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984
리라이프 플레이어 (984)
청주시 선두산.
노유설을 안고, 차에서 내린 은하는 계단 길을 올려다보았다.
저 높이 도장 건물이 보였다.
“유설아, 증조할아버지는 저기에 살고 계셔. 이제 우리 증조할아버지 보러 가자?”
“응애.”
은하를 따라 푸른 눈으로 도장을 올려다본 노유설.
아이가 알아들었다는 양 옹알이했다.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들 참 똑똑한 것 같아. 여기 오는 동안 지루할 텐데 한 번도 울지 않은 걸 보면 의젓한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판단하기에는 이르지 않을까? 그러다 실망이라도 하면…….”
“실망 안 해. 우리 애인걸? 그냥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응, 맞아. 건강하면 됐지. 안 똑똑해도 돼.”
류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휜다.
“그래도 의젓한 성격인 건 맞을 것 같지 않아? 역시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음……. 내가 의젓한가?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누나만큼 의젓한 사람도 없지. 아기였을 때 어땠었는지 기억나는 거 있어?”
“그러고 보니……. 나도 유설이처럼 잘 울지 않는 편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기는 해.”
“역시 엄마를 닮은 거였네. 그치, 유설아?”
“응애.”
“거봐, 유설이도 말하잖아. 엄마를 닮아서라고.”
“그래, 나를 닮은 모양이야.”
은하가 장난스럽게 으스댔다.
류연화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올라갈까?”
“응, 짐 줘. 내가 들게.”
“괜찮아, 짐은 내가 들 테니 유설이나 대신 안아 줘.”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동생아, 하나는 내가 드마. 어머니는 안 드셔도 됩니다.”
“나, 나도 들 수 있는데…….”
자리에는 아테나와 메티스도 있었다.
은하는 그녀들도 데리고 함께 계단 길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도장 건물을 마주했다.
“전대 〈신창〉이란 자는 제법 풍류를 즐길 줄 아나 보구나. 경관이 참 운치 있어.”
“대기 마나도 청량해서 좋구나. 나도 마음에 든다.”
이제는 전대 〈신창〉으로 통하는, 살아 있는 신화에 속하는 남궁성운.
그의 도장을 눈에 담은 아테나와 메티스가 감상을 꺼냈다.
속으로 그녀들의 의견에 동의한 은하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류연화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은하야, 저기.”
“어?”
류연화가 마당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은하는 곧 평상에 앉아 있는,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궁성운이다.
“연화랑 손녀사위가 왔구나! 어서 오거라!”
한쪽 소매는 축 늘어뜨린 채, 반가운 소리로 부르는 남궁성운.
류연화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연화가 오랜만에 할아버님을 봬서 많이 기쁜가 보네.’
류연화의 마음을 이해한 은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캐리어를 끌고, 그녀를 따라간다.
이윽고 평상에 다가갔을 때.
“안녕하세요, 할아버님. 그동안 잘 지내셨……. 어?”
은하는 남궁성운에게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초등학생으로 통할 것 같은 외견의 소유자는…….
“〈인덱스〉 님?”
“나도 할아버님이라고 부르거라.”
이제는 십이좌 자리에서 물러난, 플레이어 라이브러리의 보조 관리자 〈인덱스〉 윤성진.
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 * *
남궁성운의 부름을 받은 문하생이 새로 술상을 내오는 가운데, 은하는 윤성진에게 물었다.
“〈인덱스〉 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나도 하양이의 스승이니만큼, 불릴 자격은 충분할 텐데.”
“……네, 할아버님. 앞으로는 할아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정하양이 윤성진의 〈더 시드〉로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만큼,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래지 않고 수긍한 은하는 그를 깍듯이 대하기로 했다.
그러자 윤성진은 흡족해하며 남아 있던 잔을 비웠다.
남궁성운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툭하면 이 친구한테 연화랑 손녀사위 얘기를 했더니, 이 친구가 부러웠었나 보구만! 이해해 주게, 손녀사위.”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지. 노 서방은 한 잔 받고.”
“네,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윤성진이 은하가 내민 잔에 막걸리를 따른다.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음에 답했다.
“그냥 놀러 왔을 뿐이다. 막상 마음먹고 휴일을 보내려 하니 딱히 할 게 있어야지…….”
“우리 나이에는 만날 사람도 별로 없는 법이지. 그래서 이렇게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며 놀고 있었다고 할까.”
잔을 입에 대던 남궁성운도 말을 보탰다.
그가 막걸리를 쭉 들이켠다.
한편, 은하는 납득했다.
‘내가 십이좌 필두가 된 후로, 〈인덱…… 할아버님의 업무 부담이 한결 나아지기는 했지. 이제 한 달 중 절반은 라이브러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니까. 휴일도 꼬박꼬박받는다고 하고…….’
그러나 그만큼 다른 사람들은 윤성진의 업무를 대신하느라 죽어 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로 〈빅 데이터〉 모라율이라거나, 〈나비 아가씨〉 윤이별이라거나…….
은하는 속으로 그녀들을 응원했다.
마침 윤성진도 생각이 동한 듯, 마나관리기구가 있는 방향을 애잔하게 쳐다보았다.
“〈빅 데이터〉랑 〈나비 아가씨〉 같은 젊은이들이 나 대신 잘해 주겠지.”
“암, 그렇고말고. 자네도 이제는 좀 쉬어야지. 그렇지 않으냐, 유설아? 아이구, 우리 증손자. 참 귀엽구나.”
“응애.”
류연화에게 노유설을 넘겨받은 남궁성운의 얼굴이 헤벌쭉해진다.
그가 노유설을 놀아 주기 위해 우루루 까꿍 소리를 낸다.
“…….”
묘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던 윤성진은 시선을 이동했다.
그곳에는 아테나와 메티스가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는 정체가 뭐지? 아무래도 인간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마인도 아닌 것 같고……. 슬슬 소개 좀 해 주면 좋겠군.”
윤성진이 입을 열었다.
노유설을 어르고 있던 남궁성운도 슬며시 호기심을 보였다.
아테나와 메티스는 순순히 응했다.
“눈이 좋은가 보구나. 나는 아테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격이요, 내 동생의 검이다.”
“……메티스. 마찬가지로 신격이고, 내 아들의 검이니라.”
“뭐? 신격? 검?”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할아버님. 어떻게 된 일이냐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윤성진.
이내 그는 은하의 설명을 통해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흠……. 그런가. 자아를 지닌 보물은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는 거였군.”
“단순히 자아만 지닐 게 아니라, 신격도 갖추어야 하느니라.”
“그러니까 태극 등급에 준하는 보물만이 가능하다라…….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니, 신기하네.”
“원래 세상은 그런 법이다. 어쩌면 지혜의 여신인 나도 모르는 지식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재미있군.”
시선을 주고받은 윤성진과 아테나는 서로를 마음에 들어 했다.
서로 상대에게 막걸리를 따라 준다.
그러자 남궁성운이 얼른 끼어들었다.
“자네들끼리만 마시면 섭하지! 나도 같이 마시세. 자, 연화랑 손녀사위 그리고 메티스 자네도 끼게나.”
남궁성운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사람들은 마다하지 않고 합세해, 다 같이 잔을 부딪쳤다.
막걸리를 마신다.
그때,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윤성진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다행이야. 나는 자네가 또 여자들을 들인 건가 싶었으니까.”
“크흠! 사실, 나도 생각은 했지. 만약 연화랑 같이 데려온 거였으면 크게 혼을 내려고 벼르고 있었다네.”
“하하…….”
남궁성운과 윤성진이 은하를 흘긴다.
은하는 두 처조부의 빈정거림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던 나머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리야를 아내로 들이기로 결정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번에 이야기는 들었다, 노 서방. 〈판도라의 성녀〉와 결혼하겠다고……. 이탈리아에서 사고를 쳤다며?”
“허허. 연화는 유설이를 낳느라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었을 텐데, 손녀사위는 의지는 되지 못할망정 이탈리아에 가서 여자나 자빠뜨렸다라……. 이번에 자네한테 실망을 많이 했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설교를 시작했다!
은하는 그들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정중한 자세로 경청해야 했다.
다행히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보다 못한 류연화가 중간에 은하를 두둔해 줬기 때문이다.
“스승님, 그리고 할아버님. 이이는 저희한테 이미 많이 혼났어요. 그러니 너무 혼내지 마세요.”
“쯧……. 손녀사위, 연화 덕분에 이쯤에서 그만하는 거네. 알겠지? 여하간 우리 연화랑 유설이 좀 울리지 않길 바라네.”
“하양이랑 유란이도 마찬가지다. 그 애들을 슬프게 했다가는 라이브러리에 깽판을 쳐 놓겠다. 그나저나 성운이의 제자야, 나도 할아버님이냐?”
“네, 하양이 스승님이시잖아요. 그럼 제 스승님이기도 하죠.”
“성운이 제자가 눈치는 있군. 아니, 하양이가 내 손녀 격이니 손녀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 앞으로는 넷째 손녀라고 부르마.”
윤성진은 썩 흡족한 눈치였다.
덕분에 은하는 십년감수했다.
게다가 노유설도 시선을 끌었다.
노유설이 크게 하품한 것이다.
“후아암.”
“오구오구, 우리 예쁜 증손자. 하품을 하는 것을 보니 많이 졸린가……. 응?”
보글보글!
세운 다리로 노유설을 받치고, 한 팔로 안고 있던 남궁성운.
한창 아이를 귀여워하던 그는 순간 멈칫했다.
“이건…….”
“허어…….”
노유설의 숨결을 따라 입에서 조그만 물방울이 나오고 있었다.
남궁성운은 공중으로 떠오르다 터져 나가는 물방울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윤성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화(水化)〉의 기프트로구나. 허허……. 나랑 연화는 〈빙화〉에, 우리 증손자는 〈수화〉라……. 나쁘지 않구만.”
“체내 마나도 보통이 아니군. 단순히 하품한 것만으로도 마나가 새어 나올 줄은……. 재능을 타고났구나.”
“저희도 처음에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 뭐예요. 아무래도 연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체내 마나를 물로 변환하는, 〈수화〉의 기프트.
은하가 자랑스럽게 긍정하는 가운데, 노유설의 기프트를 확인한 남궁성운과 윤성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특히 남궁성운의 입가는 호를 그렸다.
“이거, 유설이가 어떻게 자랄지 너무 궁금하구나. 과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남궁성운은 자신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부터 나이를 먹기도 했고, 멸망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 소싯적에 숱하게 신화를 현현했으며, 레비아탄과의 사투로 팔을 잃고 건강을 해친 데다, 류연화에게 신화를 전수해 주기도 했었으니까.
그래서 미련을 남기지 않고 남은 생을 살려고 했건만.
‘이 조그마한 아이가 나한테 미련이 생기게 하는구나…….’
남궁성운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때, 류연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래 사실 거예요. 저하고 같이 유설이를 가르쳐야죠. 그치, 유설아?”
“응애.”
“저랑 같이 유설이를 가르쳐요. 유설이가 창술을 배우고 싶어 할지는 그때 가서 알겠지만요.”
“…….”
류연화가 부드러이 미소 짓는다.
자신을 배려하는 그녀의 마음씨에, 남궁성운은 조금 전 감정을 잊고 껄껄 웃었다.
“암, 그렇고말고! 우리 유설이한테 창술은 다 가르쳐 주고 가야지!”
즐거운 날이다.
그러니 즐겁게 떠들고 마시며, 미래를 이야기하자.
* * *
저녁을 먹고 난 후.
은하와 류연화는 방으로 돌아가 편히 휴식을 취하기로 한 가운데, 남궁성운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차 술판을 벌이기로 했다.
“그럼 두 사람은 편히 쉬고, 나머지는 밤술이나 같이 할까? 유설이도 나랑 더 있자꾸나!”
“응애.”
남궁성운은 안고 있던 노유설을 떼어 놓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렇다 보니 덩달아 노유설도 술자리에 합류하게 됐다.
“유설이 괜찮겠지? 얌전한 애라도 우리가 없으면 불안해할 텐데……. 우리 없다고 막 우는 거 아니야?”
짐을 푼 방으로 향하는 길.
은하는 조심스레 걱정을 표했다.
반면 류연화는 걱정하지 않았다.
“스승님을 썩 좋아하는 눈치던데, 괜찮을 거야. 그래도 계속 거기에 유설이를 둘 수는 없으니 이따 한번 보러 가자.”
“그래, 그게 좋겠어. 조금 쉬었다가 유설이한테 가자.”
곧이어 목적한 방에 다다른다.
은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연화야?”
“술 냄새.”
방문을 닫고 들어온 류연화가 대뜸 은하의 목에 얼굴을 붙이더니, 그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숨결이 은하를 간지럽혔다.
“기름 냄새도 나. 냄새 좋다…….”
“…….”
류연화는 은하의 냄새를 좋아했다.
이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잘 적응되지 않는 은하는 내심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좋아?”
“응, 좋아.”
“그런데 어쩌지? 나 이제 씻을 건데.”
“아…….”
홀린 듯이 황홀감에 차 있던 류연화가 금세 시무룩해진다.
평소에는 잘 보여 주지 않는, 그녀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은하는 그녀에게 넌지시 권유했다.
“같이 씻을래, 우리? 오랜만에.”
“응?”
류연화의 눈이 동그래진다.
은하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으며, 푸른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마침 유설이도 지금 없으니까 우리끼리 오붓하게 씻을 수 있겠네.”
“하지만……. 다른 방에 우리 말고 문하생들도 있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 방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데.”
“소리는 어쩌려고…….”
“소리야, 안 내면 되지 않아? 그 전에 소리를 낼 일 있어? 그냥 씻기만 할 건데?”
“그냥……. 씻기만 할 거야?”
살며시 뺨을 부풀리는 류연화.
은하는 장난스럽게 키득이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
“그래서 싫어?”
류연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좋아.”
“그럼 방음 결계 치고 들어가자.”
“응.”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생각이 일치한 은하와 류연화는 얼른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욕실에서 따스하게 씻고, 노유설을 데리러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