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854
인천광역시 부평구.
레귤러스클랜과 부평구의 클랜들은 마스테마를 기어코 쓰러뜨렸다.
“후, 겨우겨우 제압했네. 아공간을 사용하는 게 제법 까다롭긴 했지만, 혜림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레귤러스 클랜로드 구연수.
그는 몸이 걸레짝이 되어 쓰러진 마스테마에게 다가갔다.
박혜림도 그를 따라갔다.
마스테마는 세뇌마법과 공간마법에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그녀는 여전히 놈을 경계했다.
“내 계산 착오군. 네가 아공간을 통제해낼 줄 몰랐다. 거기에서부터 내 계획이 완전히 뒤틀어졌어. 과연 20년이 넘도록 십이좌로 있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구나.”
마스테마가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마스테마의 말과 다르게, 박혜림 역시 큰 부상을 입었다.
마나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 이상 무리한다면 마나 폭주를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연하죠. 제가 괜히 라고 불리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박혜림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강한 척했다.
마스테마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좋은 싸움이었다. 앞으로 너희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이제 그만 죽여라.”
마스테마는 테러리스트 치고 꽤나 희한한 마인이었다.
신사적이고, 적의 영광을 빈다.
구연수와 박혜림은 마스테마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마인이었다.
죽여야 하는 마인.
구룡류(九龍流)
장대비
구연수가 검을 들었다.
마스테마를 향해 검을 내리찍는다.
검에 찔린 녀석은 편안한 얼굴로 마나가 되어 소멸했다.
“이게 영혼석이라는 건가 보네요.”
마스테마가 소멸한 자리.
박혜림은 그곳에서 조그만 구슬을 발견했다.
영혼석이었다.
구연수는 영혼석을 확인하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스테마가 정말 소멸한 것이다.
“얼른 마나관리기구에 알려 녀석이 소멸했다는 소식을 알려야지. 지금 다른 마인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어?” “방금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아바돈, 사마엘, 벨제뷔트가 토벌됐다고 합니다.”
구연수는 다른 전장의 현황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때, 신시아 네비게이터가 말했다.
아바돈, 사마엘, 벨제뷔트.
마스테마까지 더하면 칠마 중에서 절반이 토벌된 것이다.
다만 아직 토벌되지 않은 마인들이 골칫거리였다.
마스테마를 상대한 것으로 이만한 피해가 나왔을 정도다.
“아.” “왜 그래?”
그러던 그때였다.
신시아가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연수는 상황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 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
“아마겟돈과 싸우다 그만….”
살아있는 신화, 의 패배.
충격적인 소식에 사람들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벙쪘다.
” 님께서 가셨다니….”
구연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겟돈이 얼마나 강하면 세상에 살아있는 신화를 이긴다는 말인가.
두려움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자신이 클랜원들처럼 침울해져서는 안 됐다.
“속히 마나관리기구로 복귀한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예스!!””””
“느낌상 테러가 오늘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네.”
구연수는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클랜원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
부상자들에게 고된 여정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
한편 박혜림은 영혼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영혼석.
그녀는 영혼석의 빛을 내다보면서 나직이 읊조렸다.
“이게 마스테마의 영혼석인 건가. 생각보다 영혼석의 빛이 약하네.”
☆
서울 서초구.
일대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마치 약에 취해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던지며, 눈이 맞는 이성과 몸을 부대낀다.
“벌건 대낮에 대로변에서 낯뜨거운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저속한 것들. 하지만 너희에게는 그런 게 어울려. 개돼지나 다를 바 없는 꼴이.”
“큭….”
“그래서 어떠니? 아끼는 사람들이 욕망에 눈이 회까닥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하앙, 릴리스 님!!”
“저희에게 한 번만…!!”
“닥쳐, 개돼지들아.”
릴리스의 마법에 현혹된 사람들.
일반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법은 너무나 강력했다.
사람들은 마나 저항이 낮아진 순간 마법에 걸려들고는 했다.
그 결과, 서초구의 플레이어들과 동해 클랜원들도 말려들고 말았다.
동해 클랜로드 김성민.
그는 자신의 클랜원들이 제멋대로 무장을 해제하고 개처럼 릴리스에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치를 떨었다.
“아무래도 내 승리인 것 같은데. 클랜원들도 얼마 남지 않은 너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
“그러니 너희에게 기회를 줄게.”
또각또각.
릴리스가 도도한 얼굴을 하고서는 김성민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꿇으렴, 나한테.” “…….”
“제발 물러나 달라고, 꿇으라고.”
릴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성민의 시선도 주위를 훑었다.
눈물을 흘리며 정욕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눈에 힘이 풀린 클랜원들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차마 바라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한편으로 현실은 잔혹했다.
자신과 남아 있는 클랜원들의 힘은 릴리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싸워봤자 주변에 피해를 늘릴 뿐, 개죽음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꿇으렴. 무릎을 꿇고서, 구두에 입을 맞추라고. 내가 그럼 너까지만 건들고 물러나줄게.”
그렇기에 그에게 릴리스의 제안은 대단히 달콤하게 들렸다.
달콤한 유혹이다.
김성민은 결국 검을 놓았다.
릴리스가 깔깔거린다.
그는 바닥에 엎드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뭐?”
릴리스가 돌연 얼굴을 구겼다.
무언가 연락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그녀가 허공에 대고 뭐라 말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네. S급 클랜로드가 내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철수 명령이 떨어졌네.”
릴리스는 아쉬움을 표했다.
그녀는 등 뒤에서 나타난 아공간에 몸을 맡겼다.
“그럼 개돼지들아. 나를 생각하며 혼자 잘 위로하고 있으렴. 또 보자.”
릴리스가 사라졌다.
김성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 이내 정신이 깨어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옷! 누, 누가 옷을…!!”
“당신 누구야! 누군데 나한테…!!”
“헤헤헤헤헤헤….”
거리는 혼란에 휩싸였다.
마법에서 풀려난 사람들.
풀려났지만 아직 몽롱한 사람들.
그들이 뒤섞여 소동을 벌였다.
곳곳에서 비명과 울음이 퍼졌다.
이성을 찾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절망했다.
그러고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정신을 놓았다.
릴리스가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간 것이다.
☆
경기도 구리시.
마몬을 상대하는 블레이즈클랜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쳇, 저게 진짜….”
십이좌 강현철.
그는 혀를 찼다.
마몬은 야비하기 그지없었다.
구리시를 판데모니움으로 개조한 마몬은 데몬 계열 몬스터를 내보내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마몬이 일을 벌이고 나서 뒤늦게 구리시에 도착한 강현철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몬스터들을 먼저 상대해야 했다.
그렇게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곧장 판데모니움 최상층으로 향했더니─.
“─안녕, 잘 왔어! 그럼 안녕하고! 나는 다른 판데모니움으로 떠날게! 잘 있어!!”
“또냐, 씨바아아아알!!”
마몬은 플레이어들을 농락하고서는 옆에 있는 판데모니움으로 떠났다.
결국 플레이어들은 새로 만들어진 판데모니움을 공략해야 했다.
“젠장….”
그래도 강현철은 어찌어찌 마몬을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판데모니움을 몇 번이고 공략한 걸로 인해 빠르게 체력이 바닥이 나고 있었다.
강현철은 마몬의 어깨를 베어내고 이제는 감출 수 없다는 듯이 숨을 크게 헐떡였다.
“네가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할게. 하지만 사람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지금 그 몸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마몬이 낄낄거렸다.
강현철은 불길을 일으켰다.
“그건 해봐야 아는 법이지.”
“진짜 끈질기군.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었다고? 이래서 내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포기를 모르고 어떻게든 지푸라기를 잡으려 하지. 절망 속에 있으면 얌전히 있어야지, 왜 바보같이 희망을 잡으려고 할까. 합리적이지 못한 놈들이라…컥…!!”
있는 힘을 다해.
강현철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그게 인간이라는 거다, 몬스터야. 너네 엄마가 널 낳다가 포기했으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인간을 포기한 거야.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던 세상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X같겠어.”
“닥치고, 더 X 같은 게 뭔지 내가 똑똑히 보여주마.”
지쳐도 지치지 않는 남자.
자신이 지칠 때는 심장 속에 맺힌 불꽃이 꺼질 때뿐이다.
강현철은 그런 존재였다.
그가 불길을 거세게 내뿜었다.
☆
황진희가 산화했다.
그녀는 은하가 어둠 속에 설 만한 작은 세계를 남겨주고 마나가 되어 사라졌다.
화륵!
그녀가 사라진 것으로.
은하가 서 있던 세계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은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가 남겨준 신화의 힘을 더듬어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다.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세계.
좁디 좁은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닫히려는 문을 애써 붙잡는다.
허나 열쇠도 없이 억지로 연 문이 닫히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신화의 문이 닫힌다.
은하의 세계가 침식당한다.
아마겟돈의 신화에 삼켜진다.
바로 그때였다.
“쿨럭…!! 진희, 네가…. 내 신화에 기어코 금을 냈구나.”
아마겟돈이 각혈했다.
그가 검은 마나와 피를 토해내고, 검게 물들어가던 세계가 그에게로 돌아간다.
신화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자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거대한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지킨 은하는 갑자기 압박감이 사라지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내디딘 발에 힘을 주었다.
몸을 지탱했다.
그것만으로도 은하는 격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발이 무언가에 꿰뚫린 듯한 느낌.
반동이 찾아온 몸으로 신화의 문을 억지로 열어버리니 더 심한 반동이 찾아온 것이다.
한편으로 은하는 조금 전 전투에서 를 돕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자신을 자책했다.
와 아마겟돈의 전투.
은하는 신의 경지에 오른 그들에게 끼어들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먼지처럼 작게 느껴졌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에 휩쓸리는 걸 간신히 막은 것이 전부였다.
“이런, 나도 힘을 너무 써버렸구나. 신인류의 몸으로도 신화의 대가를 감당해야 한다니, 정말로 얄궂구나. 진짜 신이 되지 않고서는 이 대가를 피할 수 없는 건지, 쯧….”
그럼에도 은하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모두 끝난다.
그 일념이 그를 서 있게 했다.
아마겟돈은 그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내 비록 대가를 치른 만큼 얻은 것도 그보다 못지않지. 그래, 이를테면 말이다─.”
아마겟돈이 기세를 발했다.
그가 검은 마나를 체외로 내뿜어, 아주 작은 범위로 신화를 현현했다.
─신화 현현
악의 종언
검은 마나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어떤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도복을 입은 여인.
황진희였다.
“…….”
은하는 그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마겟돈이 더 강해졌다.
“모든 죽은 존재는 내가 자유로이 다룰 수 있지. 특히 내 신화에 죽은 라면 더 자유롭게 다룰 수가 있는 것이고.”
“…….”
“안 됐구나, 꼬마야.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절망을 마주하게 됐구나. 그래, 나는 너의 절망이다.”
“…….”
“이길 수 있겠느냐? 나 역시 지금 힘을 많이 소모하기는 했지만, 너를 상대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아마겟돈이 세계를 확장한다.
세계를 확장하는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은하는 놈에게서 뻗어 나온 세계를 몰아낼 힘을 꺼내지 못했다.
힘이 다했다.
마나를 발현할 수도 없다.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의 몸 밖에는 없었다.
“호오.”
“윽….”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비록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은하는 아마겟돈의 세계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아마겟돈의 입가가 벌어졌다.
그가 깨진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번뜩였다.
“조금 놀랍구나. 어떻게 내 세계에 멀쩡히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이냐. 네가 신화를 현현하지 않는다면…. 혹시 그 몸이 원인인가?”
“…….”
“신화에 견딜 수 있는 몸이라….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그 상태로 내 신화를 견뎌내고 있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심장이 고통을 호소한다.
기프트가 발동된다.
그 기프트가 은하를 지킨다.
은하는 고통을 억누르며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내 신화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건 죽은 존재뿐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신화를 현현하지 않고 나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지. 즉─.”
한편 아마겟돈은 가만히 추리했다.
그가 결론을 도출했다.
“─너는 이미 한 번 죽은 존재와 다름없는 거로구나. 예경에게 한 번 빈사 상태가 돼서 그런 건가? 아니, 그건 죽은 상태가 아닌데…. 대관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구나.” “…….”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너를 죽여,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아갈 테니.”
“누가, 그렇게 둘….”
“너는 열심히 했다. 잘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구나. 이제 그만 네 패배를 받아들이고 쉬어라.”
황진희가 걸어 나온다.
그녀가 은하에게 검을 겨눈다.
바로 그때였다.
──!!
어둠이 소스라치며 달아난다.
백은의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세상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호오, 별일이군.”
구덩이 위에서 내려오는 여성.
그녀가 자신의 기프트를 사용해서 신화를 편산시킨 것이다.
“선녀가 웬일로 이런 곳에 오다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구나.”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국가 원수도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선녀 임가을.
그녀가 은하를 지키듯 나섰다.
☆
“국가의 수장이 스스로 찾아오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마음을 바꿔서 내게 굴복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냐.”
“안 됐지만, 둘 다 아니에요. 저는 님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던 판도라 클랜로드를 지키려고 왔을 뿐이에요.”
임가을이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지원군들이 도착했다.
그들 중 몇몇이 구덩이로 내려와, 그녀를 호위했다.
그녀는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며, 아마겟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마겟돈이 물었다.
“저 아이를? 이제는 다 죽어가는 아이가 뭘 어떻게 할 것 같으냐?”
“네, 저는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님이 생각이 있으셔서 이리 지키려고 한 거겠죠. 그러니 저는 판도라 클랜로드가 이렇게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네요.”
“그래서 몸소 찾아왔다? 그러다가 내 손에 죽을 수도 있는데?”
“물론, 그럴 수야 있겠죠. 하지만 여기에서 제가 당신에게 죽는다면 그림이 멋 없어지지 않을까요?”
임가을이 싱긋 웃었다.
두려움은 찾을 수 없는 얼굴.
아마겟돈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직후 그녀의 말을 듣고 흠칫했다.
“당신의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건 공포가 아닌가요? 그런데 국가의 수장인 제가 여기서 당신 손에 죽게 된다면, 국민들이 과연 무서워하기만 할까요?”
“…….”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겠죠. 허나, 제 죽음이 폭동의 계기가 될는지도 모를 일이죠. 공포에 질린 사람은 때로는 자신의 안위마저 내던지고 공포와 싸우려고 하는 법이니까요.”
“공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위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군. 그래, 맞는 말이구나. 아마 그림이 좋지 않겠지. 내가 원하는 것 역시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닌, 네가 내게 굴복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쯤에서 물러나세요. 오늘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 것이 아닌가요? 반대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죠.”
“흠…. 하지만 너를 죽이지 않고, 내 목적을 실행하면 그만이지. 내가 거래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당신도 힘을 많이 소모했을 텐데, 몸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의 동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겟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무언가를 눈치챈 것이다.
이에 임가을이 알려주었다.
“조금 전 사마엘, 벨제뷔트, 마스테마가 토벌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릴리스, 마몬이 문제기는 하더라도 병력을 더 투입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 테죠.” “…그렇군. 전투에 집중한 사이에 세 명이나 죽고 만 건가.” “네, 당신들의 피해도 상당하니까 이쯤에서 물러나라는 거예요. 서로 한쪽이 아예 없어지는 소모전을 하고 싶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임가을이 아마겟돈을 설득한다.
아마겟돈이 거의 넘어왔다.
하지만 놈은 중요한 부분에서 결코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꼬마를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감히 나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선녀여, 네 기프트는 분명히 내게 위협적이지만 전투가 불가능한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렇겠죠.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저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노릴 수 있겠죠.”
“그러니 같이 온 인간들을 데리고 물러나거라. 나는 저 꼬마를 죽이고, 저놈의 자식을 데려갈 것이다.”
아마겟돈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임가을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쯤 은하는 그녀를 지나쳐서는 아마겟돈과 싸우려고 했다.
노유성을 데려갈 것이라는 대목이 그의 마음을 자극한 것이다.
“선녀님, 비키세요. 저 녀석은 제가 상대할 테니, 대신 선녀님은 유….”
“아니요. 가만히 있어요.”
그때 임가을이 팔을 펼쳤다.
그녀가 은하의 진로를 방해했다.
은하는 걸음을 멈췄다.
임가을은 은하를 돌아보지 않고, 아마겟돈을 보며 질문했다.
“정말 그게 원하는 건가요?”
“뭐?” “싸우지도 못하는 판도라 클랜로드를 이렇게 죽이는 게 당신이 원하는 일이냐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
“당신은 공포를 원한다고 말했죠. 그리고 당신은 님을 이겨, 사람들 의식 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 것이라고 말했고요.”
“…….”
“그래서 계획이 성공했나요? 과연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당신을 이길 사람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할까요? 과연─.”
임가을은 전직 여배우였다.
과거, 그녀는 연기하는 게 좋았고, 무대에 나서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따라서 그녀는 아마겟돈의 생각을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겟돈은, 관심을 원한다.
“─오늘 무대가 당신이 만족하는 무대였던가요? 님께 승리한 무대가 최고의 무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나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기에 임가을은 아마겟돈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백은의 마나로 아마겟돈의 위압감을 떨쳐내며 선언했다.
“제가 그보다 더 멋진 무대를 준비해드리죠.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될 무대를 말이에요.” “……!!”
“그게 당신이 바라는 일 아닌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일이요. 이런, 같잖은 테러나 벌이는 것이 아니라요.”
“흠, 제법 끌리는 이야기구나. 한데 그 무대를 어떻게 준비할 셈이지? 내가 테러를 벌이도록 방관하겠다는 소리는 아닐 테고….”
“당연하죠. 선녀로서 그런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하죠.” “그럼 어떤 무대를….” “판도라 클랜로드와 생사결을 벌일 무대를 마련해드리죠. 저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
” 님도, 도 없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상징은 이제 밖에 없어요. 그것은 도, 도 하지 못하는 일일 테죠.”
“그러니 저놈과 싸워서 내 진가를 세상에 떨쳐라?”
“네.”
“허허, 어떻게 할꼬….”
아마겟돈이 은하를 쳐다보았다.
은하는 그의 시선에 지지 않으려고 고통을 참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임가을이 만들어준 기회다.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래, 좋다.”
그리고 끝내 아마겟돈은 임가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제야 임가을이 안도했다.
은하도 내심 안심했다.
“그럼 언제로 할 것이냐.”
“글쎄요. 판도라 클랜로드의 몸이 회복되는 시간을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을 핑계로 시간을 오랫동안 지체할 생각이냐. 그건 안 된다.”
“하지만 판도라 클랜로드가….”
“엘릭서로 치료하면 그만 아니냐.”
“…좋습니다. 한 달.”
“너무 길다. 2주로 해라.”
“…판도라 클랜로드.” “네, 선녀님.”
“2주 안에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임가을의 시선은 여전히 아마겟돈에게 향해 있었다.
은하의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네, 선녀님. 2주면 됩니다.”
“좋아요, 2주 뒤로 하도록 하죠.” “무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
“판도라 클랜로드 외에 강자들도 전투에 참여할 테니, 넓은 장소가 좋을 것 같은데….”
“이왕이면 높은 곳이 좋겠구나.”
주문이 참 많으시네요.
임가을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생각에 잠겼다.
“아.”
그러다 그녀의 눈에 저 멀리 있는 서울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남산타워 전망대는 어떨까요. 아직 개방하지 않은 최상층 전망대가 나을 것 같은데.” “호오, 그거 나쁘지 않구나. 그래, 그렇게 하자. 시간은?”
“아침으로 하죠.” “그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보기는 하겠느냐.”
“그날은 이동 금지령을 내린 다음, 사람들이 집에서 방송을 보게 하면 되는 거죠. 그럼 되지 않겠어요?” “그래, 좋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가 약속한 그때까지 테러는 보류하고 있도록 하지.”
아마겟돈이 지팡이를 두드렸다.
그의 뒤에서 아공간이 생겨났다.
릴리스, 마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겟돈은 몸을 돌렸다.
그들이 있는 아공간으로 향한다.
“잘됐구나, 꼬마야.”
아공간이 닫히기 전.
아마겟돈이 선녀와 함께 서 있는 은하를 보며 키득거렸다.
“이주일이라는 시간을 벌었구나. 그동안 몸을 잘 회복하기를 비마.”
아공간이 닫힌다.
아마겟돈이 사라졌다.
꽉
은하는 주먹을 쥐었다.
2주.
그때까지 몸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신화를 현현해야 해.
자신의 신화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놈에게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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