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872
하백련, 중학교 3학년, 16세.
플레이어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법적으로 준성인으로 인정받듯.
선녀의 후계자인 그녀도 내년부터 법적으로 준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준성인이 되면 결혼도 할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고, 운전도 할 수 있고….
얼른 고등학생이 되면 좋겠다.
물론, 권리가 있다면 의무도 있다.
준성인이 되면 본격적으로 선녀의 업무를 처리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준성인이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는 게 기대되었다.
특히 술!
나도 클랜 사람들이랑 술 마시며 놀고 싶은걸.
미성년인 그녀는 판도라클랜에서 회식 자리에 제대로 끼지 못했다.
늦게까지 놀 수도 없었고.
술을 마시지 않고 따라갈 수 없는 텐션에 적응할 수도 없었다.
막상 회식에 참여해도 종종 혼자서 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준성인이 되는 순간, 판도라 클랜원들한테 술을 사달라고 반드시 얘기하리라.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이었다.
준성인이 되면 제일 먼저 누구한테 술을 사달라 그러지?
…은하 오빠부터 하는 게 낫겠지?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하백련은 수업을 받으면서 남몰래 공책에 원대한 계획을 끼적였다.
그런 한편 그녀는 턱에 손을 괴고, 몇 년째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
장발장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하백련은 사춘기를 지나, 남자다운 외견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에게 점점 끌리고 있었다.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는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고백이라도 하고 싶다.
장발장이 여자애들에게 고백받는 모습을 보면 속이 타기만 했으니까.
공부는…, 막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잘하지.
운동은 제일 잘하지.
다른 남자애들이랑 달리 친절하고, 어른스럽고, 뭔가 자신감에 차 있지.
무엇보다…. 나를 잘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지.
장발장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이유는 그녀의 마음을 강타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말하셨다.
나한테 맞춰주고, 이해해주고, 또 배려해주는 남자를 만나라고.
장발장이 딱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고백을 받으러 가는 모습에 속이 탔고, 고백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습이 무척이나 흡족하기도 했다.
너희는 절대 그의 관심을 받을 수 없노라고.
그녀는 고백한 여자들을 향해 은근 콧대를 세우고 있었다.
그래도 쟤가 계속 다른 여자들한테 고백받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으…. 어떻게 하지?
하백련은 최근 고민에 빠졌다.
만약에라도 그가 다른 여자에게로 눈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확 고백해버려?
장발장도 자신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마음은 있어 보였다.
“진짜 내가 확 해버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하백련은 잠자는 장발장을 보면서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아래에 둔 스마트폰으로 손을 움직였다.
선녀의 후계자도 몰폰은 했다.
아무리 봐도….
발장이랑 은하 오빠랑 똑같은데.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즈음.
하백련은 문득 장발장이 노은하를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노은하가 중학생 때는 장발장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이후로 장발장이 점점 성장하면서, 더 노은하를 닮아가게 되자 의심은 짙어졌다.
그러던 중 하백련은 노은애와 놀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을 본 것이다.
‘어? 발장이? 아닌데…. 은애 언니, 이 사람 누구예요?’
‘누구기는. 은하 오빠잖아. 이때가 아카데미 중등부 때였나? 지금보다 조금 앳됐지?’
‘…언니, 이 사진 저한테 보내주면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는데…. 백련이, 혹시 우리 오빠한테 반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절대! 네버! 노!’
‘선녀가 시누이가 된다면…. 나는 이 나라의 비선실세가 되는 건가. 음,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언니, 진짜 아니라니까요? 제가 왜 12살 많은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얼마 전에 있던 일을 떠올리며.
하백련은 사진을 확인했다.
너무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발장이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뿐일까.
그러고 보니 안경도 중학생 때부터 쓰기 시작했지. 수상해.
하백련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장발장에게서 안경을 벗겨냈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손길은 아는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똑같은데.”
하백련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경을 벗은 장발장의 얼굴은 그냥 노은하의 중학생 시절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사진과 실물을 비교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근데 은하 오빠라면 분신을 만드는 마법 같은 게 있다 해도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아.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백련은 생각을 바꿨다.
은하가 분신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발장이 정말 노은하의 분신체라면, 자신을 장장 6년 동안이나 속였다는 셈이 된다.
자신의 인간관계를 어그러뜨리고, 자신의 마음에 장난을 친 것이다.
화나네.
정말 그런 거면 실망일 거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면 다시는 노은하와 한마디도 섞지 않으리라.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은하 오빠가 나를 걱정해서….
내 경호원으로 보내준 거겠지.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노은하의 배려였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배려한 것이리라.
그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마냥 미워할 수는 없을 듯했다.
더군다나─.
─정말 발장이가 은하 오빠면….
나는 은하 오빠를 좋아했던 건가?
장발장=노은하.
자신의 의심이 정말 맞는 거라면, 자신은 노은하를 좋아하게 된 것과 다름없었다.
“…….”
노은하가 싫은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럼 노은하가 좋은가? 좋기는 하다.
그럼 노은하는 이성으로 어떤가?
부적합! 12살 연상! 하렘왕!
그럼 장발장은 이성으로 어떤가?
너무 좋다.
그 장발장이 노은하라 가정할 때, 이성으로서 어떨 것 같은가?
…싫지는 않을 것 같다.
12살 연상인데도?
그래도 나를 배려해주잖아.
하렘왕인데도?
그래도 책임감은 있잖아.
그걸 그렇게 생각할 수 있나?
으…. 그러게. 왜 그렇게 생각하지.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닐까?
으…, 정말인가. 나 미친 건가.
하백련은 질문 프로세스를 만들어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도출된 결과는 보고 살짝 충격을 받았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닐 거야.”
끝내 그녀는 생각에서 도피했다.
장발장이 노은하가 제발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안 되겠어.
확실하게 확인해야겠어.
그리고 하백련은 장발장의 정체를 밝혀내기로 했다.
장발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학교가 끝나는 대로 몰래 미행해서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
사실 은하는 하백련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적당한 이유를 들어 장발장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장발장을 중학교에 보내게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중학교 때까지 백련이를 호위하게 해야지.
애초 하백련이 지원하는 중학교가 남녀 공학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백련은 사춘기를 맞이하게 되며, 귀엽던 외모에서 점점 여성스러운 분위기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은하는 그녀의 성장이 대견한 한편 여러모로 마음에 걸렸다.
말뼈다귀 같은 것들이 백련이한테 집적거리는 거 아니야, 이거?
하백련은 아직 어렸다.
괜히 이상한 남자와 눈이 맞아서 흑역사만 남을 연애를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은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때까지 곁에 장발장을 두자고 결심했다.
고등학교는 백련이를 잘 구슬려서 여자고등학교에 다니게 해야지.
중학교 때는 그나마 괜찮겠지만, 남고생 놈들은 정말 조심해야 해.
한편 장발장은 점점 자신과 비슷한 외견으로 자라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은하는 벽해수에게 부탁해, 안경을 만들었다.
장발장은 은하가 만든 안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더랬다.
‘꼭 이걸 쓰고 다녀야 해요? 너무 귀찮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어. 너도 알 거 아니야. 이러다 백련이한테 들킬 수 있다고.’
‘그렇다고 안경을 쓰고 다니라니, 제가 코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것 같아요?’
‘그래서 해수 형한테 부탁한 거야.’
‘뭐를요? 제가 밖에 나온 사이에 해수 형한테 뭘 부탁한 건데요?’
‘그거, 아티펙트야.’
‘…아티펙트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었네요.’
‘백련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지. 그러느라 힘들었다.’
‘어째 이상한 방향으로 노력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아, 본체를 욕하면 결국 나를 욕하는 거구나. 그래요, 이게 무슨 아티펙트인데요?’
‘이게 대기 중에 녹아 있는 마나로 상시 가동하는 아티펙트인데, 보는 사람의 인지 저하를 일으켜.’
‘그래서 제가 본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죠?’
‘어.’
‘진짜 이상한 방향으로 노력하네요. 아, 본체의 지능이…. 이러면 제가 저를 욕하게 되는 거군요, 젠장.’
은하의 노력은 가상했다.
장발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도 같은 은하였던지라,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안경을 쓰고 다니기로 했다.
덕분에 은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백련의 중학교 생활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거, 스토킹이야.’
이에 한서현은 단호하게 평했다.
그녀는 은하를 한심한 사람을 보듯 쳐다보았다.
어디 한서현뿐인가.
욕을 먹고 다니는 은하를 다독이며 위로해주던 이유정도 이번 일에서는 소극적인 부정을 표했다.
‘은하야, 그거…. 백련이가 안다면 많이 실망하지 않을까?’
‘…안 걸리게 해야지.’
‘있지…. 안 걸리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여기까지 온 이상 할 수밖에 없어.’
이유정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아티펙트까지 만든 은하의 눈에는 이제는 집념이라 할 수 있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실려 있었다.
하백련에 대한 정성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만 것이다.
다행히 하백련이 중학교에 가고, 이제 3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녀가 장발장을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들키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대로 고등학교까지 보낼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은하는 자신의 계획에 흡족해하며, 그만 경계심을 풀게 되었다.
이외 은하가 경계심을 풀게 된 건 시기적인 요인이 있기도 했다.
노은하.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고 있었고.
은하는 이제 자신의 목적을 거의 완수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하백련이 장발장의 뒤를 밟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백련이가 하교할 시간인가. 음…, 간만에 백련이나 보러 갈까?”
또한 운이 나쁘게도.
은하는 그날 회의가 끝나고 클랜에 돌아가는 도중 하백련을 떠올렸다.
마침 중학교도 근처에 있었겠다.
은하는 장발장의 보고를 받을 겸, 하백련을 만나서 카페로 데려갈까 생각했다.
최근 육아 생활에 전념하다 보니, 그녀에게 소홀해진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호위는 누구지? 아침에 보니까 백기는 클랜회관에 있었으니…. 마나관리기구에서 보낸 호위사가 맡는 건가.”
여하튼 은하는 발걸음을 향했다.
장발장에게 보고를 받고 난 후에 하백련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게 됐는데, 시간 되면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고 집에 가자고 권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은하는 장발장을 만났다.
“위험하게 왜 학교로 오고 그래요? 그냥 마법을 해제하면 될 것을….”
“너희가 학교를 어떻게 다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겸사겸사 백련이도 만나보고.”
“후, 그래요. 마법이나 해제하세요. 입으로 말하기도 귀찮으니 기억으로 확인해보세요.”
“그래, 고맙다. 고생했어.” “제가 사라지면 안경도 떨어지니, 잘 챙기세요. 마침 잘 왔네.”
은하는 장발장을 환원시켰다.
장발장이 가진 기억이 그의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은하는 며칠 동안 그가 하백련과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 파악했다.
자식, 고백도 많이 받아봤네.
그런 한편 은하는 장발장의 인기를 새삼 확인했다.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한서현이 그 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중학생들한테 고백받아서 좋니?’
그녀가 가슴을 후빌 것을 알기에.
은하는 나중에 이유정, 류연화에게 몰래 알려주기로 했다.
물론, 정하양은 예외였다.
그녀의 눈이 어떻게 뒤집힐 것인지 몰랐으니까.
여하튼 장발장의 기억을 대충 훑은 은하는 하백련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런데 전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은하는 그 자리에서 경직했다.
“…….”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절대 아니어야 한다.
은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때 전화가 이어졌다.
“어, 어어, 백련아.”
냉정하게 생각하면 하백련이 설마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그녀의 호위사가 사전에 은하에게 알려주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하의 예상에 어긋난 건, 마나관리기구의 호위사들도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그들은 단지 하백련이 재미 삼아 장발장을 미행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장발장이 은하인 줄 알았겠는가.
[거기서 뭐해요?]“…….”
은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진짜 실망이에요.”
“배, 백련아….”
“그동안 계속 저를 가지고 노니까 좋았어요?”
망했다. 은하는 전화를 끊기 직전 말하는 하백련을 보고 눈앞이 노래졌다.
☆
진짜 실망이에요.
하백련의 한마디는 은하를 크나큰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은하는 어떻게든 해명하려고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쫓아오기만 해봐, 그때는 진짜…. 나 화났으니까 건드리지 말아요.’
하지만 하백련은 은하의 손을 아예 뿌리치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은하는 그대로 넋이 나갔다.
결국 하백련을 붙잡지 못한 은하는 터덜터덜 클랜회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백련이한테 사과해야 해.
이내 은하는 마음을 고쳤다.
그는 곧장 그녀의 방을 두드렸다.
그러나 하백련의 반응은 싸늘했다.
‘백련아, 지금까지 말하지 못해….’
‘오빠 목소리 듣고 싶지도 않아요. 제발 혼자 있게 해주세요.’
‘백련아…. 네가 어떤 마음인 건지 알 것 같아. 우리 얼굴 보고….’
‘들어오지 말라니까요?’
‘…….’
은하가 하는 말은 그녀에게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은하는 문을 두드렸지만, 하백련은 끝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후로 그는 하백련의 방을 찾아 연신 사과를 빌었지만, 그녀는 절대 그를 용서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백련아,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따라오지 말아요.’
하백련이 어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도 소용없었다.
하백련은 눈에 힘을 주면서 은하를 매몰차게 대했다.
그녀는 아예 없는 사람처럼 대하려 하는 듯했다.
“내가 왜 그랬지….”
하백련의 냉대와 무시가 계속되자.
은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책하기만 했다.
목민호가 가져오는 서류도 제대로 보지 못해서 혼이 났을 정도다.
백련이가 나를 피하다니….
은하는 제정신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클랜원들은혀를 끌끌 차대기만 했다.
자업자득이라며.
클랜원들은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그러랬니.’
아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서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그나마 이유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은하를 토닥여줬을 뿐이다.
어찌 됐든 해결책은 없었다.
백련이의 화를 풀어줄 때까지 매일 사과하는 수밖에 없겠지….
은하는 크게 주눅이 들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머릿속에는 하백련만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까지 고마웠어. 너희하고 같이 싸울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그래도 연화 누나 결혼식 청첩장이 나오면 보내주고. 보러 갈게, 꼭.”
최은혁.
잠시 의정부에서 내려온 최은혁은 이번에 판도라클랜과 얽힌 계약을 갱신했다.
의정부 개척에 참여한 클랜원들의 계약 기간을 일부 줄이는 한편으로, 그들의 계약이 만료될 때, 자신의 계약도 자동으로 만료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최은혁이 의정부에서 일을 끝마치는 대로 클랜을 탈퇴할 거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이날 아침, 클랜원들은 모두 모여 클랜을 떠나는 최은혁을 배웅했다.
짐을 챙긴 최은혁을 보면서.
은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싶었지만, 끝내 놓아주어야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다면….
은혁이가 그대로 클랜에 있었을까.
이대로 떠나보내니 아쉽네.
이제는 소용없는 고민이었다.
최은혁이 추구하는 길과.
은하가 추구하는 길은 달랐다.
이제 와서는 최은혁의 새 출발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건 뭐야?”
이에 은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카드를 한 장 내밀었다.
하나은행의 블랙카드였다.
“일을 마치는 대로 혼자서 전국을 떠돌 거라며. 다른 그룹의 지원도 받지 않으면 돈도 많지 않을 텐데, 부족해지면 이걸 쓰라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너를 위해서 쓰라는 말이 아니야. 네가 앞으로 구해줄 사람들을 위해 쓰란 소리지.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긁어.”
“…….”
“어차피 내 돈도 아니야. 도준이가 부담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최은혁은 카드를 거절하려 했다.
그러다 그는 은하가 한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잠시.
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잘 쓸게.”
“클랜의 도움이 필요해지면 말해.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니 든든하네. 그래도 일단은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하려고. 정 너희들의 힘이 필요해질 때면, 그때는 잘 부탁해.”
최은혁이 카드를 받았다.
이내 두 사람은 악수했다.
“그럼 나는 가볼게.”
“연락하고.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보자.”
노은하와 최은혁.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랐던 그들은 인생을 함께 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친구가 아닌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적인 관계로 그들은 대립했지만, 사적인 관계로 그들은 친구였다.
다만 가는 길이 달랐을 뿐.
절교하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작별의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대신 재회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은하야.”
“어.”
“네가 서나 좀 잘 챙겨줬으면 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속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그걸 알면서 이래?”
“…부탁할게.”
최은혁이 답을 피하며 얼버무린다.
쓴웃음을 짓는다.
결국 은하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알았어, 노력해볼게. 건강해라.”
“너도. 애들 일만 시키지 좀 말고. 이제 그만 갈게.”
최은혁이 몸을 돌린다.
그가 클랜회관을 떠난다.
은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최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손을 들어주었다.
쏴아아
그때, 별안간 비가 내렸다.
하늘은 이리도 맑건만.
약한 빗줄기가 바닥을 적신다.
은하와 클랜원들은 그 비를 맞으며 최은혁을 배웅했다.
“─다음에 보자.”
지금은 비록 헤어지지만.
언젠가 같이 길을 걷는 날도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은하는 그때를 고대하며, 멀어지는 최은혁에게 고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