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13
특정인의 헌신을 요구하는 층.
특정인이 진정 제 목숨을 내주듯이 살신성인의 기세를 보인다면,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략대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냐는 선택지를 계속 맞닥뜨리게 되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구해. 그게 공략대의 방침이야.”
공략 난이도는 점점 높아졌고.
공략대의 사기는 점차 떨어졌다.
그때마다 그들은 내심 특정인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싶어 했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그들을 꼬드긴 것이다.
하지만 은하는 유혹을 이겨냈다.
그도 마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소리를 내어 공략대에게 주장했다.
이것조차 흑색던전의 계략이야.
공략대의 병력을 줄이고, 서로가 희생을 요구하게 만들고, 그런데다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는 거라고.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야 해.
20층에서는 레인저, 네비게이터, 텔레파시스트의 헌신이 요구됐고.
21층에서는 딜러, 헌터, 가디언의 헌신이 요구되었다.
또한 22층에서는 서포터, 캐스터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이후에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다.
만약 공략대가 그들을 제물로 삼아 다음 층으로 나아갔다면, 공략대는 체력과 힘을 온존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공략대의 결속력을 깨는 것은 물론, 그들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공략대의 목표는 공략이지, 생존이 아니었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이유로 근시안적인 선택을 해서는 안 됐다.
최심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보스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번 층에서는 20명만 죽었네요! 이제 남은 사람은 346명인가요? 흠, 532명 중 346명이라…. 생존률이 대략 65% 정도군요. 저희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살았네요. 그쪽의 검, 여명검이라고 했나요? 그 검 때문에 되살아난 사람들도 있고요.]그리하여 공략대는 서로 힘을 합쳐 27층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27층까지 생존률은 65%.
회귀 전에 비해 높은 수치였다.
은하가 기억하기로, 이전 삶에서는 30%에 도달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럼에도 공략대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작 346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다 30층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더 죽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는 어떨 것인가.
피폐한 상태로 살아남은 자신들이 과연 최심부에 있는 보스를 죽일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그들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크게 절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했다.
나아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24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부터 27층 미션을 시작합니다! 27층에서 헌신을 요구하는 특정인은 다리가 빠른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상황에서.
던전 가이드는 절망에 발을 담근 그들을 더욱 밑바닥으로 짓눌렀다.
24시간밖에 되지 않는 휴식 시간.
완전히 피로를 풀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금 공략에 임해야 했다.
27층이라면…, 거기구나.
그리고 이곳 27층은.
회귀 전, 진파랑이 죽었던 곳이다.
☆
27층 임무가 시작되었다.
던전 가이드의 선언과 함께 일대가 빠르게 변모했다.
공략대는 일직선으로 형성돼 있는 세상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기점으로 왼쪽에서 바위산이 우수수 솟아났다.
타다닥
척
왼쪽에 협곡이 만들어졌다.
우수수 솟은 바위산에서는 장총을 어깨에 짊어진 고블린들이 나왔다.
놈들이 일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협곡 사이를 조준했다.
협곡을 가로지르면 바로 쏘아버릴 기세였다.
화르륵!
파지직!
오른쪽에도 변화가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뻗어 있는 길.
그 길이 불꽃이며, 전격이며, 온갖 마법에 휩싸였다.
맨몸으로는 지날 수 없을 듯했다.
[27층에서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27층 미션은 정말 간단하답니다. 여러분은 그냥 오른쪽에 있는 길을 달려, 28층으로 내려가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길을 막고 있는 마법 때문에 달리는 게 힘들겠죠? 안 그래도 마법도 쓰지 못하니까요.]던전 가이드가 키득거렸다.
공략대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제 27층까지 내려오면서 쉬운 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길을 가로막는 마법을 해제할 방법이 있습니다. 왼쪽 길에 마법을 해제하는 장치가 있어요. 자, 저 길 끝을 보세요.]“”””…….””””
[벽에 붙은 빨간 버튼이 보이죠? 저 버튼을 누르면 일시적으로 길을 막고 있는 마법이 해제됩니다. 근데 저 버튼을 누르기 전에, 고블린들의 견제를 받고 지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어찌어찌 버튼을 누른 다음, 버튼을 누른 사람도 살아남으려면 다시 고블린들의 견제를 피해 달려 28층으로 내려가야 하고요. 아, 참. 저 고블린들은 죽여도 소용없어요. 없어지면 그만큼 되살아나거든요.]그러니 고블린을 죽일 생각보다는 가능한 고블린의 총을 덜 맞거나, 공격을 피해서 달리는 게 좋답니다.
공략대는 던전 가이드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구겼다.
[이쯤 되면 감이 오시겠죠? 그래서 발이 빠른 사람의 헌신을 요구하는 층이라고 한 거예요.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저기서 계속 버튼을 누르고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편히 28층으로 내려갈 수 있겠죠. 희생은 최소화하고, 생존은 최대화하고. 여러분이 지금 바라는 상황이 아닌가요?]“”””…….””””
[한 사람만 저 버튼으로 보낸다면, 최대 다수를 살릴 수가 있는 미션! 거저먹는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 흑색던전! 인심 좀 썼다!]던전 가이드가 두 팔을 펼친다.
빛의 구체 속에 들어 있는 요정이 그 상태로 빛의 입자를 흩뿌린다.
공략대는 호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하를 비롯해, 공략대를 지휘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내기만 했다.
“후….”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진파랑을 찾았다.
진파랑과 눈이 마주쳤다.
“형, 할 수 있겠어?”
“뭐가? 죽으라고? 아니면 버튼을 누르고 돌아올 수 있냐고?”
“…….”
이전 삶에서.
진파랑은 몇몇 아인들과 힘을 합쳐 버튼을 누르러 왼쪽 길을 달렸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층.
기프트로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진파랑은 홀로 버튼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버튼을 누르고, 공략대가 28층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마법으로 막힌 길을 지났을 때.
진파랑이 27층의 임무를 완수하러 길을 내달렸다.
그 결과─.
─형은 통과하지 못했지.
오른쪽 길을 달리던 도중.
버튼의 효과가 사라지고 말았다.
진파랑은 마법에 집어삼켜졌다.
그렇게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은하는 그에게 이번 삶에서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있는지 물은 것이다.
그러자 진파랑은 위기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어투로 답했다.
“걱정 마라. 나 진파랑인 거 몰라? 저까짓 길, 내가 다 뚫고 갈 테니까 28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믿을게. 형밖에 없어.”
“오냐.”
진파랑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진파랑은 목숨을 걸어야 할 임무를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였다.
정말 바보였다.
☆
공략대가 두 개로 나뉘었다.
왼쪽 길을 맡은 공략대는 대체로 발이 빠른 사람들로 모여 있었다.
또한 그들이 왼쪽 길을 안전하게 지날 수 있게 공격을 막을 가디언, 고블린을 견제할 레인저도 있었다.
진파랑, 강시형, 호시미야 카에데, 어베니어는 해당 부대에 속했다.
그들의 수는 대략 50.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진파랑은 그들 중 가장 앞에 서서 버튼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가자!!]진파랑이 공략대에게 신호했다.
그와 같은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왼쪽 길로 걸음을 내딛자, 고블린들이 즉각 사격에 나섰다.
“공격은 최대한 막을 테니까 뒤는 돌아보지 말고 뛰어!”
강시형이 소리쳤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무기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는 있었다.
강시형은 방패를 크게 만들어서는 고블린들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다른 가디언들도 방패를 넓게 펴, 공략대의 머리를 감쌌다.
레인저들은 방패 속에 몸을 숨겨, 고블린들을 요격했다.
그들은 가능한 놈들을 죽이지 않고 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려 신경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주먹.”
어베니어도 그들 속에 있었다.
그는 두 주먹을 맞댄 채, 몸속에서 마나를 끌어냈다.
흘러나온 마나가 그의 몸을 감싸, 그의 피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기프트
줄리에타의 기프트의 영향을 받아, 강화된 브루노의 기프트를 물려받은 어베니어.
그는 자신의 신체를 금속과 같이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나아가 줄리에타의 기프트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피부를 탄소로 재구축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탄소는, 원자가 지닌 전자의 수로 다른 원소와 결합해 무한에 가까운 형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그는 기프트를 이용해 자신의 신체를 탄소로 결합돼 있는 다이아몬드로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기프트
– 다이아몬드 스킨
그의 피부가 다이아몬드가 발하는 빛으로 번쩍였다.
어베니어는 그 자체로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공격을 당해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장을 헤집었다.
기프트
모드: 블레이드 울프
한편 진파랑은 가디언들의 보호를 받지 않고 내달렸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털로 뒤덮여, 그 털이 탄환 세례를 튕겨냈다.
검조차 튕겨내는 방어력을 얻게 된 그가 거대한 늑대로 변모했다.
이제 그에게 마법이 깃들지 않는 물리 공격은 위험이 되지 않았다.
진파랑은 날카로운 털을 바짝 세워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더, 더, 더 빨리…!!
공략대가 얼마나 많이 살아남느냐.
그것은 온전히 그에게 달려 있는 일이었다.
그는 기어코 협곡 끝을 지나서는 버튼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고블린의 탄환도 이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진파랑은 몸으로 붉은 버튼을 세게 짓눌렀다.
[버튼을 눌렀습니다! 일시적으로 오른쪽 길을 뒤덮고 있는 마법들이 해제됩니다!]그 순간, 던전 가이드가 나타났다.
놈이 진파랑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공략대 전원에게 이야기했다.
그 즉시 중간 지점에서 대기하던 공략대원들은 마법이 사라진 길로 뛰기 시작했다.
진파랑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등을 돌려 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시형! 호우! 너희도 얼른 뛰어! 버튼은 내가 누르고 있을 테니까, 너희도 얼른 돌아가!]한편 진파랑과 같은 역할을 맡던 사람들은 협곡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픽픽 죽어 나갔다.
진파랑은 텔레파시를 보냈다.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와!!”
기프트 .
강시형이 목소리에 힘을 담아서는 먼 거리에 있는 진파랑에게 전했다.
진파랑은 텔레파시로 응답했다.
그제야 주춤하던 호시미야 카에데, 강시형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협곡에서 등을 돌렸다.
진파랑은 그들이 협곡을 빠져나와, 28층으로 향하는 길로 달려가는 걸 지켜보았다.
[당신의 헌신에 감탄을 표할게요! 죽음을 인정하는 게 힘들었을 텐데, 정말 대단하네요.]이에 던전 가이드가 칭찬했다.
진파랑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던전 가이드의 발언에 조롱이 섞여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콧방귀를 끼었다.
[뭐래? 나는 살아서 갈 거거든?] [글쎄요. 그건 불가능할 텐데요.]던전 가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놈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신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오른쪽 길을 중간 정도 지날 때면 마법이 다시 가동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물리 공격은 방어한다고 해도, 과연 마법 공격도 방어할 수 있을까요?]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파랑의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달린다고 해도 도중에 마법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던전 가이드가 현실을 보라는 듯이 일깨워주었다.
[바보 같은 늑대 씨. 제가 당신이 오래 살 수 있는 법을 알려줄게요. 그냥 이 층에서 사세요. 그럭저럭 쾌적하고 좋아요. 몬스터들도 저런 고블린들밖에 없으니, 당신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을 테고요.] [뭐냐, 날 스카우트하는 거냐?] [당신의 지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네, 스카우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흑색던전의 힘을 받아들여서 던전의 존재로 살아가도록 하세요. 그렇게 살다가 죽어서 흑색던전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 [나쁜 제안이 아니랍니다. 어차피 여러분은 최심부에서 기다리고 있을 저희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요. 그냥 끔찍하게 죽어서 흑색던전의 품으로 귀속되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 살다 편안하게 죽어서 귀속되세요. 나름 괜찮은 제안 아닌가요?]던전 가이드가 제안했다.
현실적으로 좋은 방안이기는 했다.
현실적으로는 말이다.
진파랑은 던전 가이드의 말을 듣고 거대한 몸을 들썩였다.
[야, 던전 가이드.] [네. 뭔가요?] [그렇게 죽어서 뭐하냐?] [오래 살면 좋은 거죠.] [웃기시네.] […….] [네가 산다는 게 뭔지 알아?]웃음이 나왔다.
살아있는 육신도 없는 의지 따위가 비굴하게 살아갈 것을 종용하면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꼴이.
진파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은 현실을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이 현실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형체도 없는 이상이었다.
목표, 이상, 미래 등.
사람은 무언가를 쥐고 산다.
[그런데 나 보고 조용히 살아가다 조용히 뒤지라고? 그렇게 사는 게 죽는 것하고 다를 게 뭐야? 그게 뭐가 재미있어?] […그래서요? 죽을 것을 알고서도 멍청하게 도전해보겠다는 건가요?]던전 가이드의 어조가 낮아졌다.
진파랑에게 비웃음 받으니 심기가 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진파랑은 개의치 않았다.
마침 호시미야 카에데와 강시형이 공략대원들을 이끌고 길을 지났다.
진파랑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멍청하군요. 그 머리는 돌인가요? 왜 죽을 걸 알면서 그러는 건가요?] [그야 멍청하니까.] […….] [나는 복잡한 것은 잘 몰라. 근데 이거 하나는 잘 알고 있거든? 이런 나를 받아준 게 노은하 그놈이고, 판도라클랜이란 걸.]살아 돌아가기로.
노은하와 약속했다.
또한 그는 흑색던전을 공략하려는 이유를 잊지 않았다.
노은아를 구하기 위해 들어왔다.
노은하도, 노은아도.
태어나자마자 빈민가에서 버려진 자신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죽는 것이 무서웠다면, 이 던전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진파랑이 송곳니를 내보였다.
그 즉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달릴 뿐이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수백의 고블린들.
놈들이 진파랑을 죽이려고 노렸다.
진파랑은 포효했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탄환 비가 그의 방어력을 떨어뜨렸다.
결국 탄환 몇 개가 몸을 꿰뚫었다.
그럼에도 진파랑은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협곡을 빠져나온다.
숨을 고를 틈도 두지 않고 무작정 오른쪽 길로 뛰어든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당신은 이제 죽을 거예요.]던전 가이드가 옆에서 쫓아왔다.
진파랑은 던전 가이드의 비웃음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뛰기만 했다.
조금만, 더 빨리…!
여기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오래 살다가 죽을 것이다.
할머니와 약속했었다.
노은하와 약속했었다.
김메리와 약속했었다.
다른 사람들과 약속했었다.
약속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살았던 때와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서 죽지 말아야 할 이유?
얼마든지 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쉽게 됐네요! 시간이 지나서 봉인된 마법이 기동합니다! 당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에요!!]세상이 불길로 뒤덮이고, 전격에 휩싸인다고 하더라도.
온갖 마법에 노려진다고 하더라도.
진파랑은 포기하지 않았다.
올 테면 얼마든지 와봐라.
진파랑은 이를 악물고, 포효했다.
블레이드 울프의 섭리로는 마법을 막아내지 못한다.
뜨겁고, 차갑고, 따갑고, 아프다.
발이 불길에 휩싸이고, 탄다.
액체처럼 녹아내리려고 한다.
그쯤 되니 진파랑의 정신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고막이 녹아내리면서 끝내 청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눈이 뜨거웠다.
그것마저 녹아내릴 것 같다.
조금만 더 뛰면 되는데….
지금 제대로 달리고 있는 걸까?
몸을 움직인다는 감각이 없었다.
의식이 붕 떠오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의식.
결국 그의 의식이 마법에 삼켜져, 흑색던전으로 환원되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정신 차려! 기프트 풀어!]진서나의 텔레파시.
진파랑의 정신이 번뜩 떠졌다.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는다.
그는 저 너머를 노려보았다.
어둠, 어둠, 어둠.
어느새 눈이 녹아내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뛰었다.
텔레파시가 시킨 대로 의심 없이 기프트를 해제했다.
마법이 난무하는 공간에 무방비한 상태로 놓이고 만다.
그 순간─.
─크르르!!
피이이익!!
세 쌍의 날개를 가진 불사조.
그리고 새하얀 라이거.
그들이 맞은편에서 뛰어들었다.
마법 속으로 뛰어든 그들이 곧장 마나를 퍼뜨려 힘을 조절했다.
불사조가 불길을, 라이거가 전격을 무력화한다.
이내 라이거가 곧장 진파랑을 물고 마법을 빠져나간다.
[허, 대단하네요.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불사조가 자신의 몸으로 라이거와 진파랑을 보호한다.
마법이 고스란히 불사조를 노린다.
끝내 불사조가 죽음을 맞이한다.
피이이….
그렇지만 불사조는 죽지 않는다.
흩어지는 불꽃이 모여 알이 된다.
라이거는 몸에 두른 푸른 쇠사슬로 알을 낚아챘다.
그리하여 마침내, 길을 빠져나갔다.
김이 팍 샌다는 어조로.
던전 가이드는 축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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