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
제단 앞을 지키는 열 두 명의 플레이어.
나이도 행색도 각기 다른 그들이었지만, 어깨에 걸친 새까만 망토가 통일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망토 중심부에 새겨진 촛불이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였다. 마치 열 두 개의 촛불이 밤하늘을 밝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감출 수 없는 플레이어들은 플레이어 업계에서 제각기 최고라고 거론되는 자들이었다.
임가을은 누구나 인정하는 플레이어들을 포섭함으로써, 차후 대한민국을 주도해나갈 선녀라는 존재의 가치를 드러낸 것이다.
탁, 하고.
그녀는 십이좌가 지키고 있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단을 지키고 있던 플레이어가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일순 바람이 멎었다. 요동치던 촛불이 가라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공에서 호버링을 하고 있던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조차도.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입을 연 사람은 선두에 있던 노인이었다.
[한국마나관리기구 장관 겸 십이좌 필두 문준. 선녀님께 인사를 올립니다.]거대한 체구를 가진 노인은 이제 20대 중반에도 다다르지 못한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임가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한 발자국을 내딛자, 바로 옆에 있던 노인이 신장보다도 긴 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한국마나관리기구 특무국 국장 겸 십이좌 남궁성운. 이 나라를 수호하는 창이 되겠습니다.]다시 한 걸음.
두 노인에 지지 않을 체구와 신장의 중년인이 나직이 읊조렸다.
[마나관리기구 감시국 국장 겸 십이좌 백서진. 도시의 어둠을 걷어내는 찬란한 어둠이 되겠습니다]그녀가 계단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십이좌들은 제각기 서약의 말을 건넸다.
[조국을 수호하는 검으로서, 어떠한 적도 멸해 보일 것을 맹세합니다.] [앞으로 조국을 밝힐 등불이 되겠습니다.]몬스터가 만연하는 세계에서 기존의 정부와 법은 힘을 잃었다.
한 번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은 돈과 권력 그리고 마나라는 비현실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힘.
힘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범법행위를 저질렀다.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똑같은 힘을 가진 사람뿐이었다.
상대가 플레이어라면 플레이어가.
하지만 한국마나관리기구는 플레이어를 통제하는 힘을 가지지 못했다.
플레이어들은 명목상으로는 마나관리기구의 통제를 받아야 하지만, 힘을 가진 플레이어 대다수가 클랜을 설립해서 활동하니 마나관리기구에 소속되는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일찍이 이익을 차지한 플레이어들이 손에 가진 것을 버리고 마나관리기구에 소속되거나, 통제를 받는 일을 선호할 리가 없었다.
결국 마나관리기구는 유명무실인 국가 기관이나 마찬가지였으며, 클랜은 제재를 가해야 하는 조직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활개를 쳤다.
여기서 임가을의 수완은 대단했다.
일찍이 배우로서 성공한 그녀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여론을 등에 업었고, 플레이어 업계에서 최고라고 거론되는 플레이어들을 십이좌로 발탁했다.
클랜에 소속된 채로 십이좌가 된 플레이어들은 마나관리기구의 권한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클랜의 힘마저 사용하며 플레이어 업계를 통제하는 힘으로 거듭난 것이다.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이윽고 십이좌 전원이 서약을 마쳤다.
살며시 미소를 지은 가을은 제단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제단 위에는 커다란 수정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수정에 불과했지만, 복잡한 술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수정구였다.
수정 내부에 설계된 술식은 코쿤(Cocoon). 그녀가 수정에 의 마나를 불어넣으면, 수정을 중심으로 일정반경에 해당하는 범위까지 마법이 전개되는 술식이었다.
그리고 의 마나로 구현화된 코쿤은 범위 내에 해당하는 마나의 편재를 방해하고, 코쿤 외벽에 존재하는 마나를 편산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임가을은 수정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가 흘리는 마나에 반응한 수정구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내부에서 하얀 빛을 발했다.
빛을 확인한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축문이 적힌 서신을 펼쳐들었다.
[유세차 선력 0년 12월 14일,선녀 임가을은 감히 천지신명님께 고하나이다.]
한 음, 다시 한 음.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목소리.
[조아려 생각하건대하늘과 땅은 크게 호생지덕이 있는지라
바람으로 삼라만상을 여살피고
비로 경조를 거추하니
실상은 바람과 비의 능함이 아니라
천지신명께서 산 것을 아끼시는 너그러움이시옵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는 것은
진실로 하늘의 뜻이 온대
인간이 허물이 있어 재앙을 받는 것은 옳겠으나
세상은 무슨 죄로 죽어야 하나이까.] [바라옵건대
천지신명께서는 크게 호생지덕을 베푸시어
만물을 구제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희생과 폐백을 갖추어 제를 올리오니굽어 흠향하시옵고 은전을 베풀어주시옵소서.]
몬스터로부터 한 번 멸망한 세계.
이 세계에 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누구나 품고 있던 불안도 그녀가 읊는 축문 앞에서 사라졌다.
축문을 모두 읊은 가을은 그것을 잘게 찢어 공중에 흩뿌렸다.
공중에 흩날리던 종잇조각은 불에 타 사라져갔다.
그녀의 말이 하늘에 전해지는 것처럼.
“천지신명님께 바라옵건대, 이 나라를 지킬 힘을.”
그녀가 살며시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백은색의 마나가 손이 움직인 궤적을 따라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대로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백은색의 마나는 수정구 내부에 설계된 술식을 건드렸다.
수정에서부터 시작된 백은색의 파문. 수정은 눈부신 백은색으로 빛나며 밤하늘을 밝혔다.
대한민국의 희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 파문은 순식간에 강북 전역으로 뻗어나가, 하늘을 뒤덮는 반구형 결계를 짜기 시작했다.
“우와~!”
베란다로 뛰어나간 은아는 하늘을 뒤덮는 백색의 고치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어머. 예뻐라.”
“와아….”
“엄마, 밤하늘이 너무 예뻐.”
“이제 우리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건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아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밖으로 나가 새하얗게 물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동하고,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도를 올렸다.
구원.
몬스터에 대한 공포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한 번 멸망한 세상을 겪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하는 은백색의 고치가 밤하늘에 녹아내리는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코쿤이 전개되는 장면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회귀 전, 그는 차대 선녀 하백련이 코쿤을 전개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때로는 그녀가 코쿤을 재가동할 수 있도록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오빠! 제가 해냈어요. 칭찬해주세요, 칭찬해주….’
‘전에도 말했을 텐데. 코쿤을 전개하는데 소모되는 마나가 상당해서 조심 좀 하라고.’
‘헤헤…. 너무 기뻐서…. 그래도 이제, 이걸로 한 사람 몫은 했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 마. 어째서 내가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걱정을 해야 하지?’
‘…오빠가 국민여론을 등에 업어봐야 알 걸요.’
‘적어도 너보다 욕은 12년이나 더 많이 먹었다고 자부할 수는 있다만.’
‘피, 그게 뭐예요. …오빠, 미안해요. 저 조금만 잘게요. …잘 자요.’
백련이 처음으로 코쿤을 전개하고 기뻐했던 일도, 그러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명했다.
감회에 젖어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코쿤을 보고 희망을 찾을 때, 은하는 홀로 과거에 대한 후회를 찾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나머지, 몬스터를 죽인다는 생각만 한 나머지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못내 미안했다.
그걸로 끝이지만.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있어도 그뿐이었다.
후회는 해도, 인생을 후회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두 번째 인생이었다. 이번 생에서까지 지난날에 대한 후회 속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많은 게 바뀌겠네.”
“응? 뭐라 그랬어?”
“아니야. 아무것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아.
나직이 중얼거리던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가 한 번 멸망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의 역사는 선녀 임가을의 취임을 시작으로 여러 격변을 거쳤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부터 변하기 시작할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정리했다.
그 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내년에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
6살이 되는 해.
그는 그때 가족을 잃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당시 6살에 불과했던 그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단지 부모님이 없었다. 누나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거품에 휩싸인 세계.
그리고 그를 부둥켜안은 은아의 목소리.
‘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자폐아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썰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의 비명과 가족들과 보냈던 추억 속에서 헤어 나오는 데에는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이 들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함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이는 삶을 보냈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관계없이.
무언가를 죽이지 않고서는 무력함을 떨쳐낼 수도, 아무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 죽였고, 죽기 위해 죽였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해답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이번 생에서는 가족들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무력함에 시달리는 것은 더는 사양이었다.
“나도 기도할래. 은하 너도 같이 하자.”
은아가 손을 잡아끌었다.
난간에 몸을 기울여, 까치발을 든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두 손을 모았다.
밤하늘을 물들였던 백은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코쿤을 구성하는 윤곽선조차 밤하늘에 녹아들고 있었다.
은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어머니도 아버지도 한 줄기 희망에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 걸까.
무엇을 비는 것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도 곧 다른 사람들처럼 기도를 올렸다.
이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 세상이 한 번 멸망했을 때.
그럼에도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기도했다.
바라옵건대 이번 생에는 가족들을 지킬 수 있기를.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옆에서 기도하고 있던 은아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리 가족이 행복해지기를.
은하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
해가 바뀌어, 선력 1년.
노은하. 유치원에 입학하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