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4
그 다음도 그랬다.
보조감독관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은아는 마나의 흐름과 반대로 향하는 길을 걸을 때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나의 흐름은 정확히 출구를 가리키고 있건만.
보조감독관의 힌트가 출구가 아닌 길을 가리키고 있어서.
“선생님이 여기라니까 여기겠지.”
“은아 너 또 그러는 거야?” “은아야, 네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해. 근데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겠니?” “선생님이 우리보다 마나를 더 잘 다루지, 네가 더 잘 다루겠니?”
한 번은 그러려니 넘어가도,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 아이들이 조금씩 불만스러운 티를 드러냈다.
은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도 그녀가 계속 다른 의견을 제시하니 웃으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선생님이 이 길이 맞다고 하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하지만 마나의 흐름은….”
“저기 봐. 출구가 있는 방향하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잖아. 이게 다 선생님이 길을 알려줘서 그런 거라고.”
“은아야, 네가 틀릴 수도 있는 거야.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알겠지만, 너무 그러지 마. 얘, 너 조금 없어 보여.”
희지는 은아와 점점 의견이 달라지기 시작하니 이마에 주름을 모았다.
그녀가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나서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이 막히는 일 없이 출구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은아의 의견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거기가 아닌데.” “지금까지 길이 막힌 적이 없었잖아? 출구도 바로 가까이에 있고.”
아이들이 이제 그만 좀 하라는 투로 애원했다. 그들 중에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는 아이들도 있었다.
은아는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감정만을 앞세워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다.
마음이 상했지만 의견이 엇갈렸다고 집단에서 벗어날 용기도, 아이들을 쉽게 내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사교성이 좋아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상냥하고 착해서 단호히 내치지 못한다.
은아의 한계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독이 될 수 있는 성격.
플레이어의 세계에서는 독이었다.
출구는 바로 저기에 보이는 데에도, 앞으로 향하는 길은 출구로 이어지지 않았다.
은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보조감독관이 알려주는 길이 잘못됐노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대로 보조감독관이 거짓말을 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조감독관들은 마나를 보느라 피로해진 아이들을 응원해주기까지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보는 세상은 정답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얄궂은 일이었다.
세상을 보는 주체는 자신인데, 자신이 보는 세상이 아닌 타인이 보는 세상으로 판단하는 상황이.
아이들 말대로 선생님이 잘못된 길을 알려줄 리는 없을 텐데.
은아는 무엇 하나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정답이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것도.
서로 마음이 상한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도.
‘쉽게 정 주지 마. 플레이어의 세계에서 그만큼 헤픈 사람은 없어.
은아 너는 남한테 정을 떼기도 할 줄 알아야 해.’
서영이 누누이 말했던 가르침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은아는 마음이 상했다는 이유로 여기까지 도달한 아이들과 헤어질 수가 없었다.
헤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불현듯 플레이어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를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잘 왔다. 이제 마지막이란다. 세 길 중 하나는 길이 갈라지는 일 없이 출구로 이어져 있을 거야.”
또다시 휴식지점이었다.
아이들은 세 갈래로 나뉜 길목 앞에 있던 보조감독관의 조언을 경청했다.
“시험도 이제 끝이구나. 선생님,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조금만 알려주시면 안 돼요?”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힌트를 달라고 보챘다.
보조감독관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가리킨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아이들이 그것을 놓쳤을 리 없었다.
“얘들아, 저기로 가자!”
“다들 수고했어!”
“우와, 우리가 1등인 거 아니야?”
“은아야 너는 왜 또 망설이고 그래?”
“같이 안 갈 거니?”
아이들이 아무 음식에도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은아를 불렀다.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어서 답하지 않고 뭐해?
또 다른 방향이라고 말할 거야?
선생님이 저기라는데?
은아는 사람이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감독관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한 번 쳐다보고, 마지막으로 마나의 흐름을 살폈다.
“…거기가 아니야.”
은아는 어느 길도 고르지 않았다.
단지 왔던 길을 가리켰다.
출구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금세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마나의 흐름이 알려주고 있었다.
눈에 보였다.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은 언제나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은아야, 정말 모르겠니?” “얘, 선생님이 저쪽이라고 하셨잖아.” “왜 왔던 길로 돌아가려 그래? 출구는 저기 있는데.”
아이들은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떡할 거야?”
희지가 꿋꿋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은아에게 물었다.
다른 아이들이 어서 답해 보라며 눈초리를 세웠다.
정말 이대로 떠날 거야?
너 혼자 튀는 행동이라도 하려고?
정답이 있는데 왜 보지를 못하니.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시선.
은아는 답하기를 망설였다.
이 선택이 마지막이리라.
아니, 마지막이다.
무언가를 명확히 결단하지 않으면 이대로 끝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있을까.
‘나도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저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있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구하고 싶은 사람은 저 아이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만 무엇이 정답이라 믿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은하야. 나는 어쩌면 좋은 걸까.
매사가 똑 부러지는 남동생을 찾았다.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마.’
은하가 시험을 보기 직전에 건넸던 말.
그 말을 왜 이제야 떠올린 것일까.
처음부터 믿어야 할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신이 보는 세상과 타인이 보는 세상을 두고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것을 깨닫고 나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출구는 저기야.” “…하, 그럼 은아 너는 저기로 가. 우리는 저기로 갈 테니까.”
희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에 있던 아이들이 대놓고 비웃었다.
내가 이런 애들한테까지 정을 줘야 한다고?
은하라면 그러겠지.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깨를 들썩였다.
몸이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괜한 일로 고민했다.
그래, 은하라면 이러겠지.
“응, 꺼져.”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쌓였던 불만을 토해내니 속이 후련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희지가 사나운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며 따졌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응, 꺼지라고.”
은아는 아이들이 뭐라 소리치기도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로 뛰어갔다.
저 멀리서 자신을 욕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서영 언니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은아는 감지망을 전개했다.
미로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출구는 자신이 보았던 세상에 말해주듯이 눈앞에 있었다.
은아는 체내 마나를 발현해 신체능력을 끌어올렸다.
전경이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쟤는 정말 바보인가?
희지는 정답이 바로 앞에 있는 데에도 다른 길을 선택한 은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조감독관에게 튀어 보이려고 얼간이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아무렴 어때.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감독관이 알려준 길은 갈림길도 없이 출구를 향해 쭉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때를 위해 모아둔 마나로 신체능력을 끌어올렸다.
어릴 때부터 마나제어를 배웠던 그녀는 지금까지 같이 했던 아이들을 제치고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렸다.
이걸로, 합격이다─!
눈앞에 보이는 길목이 끝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라?”
다시금 미로였다.
☆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총괄감독관은 제3수련장의 지휘감독관이 가져온 자료를 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가 보고 있던 자료는 오전반 A조가 응시한 마나 감지 시험의 결과였다.
40번 류연화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그녀가 세운 기록은 18분 11초였다.
생각에 잠긴 대상은 그녀가 아니었다.
총괄감독관이 생각에 잠긴 대상은 류연화와 같은 조에 속해 있던 39번 노은아였다.
그녀는 22분 41초로, 전체 응시자 중에서 20위 안에 드는 성적으로 통과했다.
“운도 실력이지.”
총괄감독관은 마지막에 무언가를 결심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그녀를 떠올렸다.
운이 참 좋았다.
때마침 미로가 변모했으니까.
그녀가 돌아선 길이 신기하게도 출구로 이어지는 최단거리로 변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체내 마나를 발현해서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출구에 도달하기까지 했다.
자질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다만 플레이어로서의 소양은 아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플레이어 아카데미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그녀와 같은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아 어떤 플레이어로 거듭날지 궁금하기도 했다.
총괄감독관은 머릿속으로 39번 노은아의 활약을 재생하며 내년에 입학할 신입생들을 기대했다.
☆
“휴우….”
마지막에는 운이 좋았다.
설마 미로가 변화해서는 출구로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B+라는 성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수련장을 나왔을 때에는 점심경이었다.
제3수련장에서의 시험이 길어진 나머지, 오전반 중에서 제일 늦게 끝난 것이다.
갈증이 났다.
은아는 때마침 눈에 보이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기로 했다.
“어?”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류연화였다.
기다란 봉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은아가 인사하자, 연화는 한 번 고개를 끄덕여서는 길을 비켜주었다.
은아가 자판기 앞에서 무엇을 마실지 고민하던 때였다.
“저기.”
“어?”
연화가 말을 걸었다.
기다란 봉을 어깨에 짊어진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캔음료를 내밀었다.
“이거, 두 개 나왔거든.”
은아는 연화가 내미는 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새초롬한 모습으로 얼굴을 돌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얘 정말 예쁘다. 귀여워!
자신보다 키가 큰 데에도 그 생각을 거두지 못했다.
“응, 고마워! 잘 마실게.”
은아는 연화가 내민 캔음료를 받았다.
사이다였다. 벌컥 들이켜니 탄산 특유의 짜릿함이 목을 타고 번졌다.
“우리 아카데미에 입학해서도 친하게 지내자. 내 이름 알지? 노은아라고 해.”
“…류연화야.”
은아가 캔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린 연화.
이윽고 연화는 캔을 마주쳤다.
☆
그 시각, 은하는.
“오빠, 나 배고파.”
“나도.”
아직도 은아가 보이지를 않았다.
은하는 강의동 앞에 앉아서는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은애도 지루한 모양이었다. 은하처럼 두 손으로 턱을 괴서는 시큰둥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아버지는 또 그것이 좋다고 카메라를 들이미는 중이었다.
“아, 술…, 사이다 땡긴다.”
아침부터 일어나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피곤했다.
술이 당겼다.
한 잔 하고 나면 편히 잘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나이가 너무 어렸다. 어쩔 수 없이 술 대신 사이다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은아가 나오는 대로 점심을 무엇으로 먹든, 사이다를 마시기로 했다.
그때 고개를 뒤로 젖힌 은애가 장난을 쳤다.
“오빠빠빠. 나도, 은애도. 사이다.”
“누나 나오면 우리 사이다 마시러 갈까?”
“고구마도!”
“고구마도 좋지.”
날씨도 쌀쌀했다.
길거리에서 파는 군고구마가 당기는 계절이었다.
우리 누나는 언제 나오는 걸까.
은하는 은애를 껴안고서는 하염없이 은아를 기다렸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