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838
은하는 하백련을 임가을에게 보내, 최정훈과 독대하기로 했다.
하백련은 임가을을 만나러 가면서, 은하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은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겨요, 꼭.’
‘…그래, 고맙다.’
무엇으로부터 이기라는 것인지.
은하는 그녀의 엉뚱한 응원을 받고 피식 웃었다.
이내 하백련이 임가을과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최정훈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차기 선녀님은 잘 돌아가셨나?” “그래.” “앉아.”
방에는 최정훈밖에 없었다.
은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사이에 테이블을 두고서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은하는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설마 최정훈이 내가 회귀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줄이야….
사실 이제는 알 사람은 알리라.
특히 자신의 아내들은 짐작했을지 모를 일이다.
몇 년 동안 같이 생활하다 보면, 자신이나 노은아가 미래를 볼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만했다.
라는 상황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미래를 보는 방법은 몇 가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중에서 아내들이 자신의 회귀를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네가 말하고 싶어질 때 말하렴.’
‘나는 네가 소설에 빙의한 거래도 믿을 수 있어. 뭐가 됐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은하 너일 테니까.’
‘힘들면 언제든 말해줘. 부부란 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
그럼에도 한서현과 같은 아내들은 은하를 추궁하지 않았다.
한서현과 결혼한 것만 해도 벌써 7년이 지났다.
그런 상황에서 은하가 회귀했다는 사실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운명 공동체였다.
하지만 최정훈은 달랐다.
“너 말고 아는 사람은.”
“이제는 과감히 너라고 말하네.”
“네 말대로, 내가 인생 2회차라면 너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그러니까 말해.”
“그렇게 기를 세울 필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네 비밀을 알아차린 사람은 일단은 나밖에 없으니까.”
일단은.
은하는 미묘한 어감을 눈치챘다.
최정훈은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밝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착각하지 말라고.
가슴을 펴고서 소파에 기댄 그가 행동으로 말하는 듯했다.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뭔데.”
“여기까지 도달하느라고 힘들었지. 파악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었으니.”
“그래서 어떻게 알았는데.” “네가 서울 재앙에서 활약했을 때, 나는 네가 미래를 보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마나교의 반혼제 테러로, 네 기프트가 가 아니란 게 온 세상에 탄로가 났지. 그 이후, 너는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네 누나를 앞세웠고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나는 생각한 거야. 과연 노은아가 를 가지고 있나, 혹은 노은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의 발동 조건은 무엇이고, 효과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등.”
최정훈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이후로 풀어놓는 이야기는 도저히 범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판도라클랜이 기프트를 공시하고서 어언 5년.
최정훈은 5년간 노은아를 비롯해 은하의 주변 사람들이 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몇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한다.
내 생각대로, 역시 언론을 통해서 백련이 존재를 밝히려고 모의한 게 최정훈이었던 거였어.
아인 운동을 꾸몄던 것도 사실은 판도라클랜을 공격하려던 게 아닌, 내 주변 사람이 를 가지고 있는 걸 확인하기 위한 계략이었고.
은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동시에 화가 났다.
하백련을 건드렸기 때문이고.
자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애꿎은 클랜원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너희의 대처는 이상하게 한발 늦었었지. 진짜 미래를 알면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대처했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은하는 최대한 화를 억눌렀다.
이 자리에서 폭발할 수 없었다.
그것조차 최정훈이 바라는 것일 게 분명했다.
자신이 당황한 티를 드러낼수록, 최정훈은 이 관계에서 우위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은하는 속이 뻔히 보이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최정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미친놈….
듣다 보면 이야기는 기상천외함을 넘어섰다.
최정훈이 자신의 존재를 파헤치려 몇 년 동안 획책한 계략은 하나같이 그의 집념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것은 집착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광기였다.
은하는 점점 흥분한 어조로 말하는 최정훈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네가 회귀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
“나는 생각한 거다. 어떻게 하면, 미래가 자신의 것이라고 장담하는 회귀자에게 한 대 먹일 수 있을까.”
“그래서 이번 일을 꾸민 거라고?”
“그래, 이번에 계획한 일은 분명 내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만약 내 계획대로 네 허를 찌를 수 있었다면, 노은하 네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한서현이라는 변수 때문에 이렇게 지게 될 줄 몰랐지. 내 인생을 걸어 큰 도박을 치렀는데, 아무래도 나는 도박에는 연이 없던 것 같다.”
“내 허는 어떻게 찌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데.”
이야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최정훈은 모든 것을 소진한 듯이 손을 털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있던 술을 한껏 들이켰다.
그 모습은 마치 판돈을 걸어놓고 다 잃고 만 도박꾼과 같았다.
하지만 은하는 최정훈의 눈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박의 승패가 아니라 어떻게 이번 판을 꾸리게 된 것인지 묻기로 했다.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목소리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네가 회귀했다는 걸 가정했을 때, 나는 네가 걸어온 인생을 돌아봤다. 내가 만약 회귀를 한다면 두 번째는 어떤 인생을 살까 생각을 해봤는데, 나오는 대답은 뻔했지. 저번 삶보다 더 성공한 삶을 살겠다.” “…….”
“그렇게 생각하며 네가 지금까지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일을 보면, 얼추 그림이 그려지더라고. 반대로 생각해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반대로 생각했다라…. 말해봐.”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노은하 넌 이상하게도 나를 경계하고, 적의를 품고 있었지.”
“그런데?”
“그런데 네가 회귀했다는 관점에서 나를 파악한 것이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였다. 아마도 이전 삶에서 나는 네 적 중 한 명이었을 테지. 맞냐?”
“…그래.”
은하는 순순히 인정했다.
최정훈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전 삶의 나는 바보같이 회귀할 수 있는 사람을 적으로 돌렸었다는 소리군.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읊조렸다.
“내가 최대의 적이란 걸 가정하고, 네가 걸어온 행보로 판단했을 때. 이전 삶의 상황은 정반대였을 거다. 선녀정부는 거듭된 재앙으로 인해 권위가 떨어졌을 테고, 그 틈을 타 재계그룹들과 권력의 향방에 민감한 사람들이 정부를 압박했겠지.”
“…….”
“선녀는 마냥 무능한 게 아니야. 다만 운이 없었을 뿐이지. 그렇기에 제 욕심을 더 우선하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신념이 있고, 다루기 어려운 임가을은 성가신 존재였겠지.”
“…….”
“그런데 하백련이 나타났다. 그럼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 간단해. 선녀를 내쫓은 뒤, 하백련을 선녀로 만들면 될 일이야. 간신 모리배들은 그 애를 입맛대로 주물러, 정국을 지배할 거고. 맞나?”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래, 내 가정이 맞다니 다행이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너는 분명히 하백련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 지금의 너는 하백련 그 아이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마 나는 너하고 정반대되는 입장을 보였겠고. 그럼 회귀 전에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대체로 감이 잡히더군.”
최정훈이 말을 끊었다.
그가 은하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은하는 건배하지 않았다.
최정훈은 혼자 은하의 잔을 치고, 술을 들이켰다.
그가 잔을 탁 내려놓았다.
시선이 흉흉했다.
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 애를 앞세워서는 이 나라의 모든 경제를 틀어잡으려고 했겠지. 이전 삶에서 나는 내 염원을 이뤘던 거야. 맞나?” “…그래.”
“이전 삶의 나는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놈을 적으로 돌려버렸지만, 그래도 화끈하게 저질렀군. 그래서 네가 나를 경계하고, 괜히 적의를 보여왔던 거야.”
“…….”
“그렇다면 이번 일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어. 반대로 뒤집으면 되니까.” “…….”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고, 너와 재계그룹의 관계를 떠올렸다. 너는 정략결혼으로 시리우스그룹과 앨리스, 루미너스와 인연을 맺었지. 그건 다시 말해, 회귀 전에 그들이 높은 확률로 네 편이 아니었었다는 뜻일 거야. 정부의 권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10대 재계 그룹이 과연 정부의 편을 들까도 의문이고.”
“…….”
“그런 관점에서 회귀 전에 회의가 어떻게 진행됐을지 생각해보았는데, 뻔하더라고. 나는 당연히 민간에서 철도를 운영해야 한다고 했을 테고, 나와 같은 부류인 한서연도 그렇게 말했을 게 분명하지. 영원그룹은…, 그쪽은 워낙 상황이 복잡해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겠군. 이전 삶에서도 유도준이 그룹의 회장이었나?”
“그래, 유도준이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회장이 됐었지. 근데 내가 정략을 위해 애들이랑 결혼한 것은 아니거든.” “그렇다는 건 유도준이 명왕클랜을 완전히 자신의 칼로 거두었던 일과 신인류 프로젝트를 밝혔던 일도…, 이전 삶에서도 유도준이 해낸 거라 할 수가 있겠군. 그놈도 난놈이야. 정략결혼은…. 그러면 우연에 의한 행운인 건가? 운을 타고났군.”
거짓말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최정훈은 은하의 약점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은하는 그저 최정훈이 푼 문제를 순순히 채점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정훈이 눈빛을 번뜩이며 자신이 상상한, 회귀 전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이놈을 어떻게 하면 좋지.
은하 역시 미래를 생각했다.
최정훈은 위험한 존재가 됐다.
이 나라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 최대한 그를 억눌러왔던 것이 되레 칼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어쨌든 나머지 그룹들도 회의에서 내 뜻에 찬동했을 거다. 기껏해야 정부에 찬동하는 그룹은…. 하나도 없었겠군.”
“아니, 유도준은 손을 들어줬거든.”
“…유도준이? 그건 의외네. 그놈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지는 승부는 하지 않을 텐데. 아니지…, 어차피 우리가 이길 걸 알았을 테니 그렇게 행동한 건가. 철도는 결국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니 영원에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겠고, 이자를 얻을 생각을 했겠지. 그런 한편으로 선녀정부에 호의를 사고….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기업과 정부, 양측에다 발을 걸쳐 놓은 건가?”
“…….”
“이야기로 돌아가면 유도준 같은 예외를 두고, 정부의 편에 서려는 그룹은 없었을 거다. 철도 부설은 재계그룹이 확실하게 가져갔겠지.” “그래.”
“그런 상황에서 아마 몇몇 그룹은 유도준처럼 생각했을 거다. 남들이 알아서 내 이익을 챙겨주는데, 굳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내 입장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
“그렇다면 파인그룹은 기권을 하며 중립의 입장을 취하려고 했을 거야. 네가 지금까지 다른 그룹 사람들을 만난 것과 달리 이상하게 파인하고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겠지. 파인그룹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중립의 위치에 서서 정부하고 재계그룹의 알력관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
“그게 네 패인이었던 거다. 파인은 그런 입장을 취하며 이익을 누려온 그룹이다. 중립을 지켰었던 이유는 그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으니까. 근데 이번 삶은 어떻지? 너로 인해, 원래라면 철도 부설을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모았을 그룹들이 나뉘고, 너와 내가 양분하는 상황이 됐다. 그동안 네 손을 타지 않은 파인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간단한 거다.
기업은 이익을 좇는다.
파인그룹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어느 한쪽이 막대한 이익을 누리게 될 것을 파악했다.
그때, 최정훈은 그 이익을 미끼로 파인그룹을 회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최정훈의 ‘회귀자 죽이기’ 작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패배했지. 너한테 패배한 것이 아니라, 네 아내한테 패배한 것이지만 패배했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아.”
최정훈의 말대로였다.
은하도 인정했다.
만약 한서현이 없었다면, 자신은 최정훈의 계책에 말려들어서 지고 말았을 것이다.
최정훈은 자신에게 집중한 나머지, 한서현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은하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모처럼 얻은 내 약점을,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가 뭔데.”
최정훈은 분명 패배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몰랐다.
첫 패배일 뿐이었다.
최정훈이라면 다음에는 한서현의 행동까지 가능성에 두고서 계책을 짤 것이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비밀.
그것은 최정훈에게 무기였다.
그런데 최정훈은 그 무기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이렇게 대놓고 털어놓은 것이다.
은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이번 기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고.”
“…….” “내가 만약 이 도박에서 이겼다면, 나는 회귀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거야. 회귀자를 상대로도 얼마든지 의표를 찌를 수 있는 계책을 만들면 되는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비록 그것이 변수에 의했다 한들, 회귀자를 꺾겠다는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최정훈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쯤 은하도 최정훈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근본적인 오류인 셈이지. 왜 내가 너와 적대해야 하지?”
“…….”
“회귀자라는 말도 안 되는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거지? 그렇게 해서 이길 거라는 가능성도 턱없이 낮은데. 그건….” “비효율적인 짓이지.”
“그래, 생각이 일치했네.”
은하가 떠올린 생각처럼.
최정훈은 의문을 표했다.
이 자리는 서로가 적대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최정훈은,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독대를 요청한 거다.
은하는 그제야 테이블에 놓인 잔에 손을 뻗었다.
술을 따랐다.
최정훈이 잔을 내밀었다.
“너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힘과 권력을 손에 넣었어. 지금까지 나를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거야.”
“그래, 맞아.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죽일 수 있어.”
“그런데도 나를 죽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나는 마냥 배제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닌 견제해야 할 대상이란 뜻이겠지. 즉, 너는 나한테 무언가 얻을 게 있다고 판단한 거야.” “…….”
정답이었다.
최정훈은 너무 유능해서 위험하나, 하백련의 치세에 필요한 인재였다.
그래서 은하는 최정훈을 섣부르게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은하는 표정을 유지해서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쉬운 건 내가 아니야.
그건 최정훈이지.
은하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갑과 을.
갑은 최정훈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최정훈이 지금 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나는 이렇게 유능하다.
네 적이 될 생각은 없다.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열심히 애원하고 있는 거야.
최정훈이 조금 전 꺼낸 말처럼.
은하는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비밀을 눈치챈 최정훈을 내버려두는 것은 언젠가 화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화근을 잘라내야 했다.
비록 최정훈이란 인재를 잃게 되는 손해를 겪고 말겠지만, 미래를 바꿀 변수 자체를 차단할 수 있었다.
은하의 그런 성정을 알고 있기에, 최정훈은 비밀을 이용하는 게 아닌,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새 관계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이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어. 뭣하면, 나는 2인자 자리에라도 만족하지.”
“나는 그럴 생각 같은 건 없어.”
“그렇다면 선녀정부가 이 나라를 완벽하게 장악하기를 원하는 건가? 아니지, 네 곁에 하백련이 있으니…. 그 아이가 장차 선녀가 될 경우에, 그 아이의 권위를 해칠 만한 것들을 배제하고 싶은 거구나.” “그래, 맞아.”
“그 다음은…, 아직 모르겠고.”
“…….”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나는 널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내 야망은 포기하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해도, 선녀 바로 아래에서 만족할게. 그럼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최정훈이 내민 잔은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자신과 동맹을 맺자는 뜻이다.
팅
은하는 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그러자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그가 술을 단숨에 삼켰다.
은하 역시 단숨에 삼켰다.
그리고─.
“─제안은 받아들이겠는데, 그래도 너를 믿지는 못하겠다.”
은하는 그때야 비로소 최정훈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심했다.
☆
최정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은하가 27년의 인생을 살면서도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한 난제였다.
최정훈이라는 인재의 유용성.
그리고 위험성.
그는 은하에게 복잡한 존재였다.
홍진우처럼 죽이더라도 상관없는 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사람으로 삼을 수도 없어.
살해, 협박.
설득, 회유.
어느 것이든 최정훈이라는 존재를 해결할 방안이 되지 못했다.
물론, 은하는 사람을 세뇌시키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스티지안 아이는 안 돼.
최정훈의 정신이 붕괴할 거야.
최정훈을 일회성으로 사용할 거면 세뇌마법을 사용해도 문제없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시리우스그룹의 유일한 대항마였다.
한서연 독주 체제를 견제할 사람을 한 번만 쓰고 버릴 수는 없었다.
하백련이 이 나라를 다스리려면, 최정훈, 한서연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동안 줄곧 고민했는데─.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다르지.
네가 나한테 네 속을 털어놓았듯, 나도 그냥 털어놓으면 돼.
그냥 막 나가면 되는 거라고.
이전과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최정훈을 세뇌시키는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제 은하는 그것을 대체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세뇌가 아니라─.
“─나중에 배신할지도 모를 일인데 어떻게 믿으라고? 그러니까 너한테 제약을 걸게.”
“제약?”
제약을 건다.
최정훈의 속마음이 어떠하든 일단 그는 현재 시점에서 자신과 동맹을 맺을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게, 아니, 유지할 수밖에 없게끔 제약을 거는 것이다.
은하는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웜 홀
공간을 다루는 마법.
은하는 파문이 이는 허공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그 순간, 최정훈의 안색이 돌변해, 그가 소파에 쓰러졌다.
가슴을 부여잡는다.
은하는 그를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다시 손을 휘저었다.
웜 홀
또 다른 공간에 파문이 일었다.
파문이 갈라졌다.
은하는 파문을 크게 벌렸다.
소파 위로 쓰러진 최정훈이 보도록 공간을 이동시켰다.
“이거, 보이지?”
“…….”
은하가 허공 속에 집어넣은 손.
그 손이 갈라진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최정훈은 그저 가슴을 움켜쥔 채로 공간을 쳐다보기만 했다.
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쿵쿵
시뻘건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박동하며,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최정훈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
“네 심장이야.”
제법 컨트롤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은하는 공간을 최정훈의 몸속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최정훈의 심정을 톡톡 건드리며 키득거렸다.
“넌, 대체….”
“왜? 네 머리로도 이해가 안 가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
“…….”
“인생을 두 번 사니까 되더라고.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작정하면 이제는 네 심장을 움켜쥘 수 있어. 이렇게.”
“…크윽…!”
심장이 터지지 않도록.
그러나 몸에 부담이 되도록.
은하는 심장을 살며시 쥐었다.
최정훈은 그것만으로도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정신적 충격이 더 크리라.
눈앞에서 심장을 보여주는데, 과연 어느 누가 평정심으로 바라볼 수가 있겠어.
기린아도 공포는 어찌할 수 없다.
은하는 세뇌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정훈이 공포에 떨게 했다는 것에 환희를 느꼈다.
“나는 이제부터 네 심장에 제약을 하나 걸 거야. 깡아.”
“깡!”
은하는 깡이를 불렀다.
다리 옆에 앉아 있던 깡이가 즉각 그의 바람에 응했다.
깡이가 힘을 빌려주었다.
웜 홀에 깡이의 힘까지…. 두 개의 힘을 더하면 지금까지 못한 행동도 할 수 있어.
깡이의 능력은 단순히 전격 속성을 부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닭이가 화염을 기본으로 정화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듯, 깡이 역시 전격 속성에서 파생된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속박이다.
다른 말로는 구속.
그리고 제약.
촤르륵!
깡이가 쇠사슬이 되어 은하의 손에 치렁치렁 얽혔다.
은하가 쇠사슬을 움직여, 갈라진 공간 속으로 들여보냈다.
쇠사슬이 최정훈의 심장을 감쌌다.
이내 쇠사슬이 녹아내렸다.
“커헉…! 지, 지금 뭘….” “걱정하지 마. 물리적인 건 아니니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을 거야.”
“이게, 뭐냐….”
“제약이지.”
“…….”
“네가 만약 백련이를 적대한다면, 쇠사슬이 네 심장을 터뜨릴 거야. 그렇게 해서 죽더라도 어느 누구도 네 죽음의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고. 아, 내 비밀도 말하면 알지?”
“…하백련을 적대하면, 이라고?”
“그래, 마법으로 제약도 걸었으니 네가 뒤에서 통수를 칠 일은 아마 없겠지.” “…….” “그럼에도 너라면 허점을 발견해서 기회를 엿보려고 할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은하가 티슈를 뽑았다.
손이 피로 묻어 있었다.
최정훈의 피였다.
은하는 대충 티슈로 피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네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내가 판단하게 되면 내가 언제든지 심장을 터뜨릴 수 있으니까. 이미 네 심장의 좌표는 입력해놨어.”
“…터무니없는 짓이군. 이게 정말 동맹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
“네가 나하고 동맹을 맺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네가 나한테, 그냥 굴종하는 거야.”
최정훈과 동맹을 맺는다고?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은하는 최정훈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기에, 은하는 고민 끝에 그를 굴종시키기로 한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제야 속이 편하네. 그동안 너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왔었는데, 네가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덕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어. 고맙다.” “…노은하.”
“나는 간다. 앞으로 잘해보자.” “내가 가만히 당할 것 같냐?” “네가 가만히 당할 리는 없겠지.”
“그래, 지금은 네게 굴종하겠지만 언젠가 나는 방법을 찾고 말 거다.”
“너라면 그러겠지. 그날을 꿈꾸며 반항하지 말고 굴종이나 하고 있어. 네가 백련이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도 간섭할 생각은 없으니까.”
은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최정훈은 언젠가 방법을 찾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나는 더 강해져 있겠지.
그럼 그때 가서 더 강한 제약을 걸어주면 되는 거야.
아니, 그때는 제약을 걸 필요 없이 죽여버리면 된다.
그만큼 골치 아픈 녀석은 차라리 필요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너는 정말 오만하구나.”
“오만을 빼면 내가 아니거든. 근데 근거 있는 오만은 확신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알아서 기어라.”
문을 나서는 은하를 보며.
최정훈이 그렇게 평했다.
은하는 코웃음을 쳤다.
패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존재는 그만한 힘을 지닌 패자뿐이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