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0
하늘은 어두웠고, 바다는 탁했다.
수면은 잠시도 잠잠할 틈이 없었다. 격렬하게 일렁이는 파도가 검붉은 피를 집어삼키고, 새로이 피를 내뱉었다.
피냄새가 가실 줄을 몰랐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 나갔다.
그들의 사체가, 그들의 피가 바다를 탁하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소용돌이의 중심지로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안에서 세상을 흔들어도 모자랄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모든 빛을 흡수할 것만 같은 검은 비늘로 뒤덮인, 마치 바다의 악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압감을 선사하는 몬스터.
제2위계 오버랭크 레비아탄.
“…질기네, 진짜.”
몇날며칠이나 계속되던 싸움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아직도 쓰러질 줄을 모르는 레비아탄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공포에 떨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등을 보이는 순간, 바로 그자야말로 녀석에게 제일 먼저 당하고 마리라는 것을.
그러니 싸워야 했다.
퇴로는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바다의 악마를 토벌할 수밖에 없었다.
“비켜.”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주춤하는 가운데, 바다 속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레비아탄에게 걸어가는 이는 한 명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동양인이었다. 새하얗게 센 머리를 땋아 올린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한 번 내리쳤다.
일 합.
그가 창을 한 번 내리친 것만으로 수면이 갈라졌다.
“길은 내가 열지.”
노인이 한국어로 말했다.
그러나 노인이 지금부터 무엇을 하려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은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고, 전력을 다하겠다는 태세로 마나를 쥐어짜냈다.
마나를 쥐어짜낸 건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닷물에 젖은 도복 위로 부풀어 오른 근육이 여실히 드러나고, 장신의 등에서 흉흉한 마나가 피어올랐다.
레비아탄이 노인을 주시했다.
바다의 악마는 수백, 수천 개의 이를 지닌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다.
맹렬히 치는 파도가 노인의 시야를 가렸다.
이윽고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포효가.
노인은 새까만 어둠이 드리우는 세계가 한치 앞까지 다가오는 데에도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팔은 하나 내주마.”
한매류(寒梅流) 극의(極意)
북풍한설(北風寒雪)
세상에 눈과 바람이 몰아쳤다.
☆
11월.
2학년도 어느덧 끝을 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남유럽 연합에서는 제2위계 오버랭크 레비아탄 토벌을 감행했다.
결과는 레비아탄 토벌 완수.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제2위계 오버랭크 몬스터를 토벌한 사건이었다.
세계는 레비아탄 토벌에 참가한 남유럽연합의 플레이어들을 비롯해, 미국의 플레이어, 마지막으로 한국의 플레이어 남궁성운을 주목했다.
남궁성운의 활약은 누구도 폄하할 수 없었다.
그가 플레이어들이 레비아탄의 숨통을 끊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연일 난리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남궁성운의 이름을 입이 닳도록 칭송했다.
다만, 그는 레비아탄을 상대하던 중에 왼팔을 잃고 말았다.
매스컴에서는 남궁성운을 대한민국 최초로 제2위계 오버랭크 몬스터를 토벌한 플레이어라고 부르면서도,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은하가 알고 있던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흐름이었다.
물론, 신명환이 마나회로에 장애를 입고, 방연지가 레비아탄 토벌 중에 행방불명 되는 미래는 사라졌지만, 남궁성운은 결국 왼팔을 잃고 말았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대로 흘러간다면, 아마도 남궁성운은 몇 년 안에 십이좌에서 물러나게 되리라.
“은아야.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알았지?”
“실수했다고 기죽지 말고. 실수하면 뭐 어때. 즐기면 되지. 시험도 즐길 줄 알아야 해. 알았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차 안에서부터 늘어놓았던 말을 꺼냈다.
은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정작 두 사람이 그녀가 긴장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중이었다.
“엄마, 아빠. 나 잘할 수 있어. 하나도 긴장 안 한다니까.”
처음에는 부모님의 조언을 경청하던 은아였지만, 그녀 역시 몇 번이나 같은 소리를 들으니 질리기 마련이었다.
부모님은 그제야 자신들이 똑같은 말만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은하 너도 은아한테 한마디라도 해줘야지.”
아버지가 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플레이어 아카데미로 오는 길에, 라디오로 들었던 뉴스를 되새기고 있던 은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은아가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게.”
은하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은아가 중등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응시하는 날이었다.
입학시험은 휴일에 있었던 지라, 가족들은 새벽녘부터 차를 타고, 은아를 응원하러 종로구에 위치한 플레이어 중등아카데미를 찾은 것이다.
“뭐, 누나라면 잘하겠지.”
“치, 그게 뭐야.”
은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은하는 진심이었다.
은아가 중등아카데미 시험에 떨어질 리가 없었다.
비록 그가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하지만, 중등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고등아카데미에 비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고작 마나를 조금 다룰 줄 아는 애들에게 중등아카데미에서 뭘 더 바라겠어.
중등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목표만 가진,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에 불과했다.
경쟁자들이 그러한데, 어릴 때부터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웠던 은아가 떨어질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없었다.
이미 세상은 한 번 멸망했지만.
게다가 그녀는 신서영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머지않아 로 발탁될 그녀가 떨어질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누나가 조언을 바란다면─.
“─아무도 믿지 마.”
“아무도?”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등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른 적이 없는 그는 무엇이 시험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전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전부터 말했지? 플레이어라면,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아무도.
모름지기 일류 플레이어라면 마음을 맡긴 동료들마저도 그들이 배신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응, 알았어. 명심할게.”
은아는 서영으로부터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가볍게 몸을 풀고 입학시험이 이루어지는 강의동으로 향했다.
“언니. 파이띵!”
잔디밭에서 뛰놀던 은애가 멀어지는 은아를 향해 소리쳤다.
슬쩍 돌아선 은아가 손을 흔들고 강의동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는 은아가 나올 때까지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을까요?” “그러자. 시험도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어디, 이 근처에 카페가….” “카페라면 저쪽 건물 1층에 있을 거야.”
은하는 원형 돔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가리켰다.
부모님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차 했다.
“…아는 형이 카페는 저 건물에 있다고 얘기해줬어.”
“난 또. 네가 어떻게 알고 있나 했지.”
아버지는 은하의 변명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은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카데미에 돌아왔다는 회상에 젖어서는, 그만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잊은 채 익숙한 것처럼 행동하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아는 얼굴이 제법 보이네.
휴일인데도 아침부터 연습을 하고 있는 아카데미생들이며, 은아처럼 시험을 치르러 온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은하는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면서 익숙한 얼굴을 몇 명이나 보았다.
그가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회귀 전에 네임드로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하긴, 괜히 황금세대라 불린 게 아니지.
은하가 플레이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시기에는 플레이어의 수준이 질적으로 상승하는 시기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 세대를 황금세대라 불렀고, 황금세대 중에서도 가장 많은 네임드를 배출한 기수를 황금기수라 불렀다.
은하는 황금기수에 속한 플레이어였다.
물론 그는 실력만은 황금기수에 속했지만, 뒷배경도 없던 데다, 인성이 미쳤다는 평가를 받아서는 웬만한 클랜에서는 그를 들이려 하지를 않았다.
그 역시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던 터라, 홀로 플레이어로서 활동하거나 일회성에 불과한 파티생활을 전전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마저 한계를 느끼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활동할 수 있는 안개꽃 파티를 창설한 것이다.
신기하네. 저 놈들 어렸을 적 모습을 다 보니까.
은하는 창가자리에 앉아, 시험을 응시하러 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어렸을 때를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가족들이 커피를 마시는 가운데, 가방에서 꺼낸 커피우유를 마시며 창밖을 둘러보았다.
아카데미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목도리나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이들도 있었다.
제각기 클랜에서 파견된 스카우터들이었다.
지금부터라도 클랜에 영입할 사람을 가려놓으려는 것이다.
아마도 저들은 눈에 띄는 자질을 가진 응시생들에게 은밀히 접촉을 시도하리라.
“저 사람들도 아침부터 열심히 하네.”
스카우터들은 일반인을 가장하며 평범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플레이어 특유의 분위기는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행색을 알고 있었던 은하는 그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응시생들을 판별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오빠빠빠. 놀아줘. 나 심심해.”
“그럴까? 나도 심심하던 차였는데. 우리 밖에 나가서 놀까?” “응!”
“엄마, 아빠. 나 은애랑 밖에서 놀다올게.”
은애는 카페에서 가만히 있기가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커피우유를 모두 마신 은하는 은애를 데리고 아카데미를 산책하기로 했다.
아카데미는 그가 다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하는 은애를 데리고, 회귀 전의 그가 아카데미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던 장소를 찾았다.
은애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을 마음에 들어했다.
나무밑동에 앉은 은하는 은애가 뛰어 노는 모습을 흡족해하며 바라보았다.
“…슬슬 끝났을 시간인가.”
시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태양과 그림자의 상태를 보니 현재 시간이 점심때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은하는 은애를 데리고 카페로 돌아왔다.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대였다.
가족들은 시험을 마쳤을 은아를 데리러 다시금 중등아카데미 강의동을 찾았다.
“세상에 그런 시험이 어디 있어.”
“나 마나 적었는데 괜찮겠지?”
“합격했으면 좋겠다.”
때마침 강의동에서는 시험을 마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발견하자마자 시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가 하면,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홀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은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어 나오던 이강혁을 발견했다.
“뭐야. 형도 시험 보러 온 거야?”
“어? 은하야.”
강혁이 눈을 크게 떴다.
바닥만 보며 걷고 있던 그는 설마 은하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시험은? 잘 봤어?”
은하는 강혁에게 중등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가 합격했을지, 하지 않았을지는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강혁은 성북구의 뒷골목을 전전하다 고등아카데미 3학년으로 편입하기 때문이었다.
“크윽…!”
예상했던 대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은하는 강혁이 울상을 짓는 얼굴을 보고는 예상과 맞아 떨어졌음을 확신했다.
자, 이제 시험이 어땠는지─.
“─두고 봐! 내가 내년에 다시 시험 쳐서 합격할 테니까!”
강혁은 시험내용은 말해주지는 않고, 큰 소리를 치며 뛰쳐나갔다.
남겨진 은하나 가족들은 덩치가 큰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뛰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였지?”
“그러게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근데 입학시험은 내년에는 못 칠 텐데.
입학이 허가되는 시기는 중등아카데미와 고등아카데미, 편입이 허가되는 시기는 고등아카데미 3학년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카데미를 지원할 수 없었다.
강혁이 중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고등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거나 고등아카데미 3학년으로 편입해야 했다.
당연히 고등아카데미 입학시험도 떨어지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은하는 이강혁에게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뭐, 내가 알게 뭐람.
“그나저나 누나가 아직 안 나오네.”
은하는 은아가 아직도 나오지 않은 강의동을 올려다보았다.
강의동을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응시생이 많았던 관계로 시험시간이 연장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은아가 나오는 시간이 늦었다.
우리 누나, 아카데미에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시험은 합격했으리라.
은하는 그녀에게 합격 축하로 건넬 말을 준비하며,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