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04
세계선을 분리하는 창.
마녀가 소멸하면서 남긴 그 창은 판도라클랜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앞으로 프리시스 메모리를 필두로, 벽해수의 공방 사람들이 창에 대해 연구하게 될 것이다.
“클랜 출입을 위해서 이참에 그냥 판도라클랜으로 이적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는 프메 언니라면 환영이에요!”
한편 프리시스 메모리는 그날 이후 용무가 없어도 곧잘 판도라클랜을 찾고는 했다.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엿보게 된 판도라 클랜원들에게 친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그녀가 진지하게 이적을 고민했을 정도다.
“저희로서는 님의 이적을 환영하지만, 마나관리기구와 업계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
한서현은 그녀의 이적을 사양했다.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군주로 통하고 있는 은하는 마음만 먹으면 마나관리기구로부터 그녀를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은하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마나관리기구는 그의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십이좌 필두이기도 한 데다, 언젠가 백련이가 선녀가 될 테니까.
굳이 를 클랜으로 데려올 필요는 없어.
그랬다가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만 보게 될걸?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판도라클랜에서 십이좌를 다섯이나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프리시스 메모리까지 더해진다면 십이좌를 여섯이나 두게 된다.
지금이야 은하의 입지가 높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전력이 불균형하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십이좌가 많다고 무작정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괜찮겠지.
하지만 재앙이 터지게 되면?
그럼 우리는 죽어 나갈 텐데?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십이좌는 자신이 소속한 클랜에서 일정 수의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
판도라클랜의 경우에는 위기 시, 십이좌 다섯 명에 해당하는 병력을 차출해야 한다.
판도라클랜의 규모와 병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은하는 프리시스 메모리가 계속 마나관리기구에 있길 바랐다.
“저도 서현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마녀님은 마나관리기구에 있으면서 저를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판도라 클랜로드의 생각이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대신에 판도라클랜 소유 건물에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도록, 특별히 명예 클랜원 출입증을 만들어드릴게요. 그걸로 언제든 저희 클랜으로 놀러 오세요.”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 감사하죠. 명예 클랜원이라, 나쁘지 않네요.”
은하는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명예 클랜원이라는 괴상한 직급은 유도준, 노은애 이후로 세 번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부로 프리시스 메모리는 해당 출입증을 사용해서, 심심할 때마다 클랜에 놀러 오고는 했다.
“프메 누나!”
“유성이, 안녕? 그렇게 뛰어오면 다칠 수 있어. 조심해야지.”
하백련은 물론이고.
노유성은 프리시스 메모리를 크게 반겼다고 한다.
한편 세계선을 분리하는 창에 대한 연구는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노은아, 이리야, 신서영과 같은 의 기프트를 지닌 사람들도 창에 대해 밝혀낸 게 별로 없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하지만 언젠가 방법을 발견하리라.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백서진이 죽은 후.
박혜림과 강현철은 육아를 위해서 십이좌를 물러났을 뿐 아니라, 아예 플레이어를 은퇴했다.
” 오빠가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혜림 언니가 울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 오빠라니…. 그놈 나이는 알고 하는 말이야?”
“그럼 혜림 언니는 언니라고 하고, 님한테는 아저씨라고 할까? 조금 이상하잖아.”
“끙…. 그건 그러네.”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다.
박혜림은 마침내 아이를 낳았다.
건강한 사내아이라고 한다.
소식을 들은 은하는 노은아와 함께 그들을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
“아, 은아야, 판도라 클랜로드.”
“오, 너희 왔냐? 비싼 걸로 잔뜩 사 왔겠지?”
“이 사람이 진짜…. 제발 이제는 애 아빠도 됐으니까 품위 없는 말은 하지 좀 말아요. 선물 정말 고마워.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걸 들고 오니?”
는 였다.
박혜림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그가 은하를 보고는 반가워했다.
되살아났을 때만 해도 기계 팔을 다루는 것을 어려워하더니, 이제는 과일도 잘 깎을 줄 알았다.
한편 은하는 자신이 가져온 과일을 깎고 있는 강현철을 보면서 어딘가 묘한 감상에 휩싸였다.
저 오징어가 드디어 사람이 됐네.
내심 감개무량했다.
물론, 찜찜한 감정도 있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저 사람이 다시 죽는 거 아니야?
아니면 내가 잘못 살려서 머리가 어디가 이상해진 건가?
여하튼 강현철을 보고 있자니 너무 익숙지 않았다.
“아, 체내 마나만 예전만 했으면 사과나 깎고 있는 게 아니라 어디서 몬스터를 썰고 있을 텐데…. 진짜 심심해서 어떻게 사냐.”
“아, 네….”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은하는 관심을 떼기로 했다.
여전히 강현철은 백해무익이었다.
그 사이, 은아는 박혜림이 안아 든 아이를 보고 있었다.
은하도 호기심이 동했다.
“손발은 모두 있대요?”
“당연하죠. 여기 봐요. 손은 천으로 덮여 있어서 못 보지만, 발가락은 볼 수 있잖아요. 합쳐서 10개죠?”
박혜림이 아이의 발을 보여주었다.
굉장히 조그마한 발가락.
은아는 아이의 발을 보고 귀여워서 감탄사를 흘렸다.
“언니, 저 안아봐도 돼요?”
“그래, 안아보렴. 안는 방법은….”
“저도 알아요. 제가 은하 아이들을 많이 안아봤거든요.”
노은아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포니테일을 흔들며 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누나가 요즘 많이 들떠 있네.
그래서 보기 좋기는 하지만.
은하는 아이를 귀여워하는 은아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최근 그녀는 많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은하가 물어볼 때면 그녀는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가 즐거워.’
대답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얼마 전부터 노은아는 그런 식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노은아의 마음속에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은하는 그렇게 파악했다.
“은하야, 너도 안아볼래?” “나? 그래, 줘봐.”
이윽고 은아가 아이를 넘겼다.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은하는 바로 능숙하게 아이를 안았다.
은하는 버둥거리는 아이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 아이가 의 아이라니.
닮은 부분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아….
“…눈매가 닮은 것 같네요?”
“그렇죠?”
“날 닮아서 잘생기지 않았냐?”
“아, 네….”
강현철과 아이하고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눈매가 험상궂은 것 같다.
안 좋은 부분을 닮고 말았다.
박혜림도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그녀가 쿠쿡 웃음을 흘렸다.
“누가 이 사람 아이 아니라 할까봐 안 좋은 구석을 닮은 거 있죠?”
“이러다가 나중에 자라서 툭하면 싸움만 하고 다닐까 걱정되겠네요.”
“그러지는 않게 잘 키워야죠.”
은하는 아이를 돌려주었다.
아이는 제 어머니의 품을 아는지, 박혜림의 품에 안기자 활짝 웃었다.
“에구, 우리 애기 졸려요?”
작게 하품을 하는 아이.
박혜림은 입을 쩍 벌리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화륵!
“””…….”””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아이의 입에서 불꽃이 나왔다.
라이터 불씨만 한 불꽃이 나오더니 입을 다물자 사라졌다.
네 사람은 꿈처럼 지나간 상황에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언니, 혹시 얘….” “설마….”
“크하하! 과연 내 아들이야!” “…….”
노은아가 먼저 입을 뗐다.
은하도 추측이 갔다.
박혜림은 조금 전 상황에 당황해 멍하니 아이를 안고 있기만 했다.
결국 은하와 노은아가 아이의 몸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언니, 이 애가 마나를 발현하도록 도와줘도 될까요?” “그래…. 그렇게 해줄래?” “불닭이 너도 확인해줘.”
“삐삐삐 빠빠빠 뿌뿌뿌!”
“아니, 내 아들이니까 내가….”
“이제 힘도 없는 당신은 빠져요. 은아가 잘할 거예요. 이제는 제가 배워야 할 정도거든요.”
“박혜림, 그렇게 말했다 이거지? 내가 너 퇴원하기만 하면…!”
“퇴원하면 뭐요?”
“아니, 뭐…. 잘해줄 테니까 집에서 편하게 있으라고.”
마침 불닭이도 있었다.
부탁을 받은 불닭이가 흔쾌히 날아 아이의 머리맡에 착지했다.
노은아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아이를 만졌다.
그녀가 마나를 흘려보내, 아이의 체내 마나가 밖으로 발현되는 것을 도왔다.
불닭이는 만약을 대비해, 언제든 불길을 조종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하여─.
─화륵!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곧 불씨가 되어 병실에 휘날렸다.
아주 작은 불씨에 지나지 않았지만 불꽃이 틀림없었다.
말도 안 돼.
틀림없이 의 기프트였다.
은하는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프트는 유전되지 않아.
그런데도 이 아이의 기프트가 지금 라는 건….
아이는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주 운이 좋게 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셈이 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기적이었다.
“이게 어떻게 이럴 수가….”
“하하하!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자라면 플레이어로 만들어야겠어!”
박혜림은 아이에게서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놀라워했다.
한때 로 불린 그녀도 이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강현철은 무식하게 좋아하며 벌써 아이의 장래를 정하려 했다.
“이이가 진짜…. 애가 하고 싶으면 해도 되지만, 애가 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시킬 생각이나 하면 정말로 가만 안 있을 줄 알아요.” “내 아이니까 하고 싶어질 거야! 이거, 미래의 십이좌는 맡아놨구만. 우리 행정관이 좋아하겠어!”
강현철은 어느새 아이를 번쩍 안고 크하하 웃었다.
그 소리에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든 그러지 않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아했다.
저 사람은 레귤러스클랜 사람들도 관심을 들일 거라고 생각 안 하나?
은하는 무작정 좋아하는 강현철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
그러면서 머리를 굴렸다.
판도라클랜으로 확 꼬드겨버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아직 머나먼 일이겠지만 말이다.
근데 잘못해서 저 애가 정말로 같은 사람으로 자란다면…. 그때 행정관이 많이 고생하겠네.
그때도 한서현이 행정관을 하면서 클랜을 돌보고 있을까?
자신도 여전히 클랜로드일까?
잘 모르겠다.
은하는 머나먼 미래를 그려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앞으로 건강하게 자라주렴. 너는 네 아빠처럼 엄마 속 썩이지 않게 착하게 자라주고.”
박혜림은 어느 쪽이든 좋았다.
다만 아이의 행복을 빌 뿐이었다.
☆
은하가 병실을 나섰을 때는 어느덧 해가 지고 있을 때였다.
“참 신기한 일이지.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다 있을까.”
“그러게. 그 애가 미래의 재앙으로 자라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혜림 언니가 잘 키울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근데 아빠가 잖아.”
“…잘하겠지?”
“가뜩이나 유성이, 유란이, 유린이 나이도 엇비슷한데 내 아이들하고 깊이 엮이지 않으면 좋겠어.”
“너랑 오빠처럼 될까봐?”
“응,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네.”
“왜? 나는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모습도 보기 좋던데. 은근히 어울려. 다른 애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내가 그 사람이랑? 누나….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줘.”
간만에 클랜원들끼리 회식을 벌여 먹고 마시고 즐기기로 했다.
은하와 노은아는 회관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하야.”
“어, 왜?” “우리 저쪽으로 돌아서 안 갈래? 조금만 둘러보고 가자.” “그래, 그러자.”
저녁노을이 예뻤다.
노은아는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은하는 그녀를 따라 길을 걸었다.
중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클랜을 만들고 몇 년이나 지났더라?”
“9년, 아니 10년인가.”
“벌써 10년이나 됐었나…. 그래서 그런지 중구도 많이 변한 것 같아.”
노은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은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재앙 이후, 처참하게 무너진 중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완전히 재건을 끝마쳤다.
지하철역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에서 높다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서울의 중심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중구와 용산구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정말…, 많이 변하기는 했네.”
은아가 일깨워준 덕분에.
그제야 은하도 중구의 변화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정말 많이 변했다.
이곳에서 군단장들과 싸우고, 또한 예경과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저 멀리 남산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아마겟돈이랑 싸웠었지.
그게 재작년에 있었던 일인가.
시간이 빨리도 지나가네.
2년 전, 아마겟돈과 전투를 벌인 남산 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로서 여겨지게 되었다.
선녀정부는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최상층 전망대의 유지를 최소한으로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밖에도 많은 것이 변화했으며, 많은 것이 은하와 관련돼 있었다.
“이렇게 변해서 보기 좋네.”
은하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감상에 젖어 말했다.
그러자 노은아가 호응해주었다.
“그렇지?” “어, 이렇게 걷기 잘한 것 같아.”
노은아도 감상에 젖은 듯했다.
그녀가 은하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은하는 도심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대답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그래서? 이제는 행복해?”
“뭐?”
“이제 걱정되는 일은 없냐고.”
뜬금없는 질문.
은하는 자신을 부드러이 바라보는 노은아의 질문에 멈칫했다.
그가 생각에 잠겼다.
“음….”
회귀를 하고 29년.
은하는 이번 삶을 되돌아보았다.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행복해, 엄청.”
많은 운명을 바꾸었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어졌다.
그들과 결실을 보기도 했다.
대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은하는 행복했다.
더는 걱정해야 할 위기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뭘 하고 살아갈지, 즐겁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지.”
미래를 바꾸기 위한 여정은 이제 모두 끝이 났다.
원대한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또 다른 목적을 품으며 살 것이다.
은하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노은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갈 건데?”
“음,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분명한 건 하나 있어.” “그게 뭔데?”
노은아가 되묻는다.
은하는 쑥스러워했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사는 거. 다 같이 그렇게 살고 싶어.”
미래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원대한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까지 챙기면서 살아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은하는 그리할 생각이었다.
이전 삶에서는 잃기만 했던 그는 이번 삶에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면서, 그렇게 눈을 감겠다.
“그래, 그렇구나….”
노은아는 은하의 마음을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그러고는 킥킥거렸다.
“내가 꼭 응원할게.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무슨 소리야? 나 혼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야지. 거기에 누….”
거기에 누나도 있는걸?
전경에서 눈을 뗀 은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누구랑 얘기하고 있던 거지? 혼잣말이나 하고 있던 건가? 뭐지? 기억이 잘 안 나네….”
무언가를 잊은 기분이다.
엄청, 소중한 무언가.
하지만 은하는 자신이 잊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늦겠네. 클랜회관에서 다들 파티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야겠다.”
☆
“다행이야.”
병원을 나섰을 때.
노은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멸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저쪽으로 돌아서 안 갈래? 조금만 둘러보고 가자.”
그래서 노은아는 은하를 이끌고는 중구를 둘러보려고 나섰다.
도시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자신과 은하와 다른 사람들이 있어 멋진 도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새로웠다.
그녀는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고는 감상에 젖었다.
“그래서? 이제는 행복해?”
한편으로 노은아는 은하의 마음을 묻고 싶었다.
그가 회귀했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은하가 비로소 원하던 삶을 얻어서 행복한지 물었다.
묻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은하가 후련한 얼굴로 답했으니까.
“행복해, 엄청.”
그 대답 하나로.
노은아는 안심할 수 있었다.
노은하는 행복하다.
그녀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더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 이상은, 욕심이다.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다행이야.
회귀 전.
노은아는 세계 의지에 녹아들어서 노은하가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은하를 걱정했고, 그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회귀 전, 노은하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대가로서 바치면서 말이다.
아….
소멸이 시작됐다.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소멸.
그래서 그런지 은하는 노은아에게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노은아는 세계 의지의 배려 아닌 배려에 감사했다.
잘됐다.
갈 때는 가더라도, 네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만약 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네가 엉엉 우는 모습을 보게 됐다면 마음이 아팠을 거야.
이기적인 바람이기는 했지만.
노은아는 이것으로 만족했다.
그녀가 자신의 소멸을 알아차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의 소멸을 막지 못하는 이상, 노은아는 남은 삶을 즐겁게 살면서 소멸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슬퍼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행이다.
내가 사라져도….
너희가 나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슬퍼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야.
노은아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자신이 사라져도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기억된다면, 필시 사람들이 많이 슬퍼할 것이다.
은하는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은아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마침내 그가 모든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은하가 다시 그 굴레에 사로잡히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꼭 응원할게.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나는 앞으로도 네가 계속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게.
세계 의지의 일부가 되어서 너랑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게.
노은아는 소멸을 맞이했다.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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