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12
흑색던전에서의 신화 현현.
은하는 그 대가로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내 격이 떨어지고 있어.
평소에 은하는 신화를 현현해도, 살아있는 신화들이 반동을 받았듯 존재의 소실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기프트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프트가 봉인된 계층에서 신화를 현현했으니, 반동을 그대로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은하는 자신의 영혼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비유가 아니었다.
영혼이 뜯겨 나가며 자신의 격이 떨어지고 있다.
반대로 신화는 그 격을 먹어치워, 몸속에서 자신의 몸집을 부풀렸다.
“큭….”
신화에 잡아먹힌다.
신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은하는 그제야 살아있는 신화들이 그동안 신화의 무게를 견뎌온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체감했다.
신화는 거대하고 난폭한 맹수였다.
자신이 약해진 틈을 타서 어떻게든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맹수.
방심하는 순간 신화에 산화된다.
앞으로 자신은 평생 죽을 때까지 신화라는 맹수를 바로 옆에 두고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신화를 현현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기프트
11층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기프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기프트가 몸을 보호하며, 신화의 반동을 막아낸다.
은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주님, 괜찮으세요?” “아, 이리야….”
그때쯤 은하는 정신이 들었다.
이리야를 비롯한 클랜원들이 모두 그의 곁에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신화의 반동을 받은 그가 걱정이 된 듯싶었다.
“혹시 영혼에 이상이 생긴 건….”
“다행히 기프트가 발동해서 이제는 괜찮아진 것 같아. 영혼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고.” “정말인 거죠?”
“내 얼굴 보면 모르겠어?” “제가 좋아하는 주님 얼굴이네요.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이리야는 은하의 상태를 살폈다.
겉보기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으나, 영혼에 이상이 생겼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결국 이리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의를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힘을 사용할 때는 조심하세요.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주님 기프트가 아무리 신화의 반동을 막아준다 하더라도, 100% 막아주는 건 아니잖아요.”
“알았어, 주의할게. 고마워.”
은하는 그녀의 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인지, 인지, 인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프트.
그 기프트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저는 그만 일어나볼게요. 괜히 주님 옆에 있다 불똥을 맞고 싶지는 않거든요.” “어? 갑자기 왜….”
이리야가 한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차 하는 얼굴을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하는 그녀가 바라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이런….”
정하양이 다가오고 있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은하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은, 하, 야?” “왔어? 사람들 상태는 무사….”
“지금 말 돌리는 거야?” “…….”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은하는 그 후로 정하양에게 세차게 혼이 나야 했다.
[이제 곧 11층 미션을…!]“”””휴식.””””
[하아, 다들 저 사람처럼 됐네요. 알았어요, 쉬세요.]한편 공략대원들은 은하를 대신해 던전 가이드를 닦달했다고 한다.
그들도 이제 던전 가이드를 다루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하루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
10층 이후로 공략 난이도가 대폭 상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때부터는 공략대에게 일종의 제약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12층에서는 마법을 쓰지 못하며, 오직 무(武)와 기프트의 힘만으로 통과해야 한답니다!!] [14층은 10층과 조금 비슷합니다! 마법의 위력에는 변함이 없긴 해도, 기프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단, 10층하고 차별점을 두자면 제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거겠네요.]11층, 물리 공격의 무력화.
12층, 마법 자체의 봉인.
13층, 탐지마법만으로 미궁 탈출.
14층, 기프트의 제한적 봉인.
공략대원들은 크게 의존하던 힘이 제약을 받을 때마다 약해졌다.
사망자가 차근차근 늘어났다.
[14층에는 여러분과 같은 기프트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가 출몰합니다. 만약 그 몬스터를 물리치게 되면, 해당 몬스터와 같은 기프트를 가진 사람은 기프트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럼 몬스터들을 피해서 하루라도 빨리 미로를 탈출하기 바랍니다!]14층에서는 사상자가 증가했다.
공략대의 기프트를 가진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까다로웠다.
제4위계 이상에 버금가는 놈들은 기프트와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는 공략대에게 지옥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기프트
“이, 뭔…!!”
심지어 몬스터들 중에는 이리야의 을 사용하는 놈들도 있었다.
세계 의지를 매개로 발동하는 힘은 흑색던전의 의지를 매개하여 실제 과 흡사한 힘을 보였다.
몬스터의 지능이 낮아 다행이었다.
몬스터는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주변 일대에 대폭발을 일으켰다.
신화 현현
리바이벌
은하는 다시금 신화를 펼쳤다.
반동을 추스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발현된, 두 번째 현현이었다.
빠르게 주변 일대를 불길로 메운 그가 공략대원들을 되살렸다.
하지만 그의 신화 바깥에 서 있던 공략대원들은 구하지 못했다.
“젠장….”
직전에 자신의 기프트를 보유한, 을 쓰는 몬스터를 죽여서 다행이었다.
그의 기프트가 신화 현현으로 인한 반동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신화를 현현한 시점에서, 은하는 이제 힘을 쓰지 못했다.
공략대는 무력화된 은하를 데리고 가까스로 미궁을 탈출했다.
던전 가이드가 까르르 웃으며 하는 말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럼 15층으로….]“쉴 시간을 줘.”
[쳇.]15층으로 이동한 공략대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하루라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마법으로 신체를 회복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치료마법이란 근본적으로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치유능력을 미래에서 끌어다 쓰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체 기관의 치유능력을 연속에 가까울 정도로 높였다가는 마나 폭주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쯤 되니 서포터들은 조심스럽게 치료마법을 펼쳐야 했다.
“어비스 아홀로틀이라고 그랬나? 그거 효과, 나쁘지 않더라. 뭐 그런 능력이 다 있나 모르겠어.” “그래도 자기는 조심해야 해. 벌써 몇 번째나 다친 거야?”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공략대는 던전에서 손에 넣은 부산물을 아끼지 않고서 사용했다.
공략대는 층을 내려갈수록 체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 대신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진파랑의 경우, 어비스 아홀로틀의 스킬석을 사용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자연 치유능력을 얻었다.
이제 그는 팔이 날아가도 마나로 날아간 팔을 복구할 수도 있었다.
“너무 그 마법만 믿지 말도록 해. 그 스킬석이 어디까지 수복시키고, 얼마나 회복할 수 있는지, 인체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지 확인된 것은 없으니까.”
아홀로틀에게서 나온 스킬석이 꽤 많았다.
차은우는 놈들의 스킬석을 흡수한 사람들에게 단단히 주의했다.
☆
공략은 계속되었다.
흑색던전에 들어오고 대략 2개월.
공략대는 마침내 19층을 공략하고 20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내가 공략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공략 기간은 더 늘어났겠지.
회귀 전과 비교해서, 몇 개월이나 공략 기간이 빨랐다.
이대로 꾸역꾸역 내려가게 된다면 2개월 안으로 최심부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
이제부터 난이도는 더 어려워져.
남은 층수는 10.
그럼에도 은하가 2개월을 상정한 이유는 20층부터 난이도가 다시금 대폭 상승하기 때문이다.
[20층까지 내려온 걸 환영합니다! 532명 중에서 여기까지 387명이나 도달했다니, 굉장하네요!]던전 가이드가 요란하게 떠들었다.
공략대는 놈에게 호응해주지 않고, 얌전히 20층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에휴, 이렇게나 반응이 없다니…. 어쩔 수 없네요. 이번 층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 저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리나요?]“”””…….””””
미로처럼 생긴 지형.
지형은 일정하지 않았다.
공략대원들이 있는 곳은 평탄하고,그들이 뒤돌아본 지형은 언덕길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언덕길 위에 정체를 모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쿵쿵
마치 무언가에 갇힌 것처럼.
철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맹수의 포효가 들리기도 했다.
공략대원들은 던전 가이드가 마저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20층부터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건 특정인의 헌신입니다!]깔깔거리는 던전 가이드.
은하는 놈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회귀 전, 은하는 20층을 시작으로 이십오, 선기준, 진파랑을 잃었다.
그리고 20층은 이십오를 잃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여러분도 소리를 들어 알겠지만, 저 위에는 몬스터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죽여도 마석이 나오지 않고, 마나를 써서도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거죠.]“”””…….””””
던전 가이드가 키득거린다.
그리고 저 뒤에서 울리는 소리가 공략대원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래도 괴물을 상대할 수가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또, 괴물을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철창에서 나온 괴물의 몸 주위에는 괴물을 봉인할 수 있는 술식이 여럿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입장에서는 트랩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트랩을 풀게 되면 마법이 발동해서 괴물을 봉인하도록 되어 있죠.]이후로 던전 가이드는 미션에 대해 설명했다.
쉽게 말해서, 공략대는 쫓아오는 괴물을 피해서 미로 어딘가에 있는 출구를 찾아야 했다.
[출구는 하나가 아니랍니다. 출구 위에 보면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해당 수만큼 인원이 통과하게 되면 출구는 자동적으로 닫히게 돼 있죠. 그러니 여러분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다음 층으로 이동할 때까지, 계속해서 문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괴물을 피하면서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괴물의 봉인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편이 좋겠죠? 트랩을 다루는 데 능숙한 레인저나 네비게이터, 텔레파시스트가 얼마나 헌신하느냐에 따라 생존자의 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특정인의 헌신을 요구하는 미션이라 할 수 있답니다!]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내려보내서 보스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공략대는 던전 가이드가 말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레인저, 네비게이터, 텔레파시스트들이 죽어 나갔다.
이십오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내려보내려고 괴물의 발을 붙잡았었지.
그때 이십오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괴물의 트랩을 해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괴물에게 얽혀 있는 트랩을 모두 풀지 못했고, 대신에 태반의 트랩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강제로 해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말았다.
[지금부터 미션을 시작합니다!]이번 삶에서는 그렇게 둘 수 없다.
회귀 전과 달리 은하에게는 이제 이십오를 포함해, 유능한 레인저와 네비게이터, 텔레파시스트들이 있었다.
크으으아아아악!!
이윽고 미션이 시작되었다.
괴물이 봉인에서 풀려났다.
☆
괴물은 거대했다.
구더기처럼 생긴 검은 괴물이 짧은 팔다리를 움직여 쫓아왔다.
크아아아악!!
던전 가이드가 말한 것처럼.
공략대원들은 쫓아오는 괴물에게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다.
마법에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 괴물이 몸을 꿈틀거리더니 충격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간혹 살점이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놈의 몸은 빠르게 상처를 수복해 공략대를 공격했다.
“더 강해졌어!”
[이런, 말하는 것을 깜빡했네요! 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집니다! 그러니 트랩을 풀어서 괴물을 완전히 봉인하는 게 좋을 거예요.]괴물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자, 공략대는 타격으로 괴물을 견제하는 방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의 몸체가 길었다.
액체처럼 쭉 늘어진 괴물은 그동안 지나왔던 길을 오염시켰다.
“네 번째 다리에 얽혀 있는 트랩, 해제 완료! 두 사람은 다른 위치의 트랩을 해제해주세요!”
“이게 말로만 쉽지, 직접 해보니까 쉽지가 않네! 동생! 할 수 있지?”
“언니만 도와준다면야!”
한편 공략대원들은 추격을 피하려 괴물을 봉인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십오, 메이링, 메이린.
세 사람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괴물의 신체에 휘감겨 있는 트랩을 해제하려고 했다.
쉽게 풀 수 있는 트랩도 있었고, 풀기 어려운 트랩도 있었다.
트랩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괴물을 봉인하는 힘이 강력했다.
[전방 30m. 출구를 발견. 숫자는 13이래.]추격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그사이 공략대원들은 출구를 찾아 그 안으로 몸을 맡겼다.
공략대의 규모는 이제 100명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은하는 진서나의 텔레파시를 받고 전방을 내다보았다.
양옆으로 찢어지는 갈림길.
벽면에 검은 아공간이 있었다.
그 위에 2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트랩을 푸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무나 문으로 들어가도록 해! 문이 막히는 즉시 좌측으로 뛴다!”
은하는 지시했다.
공략대원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은하는 선두에 있던 공략대원들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13명이 문을 넘어가자, 아공간이 모습을 감췄다.
그 즉시 은하는 공략대를 이끌고 왼쪽으로 뛰었다.
콰아아아앙!!
공략대의 수는 어느덧 80명 정도.
그때쯤 괴물의 등에서 돋아난 팔이 손에 잡히는 대로 암석을 던져댔다.
공략대는 날아드는 암석에 주의해 괴물을 상대해야 했다.
“큭…!! 두 사람만 도와줘!” “오빠, 어디를 만지면 되는데요?”
“오른쪽 콧구멍.”
“구멍이라…. 그건 우리 전문이죠. 언니, 가자!”
트랩을 해제할 때마다 괴물의 몸에 쇠사슬이 치렁치렁 감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해지는 괴물은 쇠사슬에 붙잡히고도 속도가 크게 줄지 않았다.
좀 더 강력한 봉인을 걸어야 한다.
이십오는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는 트랩을 해제하기로 했다.
쌍둥이들이 그를 보조했다.
[10시 방향. 출구를 발견. 숫자는 10. 하양이 말로는 조금 전 전투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부터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대.] [그렇게 해.]그사이 앞서 수색을 나선 사람들이 문을 찾아냈다.
은하는 진서나의 텔레파시를 받고, 부상자들부터 문 너머로 보냈다.
어느덧 남아 있는 공략대원의 수는 42명, 얼마 남지 않았다.
“커헉…!!”
“강시형!”
그 순간, 뒤에서 괴물을 막아내던 강시형이 놈의 팔에 맞아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쳤다.
호시미야 카에데는 공중으로 뛰어, 천장에 박히려는 그를 붙잡았다.
애들도 이제 많이 지쳤어.
쉬지도 못하고 몇 시간 동안 계속 뛰어다니고 있는 상태니….
난이도는 더욱 어려워졌다.
공략대원들은 처음에는 풀기 쉬운 트랩을 건드렸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풀기가 까다로운 트랩밖에 남지 않게 됐다.
반면 괴물의 속도는 더욱 빨라져, 공략대원들이 트랩의 술식을 좀처럼 건드리지 못하도록 움직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괴물이 느릴 때 어려운 술식을 건드릴 걸 그랬네요. 술식을 읽을 틈이 없네….”
이십오는 혀를 찼다.
술식을 해제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처럼 되었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으리라.
남아 있는 술식은 풀지 말란 듯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
한 사람이서는 풀 수 없고, 여럿이 달려들어야 풀 수 있는 술식이었다.
그런 데다 서로 합을 맞춰야 했다.
합을 맞추지 않고서 괜히 여럿이 술식을 만졌다가는, 오히려 술식이 꼬일 수 있었다.
괴물의 속도가 더 빨라졌어.
결국 이쯤 되니 사람들은 트랩을 해제하는 것에 번번이 실패를 겪기 시작했다.
반면에 괴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속도를 높여 추격해왔다.
“카에데. 시형이 상태는 어때?” “크게 다친 데는 없어. 조금 전의 공격을 맞고 기절했을 뿐이야.”
한편 은하는 강시형을 업고 달리는 호시미야 카에데에게 말했다.
괴물의 공격이 얼마나 강력한 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벌레를 쫓듯 팔을 휘둘렀을 뿐인데 가디언인 강시형이 공격을 얻어맞고 기절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괴물의 근처로 다가갈 수도 없게 된 셈이다.
[서나야, 남은 인원은 어떻게 돼?] [이제 24명 남았어.]“24명이라….”
은하는 읊조렸다.
그동안 도망 다닌 보람은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2, 3번 문을 찾으면 미션을 완료할 수 있으리라.
[문을 발견했어. 숫자는 9야.]이윽고 새로운 문을 발견했다.
은하는 강시형을 보내기로 했다.
“카에데, 네가 시형이를 잘 챙겨줘. 네가 데리고 먼저 내려가 있어.” “괜찮은 거야? 나도 남아서 트랩을 해제하는 게….”
“아까 쌍둥이들 말 들었잖아. 이제 눈에 보이는 술식은 거의 정리했고, 나머지는 지금 있는 사람들만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다고.”
“하지만….” “너까지 트랩 해제에 참여했다가는 괜히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 먼저 아래로 내려가 있어줘.”
카에데는 주로 괴물을 견제하거나, 문을 탐색하는 역할을 맡았다.
반면 이십오, 쌍둥이들은 트랩을 해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서로의 역할이 달랐다.
이십오와 쌍둥이들이 합을 맞춰서 트랩을 풀고 있는데, 괜히 카에데가 개입했다가는 혼선을 줄 수 있었다.
“…알았어. 무운을 빈다.” “이따 보자.”
카에데는 결국 공략대를 남기고는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9명이 사라지면서 15명이 남았다.
공략대의 어깨가 가벼워진 한편, 괴물은 더더욱 강해졌다.
놈이 바짝 추격해왔다.
☆
카에데가 사라지고 시간이 흘렀다.
공략대는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을 달리기만 했다.
좀처럼 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하죠! 문은 여러분의 수만큼 존재하니까요! 이제는 문을 찾기 힘들어질 만도 하죠.]던전 가이드가 조롱하듯 말했다.
공략대는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던전 가이드에게 뭐라고 대꾸해줄 힘도 없었다.
그때 마침 문을 찾아냈다.
[15가 적힌 문을 발견했어.]희소식이었다.
정확히 남은 사람의 수만큼 문이 형성돼 있던 것이다.
공략대의 얼굴이 밝아졌다.
[서나 너는 같이 있는 사람들하고 먼저 들어가도록 해. 우리도 바로 뒤따라갈 테니까.] [응, 알았어. 하양이가 전해달래. 죽지 말고 꼭 따라오기래.] [그런다고 전해줘.] [그리고 내 전언이야.] [네 전언?] [죽지 마.] […그럴게.]진서나의 텔레파시가 끊겼다.
그녀가 문을 들어간 것이다.
이제 미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은하와 같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11명.
그들을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때, 괴물이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악!!
“아니, 저거는 왜 더 빨라졌어?”
[괴물도 아는 거죠. 여기서 놓치면 여러분을 먹지 못한다는 걸요.]이십오가 기겁했다.
던전 가이드가 차분히 대답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추격해오는 괴물에게 마법을 쏘아냈다.
어베니어가 한순간 괴물의 진로를 방해하기도 했다.
이십오와 쌍둥이들이 괴물의 몸에 남아 있는 트랩을 풀도록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문의 크기가 너무 작아.
한 사람씩 들어갈 수밖에 없어.
한편 은하는 가까워지는 문을 보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괴물이 바로 등 뒤까지 와 있었다.
그 상태로 한 사람씩 들어갔다가는 누군가는 괴물에게 잡히고 만다.
“이십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 “큭…, 그러고 있어요, 지금!”
문 앞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괴물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십오와 쌍둥이가 아슬아슬하게 트랩을 해제했다.
그러자 최대치로 고개를 내민 놈이 뒤로 밀려났다.
촤르르륵!!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효과가 사라졌다.
괴물이 더 강한 힘으로 몸을 묶은 쇠사슬을 부숴버린 것이다.
“너희 먼저 들어가 있어!”
괴물과 공략대원들이 발을 멈췄다.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이십오와 쌍둥이들이 트랩을 막고, 은하가 마법으로 괴물을 견제했다.
“은하 형! 나도 힘을 보탤게!”
남은 사람들이 황급히 문 안쪽으로 뛰어든다.
어베니어는 문 앞에서 몸을 돌려, 은하와 함께 괴물을 막기로 했다.
“큭…!!”
괴물이 몸으로 지면을 때린다.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이십오와 쌍둥이가 붙잡은 술식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괴물이 입을 벌렸다.
플래티나 크로스
은하는 힘을 쥐어짜며 막았다.
빛줄기가 놈의 입속에서 터졌다.
놈이 몸을 꿈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금 거리를 좁혀왔다.
“주인님도 얼른 들어가세요! 거기! 브루노 씨 아들도 얼른 들어가!”
“제가 들어가면 누가 막는데요!?”
“내가 들어가면 너희 엄호는 누가 해주는데!?”
“그렇다고 1명씩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다 같이 들어가라고요!?”
“그럼 쌍둥이부터 들어가도록 해! 나는 마지막까지 엄호해준 다음에 들어갈 테니까!”
“저희가 없으면 남아 있는 트랩에 손을 대지 못해요, 클랜로드!”
“맞아! 셋이서 매달려 풀어야 해요. 안 그러면 못 풀어요!”
“그럼 저도 같이 남을게요! 저라면 잠시나마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이제 20층에 남은 사람은 5명.
이십오, 메이링, 메이린, 어베니어, 은하였다.
은하는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를 악물었다.
젠장….
마음 같아서는 4명을 보낸 다음, 자신이 마지막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괴물의 행동은 트랩으로만 막을 수 있었다.
자신이 남아봤자 도움이 안 된다.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괜히 저들이 문을 통과할 시간을 빼앗을 수 있었다.
결국 은하는 결단해야 했다.
“믿는다. 꼭 성공해라.”
은하는 문에 발을 걸쳤다.
은하가 뒤를 돌아보자, 어베니어가 이를 악물고 괴물의 공세를 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명은 트랩을 해제하러 혼신을 다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주인님!”
“”클랜로드!””
“은하 형!”
은하는 문 속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그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공간 속에 들어간 그가 멀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금방 뒤따라갈게.”
☆
[21층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아공간 속을 한참 헤맨 것 같다.
은하는 던전 가이드의 소리를 듣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21층에 도달해 있었다.
“야, 다른 애들은!?”
“쌍둥이랑 어베니어, 이십오라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네.”
주위가 탁 트인 공간.
은하는 21층에 온 공략대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파랑과 배수빈이 다가와, 그에게 다른 사람들의 행방을 물었다.
“젠장….”
은하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위 층에 잔류한 사람들이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공략대원들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설마 나를 보내려고 괴물을 막는 시늉이라도 한 건가? 트랩을 풀지 못할 것을 알고서, 작별 인사 같은 말을 한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은하는 자책했다.
이번에도 이십오를 구하지 못했다.
어디 이십오뿐인가.
쌍둥이 자매까지 잃고 말았다.
브루노와 줄리에타에게 약속했는데 어베니어를 구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얏!” “으헉!?”
“꺄아악!!”
“어? 아, 죄송해요.”
“”””…….””””
은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별안간 아공간이 생겨났다.
그 속에서 메이린이 떨어졌다.
그 위로 이십오와 메이링도 떨어져 몸을 포갰다.
마지막으로 어베니어가 떨어지면서 그들이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다들 어디 다치지 않았어요? 얼른 일어날게요. 영차….”
“휴….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했네. 겨우겨우 트랩을 풀었는데 괴물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일 줄은….”
“그래서 깜짝 놀라서 문 안쪽으로 둘이서 몸을 들이밀었잖아요. 나름 신선한 기분이긴 했네.” “언니, 오빠…. 내 위에서 내려와서 말해주면 안 돼? 나 죽을 것 같아. 후, 숨이…. 나는 깔리는 것보다는 덮치는 게 좋은데….”
“어머, 미안. 얼른 비켜줄게.”
사람들이 벙쪄 있는 가운데.
네 사람은 저희끼리 이야기하면서 서로 고생했다며 덕담을 나눴다.
은하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허….”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저들이 이렇게 죽을 리 없었다.
이십오는 몰라도 쌍둥이는 더더욱.
어베니어는 당연한 것 아닌가.
은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걱정했다.
“어랍쇼? 주인님, 왜 그러세요?”
“어머, 클랜로드. 왜요? 저희 보고 기뻐 죽겠어요?”
“막 우리 보고 흥….”
“동생, 여기 하양이 있어.”
“이크. 그래서 저희 봐서 좋아요?”
“그래, 이것들아.”
다행이었다.
은하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이내 그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응?””
그러고는 그들을 와락 껴안았다.
안타깝게도 어베니어는 너무 커서, 끌어안지 못했다.
한편, 난데없이 은하에게 껴안긴 사람들은 얼떨떨한 얼굴을 보였다.
“다들 죽지 않고 잘 왔어.”
“…당연하죠. 그것이, 약속이니까.”
“”우리 아직 연애도 못 해봤어요! 여기서 죽으면 곤란하지! 그렇지? 인정? 인정!””
“그리고.”
“”””……?””””
“사람 걱정 끼친 벌 좀 받자.” “””……!!”””
“어베니어는 이따 따로 받고.” “엑, 나도 받아야 해?”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은하는 그들이 숨도 쉬기 힘들게 두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세 사람이 비명을 질러댄다.
은하는 세 사람의 비명을 들으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