도 다른 지역구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도미니크는 다른 지역구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들이 터를 잡은 곳에서 운동가는 생기지 않으리라 믿었다.
오히려─.
“─야! 이것들아! 남의 동네 와서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동네 분위기 어수선하게 하지 말고 썩 꺼져!!”
“오, 세탁소 할머니가 나섰네요.”
“아, 요즘 애들이 세탁소의 소드 마스터라고 부르는 할머니시네.”
“저 할머니는 진짜 못말리겠네…. 얘들아! 혹시라도 할머니가 다치지 않도록 엄호해라!”
“”””네!!””””
양손에 방망이를 쥐고 날뛰고 있는 할머니를 비롯해.
움직이지 못하는 외국인을 대신해 지역구 주민들이 우르르 나섰다.
그들이 운동가들과 싸움을 벌였다.
“순수 한국인은 개뿔이! 이것들이 지금 나라 망신을 시키고 있어!”
도미니크가 예상한 것처럼.
용산구와 중구는 아인, 외국인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만큼 판도라클랜이 두 지역구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며, 아인과 외국인들이 그들에게 계속 도움이 되어왔다는 뜻이다.
결국 세탁소 할머니의 방망이질에 운동가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운동가들이 희망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커헉!! 아, 아인 놈이 날 팼다! 놈들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다!”
“우리 편이 공격당한다! 저놈들을 모두 패버려! 감히 인간 주제에!” “아인들이 몰려든다! 다들 싸워라!”
“인간들이 공격한다! 우리도 맞지 말고 싸우자!”
광화문 한복판에서.
서로 대치하기만 하던 운동가들과 아인들의 싸움이 불거졌다.
누가 원인을 자초했는지는 몰랐다.
어느 쪽이든 서로 상대편이 먼저 공격했다며 명분을 들먹였다.
결국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
최근 사회가 뒤숭숭하다.
운동가들이 판도라클랜을 찾아와 진파랑을 욕하는 시위를 벌이고는 했다.
불법 시위였고, 영업 방해였다.
그들은 경찰에 붙잡혀 끌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러 왔다.
저 사람들은 할 일도 없나?
왜 바보 오빠한테 뭐라 그러지?
하백련의 경호도 강화되었다.
하백련은 늘어난 호위사들과 함께 회관 1층을 지나쳤다.
클랜회관 밖에서 운동가들이 검은 두건으로 입을 가린 상태로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바보 오빠가 아무 데서나 옷을 휙휙 던지는 것만 빼면 나쁜 사람은 아닌데 너무해.
요새는 십이좌가 됐다면서 옷도 막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백련은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아인도, 외국인도 그녀 기준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었다.
구분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녀는 당장에라도 운동가들에게 뛰어가서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정치적인 문제에는 얽혀서는 안 됐다.
“백련아, 어디로 갈래?”
“3층 좀 눌러주세요. 카페에 가서 선녀님이 주신 과제나 하려고요.” “그래, 알았다.”
결국 하백련은 운동가들의 얼굴을 눈에 담지 않기로 했다.
3층 카페에서는 보이지 않으리라.
공백기는 그녀의 심정을 읽었는지 쓴웃음을 짓고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3층에 내린 그녀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어? 리엘 언니?”
“아! 하배기다! 나 보려고 왔구나? 내 자리로 와, 얼른!”
“언니는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요?”
클랜원들은 일하고 있을 시간.
하백련은 아리엘 혼자서 카페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했다.
그러자 아리엘이 헤헤 웃었다.
“원래는 미팅을 가려고 했지. 근데 밖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애들이 말린 거 있지? 난 갠춘한데….”
“아.”
아리엘이 다리를 흔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하백련은 곧 그녀의 사정을 알아차렸다.
최근 판도라클랜에 있는 아인들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서브로드들이 권고한 것이다.
운동가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엘도 일을 하지 못하고여기에 있는 것이다.
“잘됐다! 나랑 놀아주라!”
“과제 해야 하는데….”
“과제? 무슨 과제?”
“선녀님이 내주신 과제에요.” “오, 어렵겠다.”
“어렵지 않아요. 그냥 제가 나중에 선녀가 될 때 어떤 법안을 만들지 생각해보라고 한 거예요.”
“오, 그건 재미있겠는데? 나라면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마음껏 술을 만들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하는 법을 만들 것 같아! 그래야 맛있는 술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지!”
“음, 그건 하지 말아야겠다.”
“아, 뭐야? 내가 힌트를 줬는데도 그럼 어떡해? 미래의 선녀님! 제발 선녀가 되면 클랜 회식은 1주일에 1번씩 하도록 의무적으로 하는 법을 만들어주세요!”
“싫어요.”
아리엘이 하백련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가 애처럼 칭얼거렸다.
그러다 아리엘의 관심이 바뀌어선 하백련의 팔을 만지는 데 집중했다.
“팔 너무 부드러워!”
“언니, 너무 정신이 없…. 아.” “응? 뭐야? 뭐야? 왜 그래?”
“저 궁금한 게 하나 생겼어요.”
“뭔데? 뭔데? 뭔데? 말해봐!!”
아리엘에게 장난감 취급을 당하던 하백련이 문득 호기심이 솟았다.
그녀가 물었다.
“아인들은 학교에 못 가는 거예요?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저번에 아인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아, 그거? 학교에 갈 수는 있지. 못 가는 건 아니야. 앉으나서나랑, 빠랑이 오빠만 해도 학교에 갔는걸? 나는 학교는 안 갔지만.”
“왜요?”
“음….”
아리엘이 테이블에 엎드린다.
차가운 테이블에 볼을 비비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내 그녀가 에헤헤 웃으며 질문에 답했다.
“아인만 그런 건 아닌데…. 나처럼 빈민가에서 태어나거나 버려지면,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왕왕 있거든.”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몬스터들에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세상인데 인구 조사 같은 게 제대로 될 리 없잖아.”
“…그런 거예요?”
“그런 셈이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고도 몇 살이 지나야 주민등록번호를 만든다고 하더라고. 도중에 죽을 수 있고, 아니면 그냥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
“특히 나 같은 아인들은 태어나면 버려지는 일이 많으니까. 부모하고 유전 정보도 다르니 찾지도 못하지. 그런 사람들은 정부에 골칫거리가 아닐까?”
“왜요? 정부는 사람을 지켜….”
“우리 같은 애들을 거두어들인다면 손해가 막심하지 않을까? 세금으로 우리를 키운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반발하기도 할 테고. 그러니까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지.”
덤덤히 말하는 아리엘을 통해.
하백련은 아인들의 삶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다.
아인들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선녀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최대한 모른 척하고 있다고.
“주민등록번호는 동사무소에 가서 직접 만들어도 되잖아요.” “빈민가에 버려진 애들이 그런 걸 알까? 나는 10살이 돼서야 글자를 배우게 됐어. 그때까지는 배워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거든.”
“…….”
“그런 걸 만든다고 먹고 사는 것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나 다른 아인들은 만드는 법을 알아도 만들려고 하지 않았어. 그런 만큼 잃는 법도 꽤 많아지는 법이니까.”
“근데 언니는 지금 있잖아요.”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으니까.”
“…….”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응시하려면 내가 이 나라 사람이란 걸 증명할 수단이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그때 처음 딴 거야.”
“…….”
“아, 그래도 요즘에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 앉으나서나랑 빠랑 오빠 두 사람이 어린 아인들에게 후원을 해주고 있거든.”
호위사들의 보호를 받는 하백련은 전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백련은 아리엘이 태연하게 말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아, 근데 언니. 아까 취소했다는 미팅은 뭐예요?”
“아, 그거? 이번에 예능 프로에서 날 섭외한다고 하더라고! 조만간에 날 TV에서 보게 될지도 모를걸?”
“어떤 프로인데요?”
“음…. 이거 기획한 사람이 예전에 캐치 유어 플레이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사람이라는데 너도 알지?”
“그게 뭐예요?”
“와, 나 지금 세대 차이 느꼈어!”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아리엘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
한편, 그 시각.
보문동과 숭인동 사이 어딘가.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때는 미쳤었나 봅니다. 일이 이렇게 크게 번질 줄은 몰랐는데….”
은하, 이십오, 한창진.
세 사람은 골목길 사람들을 부려, 몇몇 사람들을 고문했다.
진파랑에게 달걀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사과 말고. 너희가 지금 몸을 담고 있는 단체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하라고.”
순수 한국인 클랜, PKK단.
그들은 진파랑을 십이좌 자리에서 사퇴시키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들의 주장은 점점 힘을 입으면서 여론이 되어가고 있었다.
은하로서는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특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진파랑의 안면에 달걀을 던졌다.
그것만으로 남자를 고문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주인님, 몇 번을 물어보았는데도 이놈들은 알고 있는 것이 없어요. 아무래도 PKK단에서 앞에 내세운 제물이었던 것 같아요.”
“후….”
그때 이십오가 고문을 마치고서는 은하에게 귀띔했다.
정보가 별로 없었다.
고문하고 있는 사람들은 잔챙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처리해야지.”
“사, 살려만 주, 커…어억….”
도움이 되지 않으면 처리할 뿐.
은하는 남자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러자 공포를 주입 당한 사람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킨다.
은하는 그들을 뒤로했다.
“대체 무슨 공포를 심은 거예요? 저놈들 표정이 가관인데….”
“별거 없어.”
“그래서 뭔데요? 저도 좀 압시다.”
“정말 별거 아니야.”
이십오가 추근거린다.
은하는 대충 대답해주었다.
정말 별거 없었다.
저들은 은하의 분이 풀리는 때까지 꿈속에서 강제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뽑아야 했다.
이후 그 눈을 공중에 던진다.
그리고 눈구멍으로 받아낸다.
눈은 제 자리를 찾는다.
다음에는 반대쪽 눈을 뽑는다.
다시 눈을 던져 받는다.
다음에도 계속, 계속, 계속….
그들은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정신이 망가지게 될 터였다.
“…그게 별거가 아니라고요?”
“꿈속에서만 하잖아.”
“…….”
“사람을 시켜서 저 사람들은 고이 집으로 보내줘. 오늘 있던 일들은 모두 기억하지 못할 테니 안심하고. 아마 정신을 차리게 되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을 것 같지만. 아니면….”
“아니면 뭐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하고, 이번에는 제 의지로 그 짓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지.”
“…….”
이십오는 혀를 내둘렀다.
그가 말을 아꼈다.
잘못했다가는 은하에게 맞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네, 주인님.”
“PKK단이라고 그랬나? 이것들이 세력을 부풀리는 속도가 너무 커. 뒤에 뭔가가 있어.”
“지금 애들을 풀어 추적 중입니다.”
“나도 같이 하자. 내가 직접 놈들 조직에 들어가 봐야겠어.” “…검은 두건을 구해오죠, 그럼.”
“얼굴만 바꾸면 안 되나?”
“걔네는 꼭 그걸 하고 다녀서요.”
“어쩔 수 없지. 창진 형. 형도 같이 들어갈 거지?”
“아니, 나는 따로 조사해볼게. 나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알았어. 그럼 형은 형 방식대로 알아봐 줬으면 해.”
이전 삶에서는 없었던 일.
단순한 나비 효과인 것인가.
은하는 무언가 찜찜했다.
대외적으로는 아인과 외국인들을 규탄하는 시위였지만─.
─이 운동으로 가장 피해를 입는 주체가 우리 클랜이야.
묘하게 판도라클랜을 저격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은하의 경험상, 지금까지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십오, 한창진을 대동하고 이렇게 조직을 추적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은하는 이십오하고 같이 PKK단에 잠입하기로 했다.
한편 한창진은 두 사람과 헤어져 독자적인 수색을 하기로 했다.
“내 감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창진은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은하가 말했던 것처럼 PKK단이란 민간단체가 이렇게 급속히 퍼진 게 의심스러웠다.
이것은 마치─.
─아니야, 그럴 리는 없을 거야.
뒤에 어둠이 있는 것 같다.
한창진은 애써 떠오르는 의심을 지우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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