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6
선력 5년.
새로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은하의 나이는 이제 두 자리 수가 되었다. 친구들은 10살이 된 것을 기뻐했지만, 그로서는 아무 감흥도 들지 않았다.
“어? 또 선생님이에요?”
“올해도 잘 부탁한다.”
은하는 올해도 친구들과 같은 반을 배정받았다.
3학년 3반.
3반은 전학년 내에서 남자가 담임과 학년주임을 겸임하고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3학년 3반의 담임은 임도훈이었다.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느라 늦게 들어온 하양이 활기차게 인사했다.
임도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들어오는 서나도, 민지도 임도훈이 담임인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대장, 대장. 올해도 임도훈 샘이 담임이네.”
“그리고 올해도 모두 같은 반이지.”
“그러네. 왠지 다들 같은 반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참신기해. 안 그래?”
“…그러게.”
은혁이 네가 모르는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어.
맨 뒷자리에 앉은 은하는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아이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임도훈의 정체를.
다 같이 같은 반이 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은하 역시 작년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일만 없었더라면, 아이들처럼 신기한 우연이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그러던 중 은하처럼 맨 뒤에 앉은 서나가 눈썹을 한가운데로 모았다.
작년을 기점으로 키가 부쩍 자란 그녀는 어쩌다 앞자리에 앉았다가 곤혹을 치른 사건이 있었다.
키도 문제였지만, 여우 귀와 꼬리가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그 일이 있던 후로, 서나는 맨 뒤를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은하는 수업을 듣기 싫어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내일 키 번호대로 배정할 거니까 오늘은 자유로이 앉으렴.”
이런, 그놈의 키 번호!
은하는 거의 통곡하듯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내리쳤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왜 내가 같은 반이 되고 싶다고 했던 애들이랑 전부 같은 반이 된 거지?”
한편, 서나는 의자 등받이와 엉덩이 받침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쑥 빼낸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작년 연말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고서광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책을 읽던 서나에게 누구랑 같은 반이 되고 싶은지 물어본 일이 있었다.
서나는 아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지 않고 그녀를 대하는 아이들의 이름을 언급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모두 같은 반이 된 것이다.
“기분 탓인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은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이거 참 기묘한 우연이네.”
“거짓말. 너 뭔가 알고 있지?”
은하는 일부러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서나가 집요하게 추궁해왔지만, 그는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했다.
“솔직히 말…, 아야!”
“진서나. 새 학년 새 학기부터 한눈을 팔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죄송합니다.”
“끝나고 교실 청소 하고 가렴.”
“네에….”
서나는 은하에게 말을 거는데 집중하느라 임도훈이 다가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일반인보다 신체능력이 발달한 아인이었지만, 플레이어로서 활동했던 그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출석부로 머리를 탁 하고 맞은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고개를 푹 숙였다.
풀이 죽었다.
처, 처음으로 혼났어.
그 동안 눈치만 보며 살았던 서나였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혼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맞은 것을 보고 아이들이 깔깔 웃으니 더 부끄러웠다.
삼각 귀를 축 늘어뜨린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은하 너도.”
“어? 저는 왜요?”
은하는 가만히 있다 봉변을 맞아야 했다.
그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했지만,
“그럼 너는 안 떠들었어?” “어…, 그건 아닌데….” “서나랑 같이 청소하고 가.”
“네에….”
“최은혁 너도.”
“네!? 저는 왜요?” “웃었잖아.”
“아….”
은혁 역시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지만,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하고 벌 청소를 해야 했다.
은하와 서나가 째려본 것은 덤이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흐음, 은혁이 너는 내가 웃겼나 보구나?
두 사람이 시선으로 말했다.
우리 같이 즐겁게 청소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입만 뻥긋거렸다.
은하와 서나가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한 순간이었다.
“…난 죽었다.”
은혁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어야 했다.
“어휴, 어떻게 너희는 10살이 되도 하나도 변하는 게 없니. 나라도 변해야지 어쩌겠어.”
맨 앞에서 올해야말로 모범생이 되겠다며 안경까지 챙겨온 민지가 교실 뒤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는 혀를 쯧쯧 찼다.
☆
“우~와~!”
플레이어 중등아카데미.
한때 조계사였던 곳에 위치한 아카데미는 드높이 건축된 강의동마다 매달린 현수막으로 신입생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어서와, 아카데미는 처음이지?] [보아라, 망~국이다.] [입학, 실화냐?] [환영미!!!!] [새내기 커여워~] [아카데미 가즈아~!]익히 알고 있는 대사를 재치 있게 변형한 현수막이었다.
은아는 아직 입학식도 치르지 않았건만, 플레이어 아카데미 생활이 마냥 힘들고 괴롭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재치 있는 현수막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등아카데미를 지나치는 길목에는 작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현수막도 있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 그런데 다음 생은 있을까?] [현실은 시궁창] [당신의 죽음에 의미를 달려 하지 말라. 당신의 죽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늘을 위해 살고, 내일을 위해 죽어라.] [이 세상에는 꿈과 희망도 없어.] [플레이어가 하고 싶어요….] [재능은 배신하지 않는다. 노력은 배신한다.] [노력하는 자는 끝없이 노력한다. 그런데 재능을 가진 자 역시 끝없이 노력한다.] [잊지 마라. 포기해라. 그리고 인정해라.]은아는 처음 아카데미를 방문했을 때, 안내책자에 기재되어 있던 글귀를 기억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플레이어의 5년 이내 생존확률은 30%에 머무른다던 내용을.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강의동에 걸린 현수막을 지나쳐서는 중등아카데미 학술동을 찾았다.
“음, 5반이….”
중등아카데미의 올해 입학생은 모두 300명이었다.
한 학년은 10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반의 구성원은 30명이었다.
은아는 5반이었다.
사전에 집으로 보내진 배정결과를 중얼거린 그녀는 1학년 5반을 찾아다녔다.
여기구나.
1학년 5반 앞에 멈춰 섰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용했다.
으~ 갑자기 긴장이 되네.
플레이어 아카데미였다.
여기에 모인 학생들은 저마다 플레이어가 되기를 선택한 이유를 가슴 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너무 친근하게 굴지 마.
…되도록 말을 안 거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누나한테는 소용없겠지?’
은하가 오늘 아침에 꺼냈던 말이었다.
그녀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서 대했던 것처럼 아카데미 학생들을 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좋아!”
교복 매무새를 정돈하고 다짐했을 때였다.
“은아야?” “어어!?”
교실 문을 열려던 은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깜짝 놀랐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했다.
은아는 중등아카데미 입학시험이 끝난 후로 서영에게 언제 어디서든 마나를 감지할 수 있도록 취하라며 단단히 주의를 받았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이 등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로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아직 공부가 부족했다.
“미안. 놀랐어?”
“…조금. 아니, 많이.”
“미안.”
“그래도 대단하다. 연화 네가 다가오는 걸 정말 몰랐어.”
그녀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연화였다.
체내 마나로 변질된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진 모습은 마치 푸르른 수국이 한데 모여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같았다.
연푸른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색은 중등아카데미의 교복과도 굉장히 어울렸다.
게다가 그녀는 훤칠한 키와 날씬한 체형으로 검정색 바탕에 붉은 테가 자수된 교복을 말끔히 소화하고 있었다.
연화는 언제 봐도 예뻐!
“헤헤. 보고 싶었어. 그 동안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은아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어서, 덥석 끌어안았다.
이미 은하가 아침에 건넸던 말은 깡그리 잊어버린 그녀였다.
한편, 연화는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는지 손으로 허공만 휘저었다.
그러면서도 한쪽 겨드랑이로 기다란 봉을 지탱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연화 너도 5반이야?”
“응.”
“정말 잘됐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나도.”
은아가 해맑게 웃었다.
연화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그것이 더 은아를 자극했다.
“너 왜 이리 예쁘니?” “나 하나도 안 예뻐. 네가 더 예쁘지.” “아니, 아니, 연화 너야!”
“…고마워.”
연화는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 물러서기로 했다.
그제야 가까스로 은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교실에 안 들어갈 거야?”
“아, 맞다. 깜빡 잊고 있었네. 들어가자, 얼른.”
긴장도 풀렸다.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은아는 전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교실은 자리가 앞자리부터 조금씩 높아지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교실로 들어온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
학생들의 시선을 마주한 은아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인사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안녕.”
연화가 차가운 얼굴로 은아를 따라 인사했다.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결국 은아는 머쓱해하며 연화와 빈자리에 앉아야 했다.
나, 잘할 수 있겠지?
은아는 서로 말도 붙이지 않는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수심에 잠겼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은 연화와 눈이 마주쳤다.
뭐 어때!
연화만 있으면 뭐든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걱정을 떨쳐버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편, 연단만을 쳐다보고 있던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중이었다.
진짜 예쁘네. 내가 잘못 본 건가?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이나?
나중에 친해지면 말이라도 붙여야겠다.
쟤네들 너무 예쁘다~ 여자애들도 별로 없으니 친해져야지.
중등아케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은 저마다 아픈 과거나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아직 14살이었다.
아직 순수함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나이였다.
“모두 들어왔지? 이제부터 출석번호를 부를 테니, 호명된 사람은 답하도록.”
플레이어 아카데미는 이들의 성정을 몇 번이고 시험하리라.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착 같이 살아남아서 적응하는 이도 있으리라.
올곧게 살아온 나머지 꺾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현실과 타협하고 순응하는 이도 있으리라.
“3번 노은아.” “네!”
이제 와서 후회하더라도 소용없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