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01)
레필리아 레소드-101화(101/398)
레필리아 레소드 101화
어벤져(8)
대귀족이 여는 파티는 당연히 사교 모임의 장이 된다.
미래의 남편감, 혹은 연줄을 만들기 위해 눈도장을 찍어두고, 인맥을 형성하는데 바빴다.
그들의 입은 쉴 새 없이 미소를 짓고, 독과 꿀을 토설했다.
아제리엘 백기사의 맥크웰은 여성들이 일부러 어깨를 부딪쳐 가면서까지 대화를 거는 남자였다.
특히 미혼인 영애에겐 최고의 인기를 갖고 있었다.
동화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수려한 이미지.
젊은 나이로 국가 군부의 요직에 앉을 실력.
그리고 그가 자라온 배경을 생각한다면 최고의 남편감으로 뽑았다.
여성들은 그를 유혹하기 위해 꽃을 피웠고, 남성들은 인맥을 만들기 위해 악수하였다.
그야말로 맥크웰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도 시종일관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파머는 한창 분위기가 잡혀 있는 맥크웰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차라리 집무실에 문서 더미를 놓고 있는 것이 더 편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피스 경이 그렇게 부탁을 한 건데 무시할 수도 없고…….’
파머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아는 피스라는 남자는 절대 불필요한 일에 행동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급한 일이었다.
파머는 맥크웰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여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여기저기 불쾌한 시선이 가시처럼 꽂혔다. 파머는 뒤통수가 가려워도 맥크웰에게 입을 열었다.
“부단장님.”
“파머 경.”
파머는 의외로 맥크웰 부단장이 반갑게 맞이하자 이상함을 느꼈다.
맥크웰은 자신을 둘러싼 여성들에게 양해의 말을 구했다.
아쉬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맥크웰은 파머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파티 외각으로 걸어 나갔다.
“휴, 살았네.”
“혹시 방해된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녀들의 수다에 진땀을 빼던 중이라네. 역시 전장의 동료가 좋긴 좋군. 위기의 순간에 이렇게 구해주다니 말이야.”
맥크웰은 눈부신 금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파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맥크웰이 자리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시선은 끊이질 않았다.
손에 든 부채로 입을 가리고 바라보는 여성들을 보니 파머는 부러움이 들었다.
“대공 각하의 손녀이신 마리엔느 양을 호위하다 늦었다지? 어떤가.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라던데.”
“대공 각하가 자랑을 늘어놓을 만하더군요. 대공 각하보다는 부단장을 본다고 밤잠을 설치셨습니다.”
파머의 능청에 맥크웰은 싫지 않은 듯 하하, 웃어 보였다.
대공의 손녀인 마리엔느에 대한 사교계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젊은 남성 대다수는 그녀를 만나 애정을 꽃피우기 위해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맥크웰 그 자신도 꽃을 찾아온 벌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회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곧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파트너를 찾게 되겠지. 대공 각하도 자신을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축복 어린 말을 나눠줄 테고.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그게…… 피스 경이 전해달란 급한 전갈이 있습니다.”
“급한 전갈?”
파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연회에 대공님을 노리는 자가 있으니 비상 대응을 부탁했습니다.”
파머의 말을 들은 맥크웰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서서히 가셨다.
백기사를 열게 한 장본인, 그리고 국가 최고 요직에 앉은 인물.
그는 순백의 아제리엘의 스승이었고, 민중의 영웅이었다.
“확실한 건가?”
“그게…….”
파머는 맥크웰의 물음에 말끝을 흐렸다.
피스가 비록 장난이나 거짓을 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은 알아도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기에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파머는 어쩔 수 없이 적혈의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하였다.
하지만 맥크웰은 들고 있던 포도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턱 끝으로 객실을 가리켰다.
중요한 사항이니만큼 혼잡한 파티장에서 떠들 이야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음악을 켜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연회장이 멀어져갔다.
* * *
맥크웰은 파머와 함께 자신의 객실에 들어섰다.
단출하게 꾸며진 객실 안에 들어선 맥크웰은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러곤 파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게.”
맥크웰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파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전하려니 영 어색하기만 하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는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도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피스 경의 이야기론 적혈의 악마가 저택 안에 잠입했다 합니다.”
“적혈의 악마!”
맥크웰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안색이 달라졌다.
나타났다 하면 수 없는 피바람을 이끄는 괴물, 그러한 것이 어느새 저택 안에 들어와 있다면 큰 문제였다.
게다가 이곳 연회에는 백기사를 이끄는 철의 대공이 있다. 또한 그를 보기 위해 모인 다른 국가의 귀빈도 함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수뇌부들이 학살당하고, 귀빈들마저 죽임을 당한다면 그 책임은 자연스럽게 로빈타 왕국이 짊어지게 된다.
심할 경우 국가 간에 전쟁, 국가의 전복을 초래할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현재 피스 경이 적혈의 악마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군……. 대공 각하의 암살이라니.”
맥크웰은 충격적인 듯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수려한 얼굴에는 그림자가 잔뜩 그려졌다.
“정말이라면 큰일이군.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네와 피스 경 둘뿐인가?”
“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진…….”
자신이 직접 확인한 사안이 아니기에 파머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맥크웰은 일어선 채로 턱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수심 어린 얼굴로 방 안을 돌아다니던 그는 곧 입술을 열어 보였다.
“그렇군. 어쨌든 고생했네.”
“네, 그럼 저는 이만…….”
마침 잘되었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파머는 서늘한 느낌이 심장을 파고듦을 느꼈다.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와 함께 뜨겁고 끈적이는 액체가 상의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움직여지지 않는 턱을 끌어당겨 뒤를 돌아보았다.
맥크웰이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머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마치 바람구멍이라도 난 듯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잘 가게.”
맥크웰은 오른손을 쭉 머리 위로 잡아당겼다. 그의 손에 있는 레이피어가 끈적이는 점액질로 적셔졌다.
파머의 격앙된 눈동자는 맥크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파머는 쉬어지지 않는 헛숨을 들이켜며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감기지 않는 눈동자는 주마등이라도 느끼는 듯 경련이 일어났다.
맥크웰은 꺼내든 손수건으로 레이피어의 피를 닦았다.
끈적이는 액체를 걷어내자 예리한 레이피어의 날이 연회장 불빛에 번뜩이기 시작했다.
맥크웰은 검날의 번뜩임을 몇 번이나 방향을 틀어 확인해 본 후 검집에 검을 넣었다. 그리고 붉은 피로 얼룩진 손수건을 파머의 얼굴 위로 던졌다.
“코스모스(Cosmos)는 기대한 만큼 일 처리가 깔끔하진 못한가 보군요. 이런 쓰레기에게도 수를 읽히다니.”
맥크웰은 파머를 죽일 때 튄 핏방울을 보고 짜증스럽게 제복 단추를 풀어 젖혔다.
그는 제복 상의를 탈의하고서 옷장 속에서 새 제복 상의를 꺼냈다.
“정확히 말해선 우리 치부 중의 하나지. 코스모스의 거룩한 전사들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두겠네.”
방의 구석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빛이 드나들지 않는 창의 옆으로 그림자 같은 거대한 인영이 움직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우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다.
맥크웰은 새 제복을 걸친 뒤 단추를 채우면서 입술을 열었다.
“코스모스도 사정이 많은 동네군요.”
“자신의 주인을 물어뜯으려는 아제리엘의 백사자가 할 말은 아니군.”
거구의 남자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오자 연회장의 불빛 속에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거구에 어울리게 잘 단련된 근육은 강한 힘이 느껴졌다.
좁고 작은 눈가 속에선 광기를 그려 넣은 듯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구시대의 낡아빠진 정치가 막을 내려야 우리 로빈타 왕국이 제국으로서 거듭날 수 있죠. 그런데 치부라는 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맥크웰은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제복에서 흰 장갑을 꺼내 꼈다.
거구의 남자는 당연한 말을 하는 상대에게 코웃음을 쳐보였다. 그러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소모품으로써 활용했으면 버려야지.”
“하하, 일개 군단과도 맞먹는다는 적혈의 악마를 소모품으로 대하시다니. 라스 님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제 목숨이 위험했겠는걸요.”
“우리의 치부는 알아서 처리한다. 뒷정리와 계약 조건을 잊지 말라.”
곧 있을 유희를 즐길 기대로 인해 라스의 눈동자는 이채를 띠었다.
조직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말살하는 것. 그리고 눈에 거슬리던 개의 버릇을 고쳐주고 그의 도도한 주인에 콧대를 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 *
붉은 융단으로 수놓인 알현실의 복도.
롬은 그 위를 걸으면서 자신이 지나온 핏빛 길을 연상하였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과거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다. 오로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뿐.
어릴 적 기억은 희뿌연 연기에 가려진 듯 떠오르질 않았다.
항상 기억나는 것은 자신에게 생을 빼앗기고 절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며 저주하는 눈빛으로 피를 토해냈다.
자신의 눈동자 색깔만큼이나 익숙한 배경은 이제 안락함 마저 느껴졌다.
하녀는 알현실로 보이는 문을 노크했다. 곧 사자의 형태를 딴 손잡이가 열렸다.
끼이익, 문 안쪽의 경첩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이 드러났다.
책상과 소파. 그리고 넓은 베란다는 대귀족의 알현실치고는 소박했다. 오히려 알현실보단 개인 서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려진 사내가 앉아 있었다.
강철이라는 별칭답게 굳게 다물어진 입가를 살짝 가리는 검은 수염. 상대를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짙은 눈썹은 평소 그의 깐깐한 성향이 느껴졌다.
한쪽 구석엔 겹겹이 쌓여 있는 서류와 책이 있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잉크와 펜은 연회를 앞두고도 일했음을 보여줬다.
옷차림을 보니 곧 연회장에 나갈 분위기였다. 하지만 롬은 그가 이 방을 나서는 일이 없으리라 단언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죽을 테니까.
하녀는 이실렌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롬은 허리를 굽히며 상대에게 예의를 취하였다. 먼저 가 있으라는 마리엔느의 말로 미루어, 그녀가 곧 오리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롬은 그전에 상대의 목숨을 취할 예정이었다.
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이며 마력을 개방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실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왜 그렇게 마리가 수선을 떠나 했더니 잘생겼구먼.”
절묘한 타이밍 덕분에 롬은 마력을 끌어 모으지 못하고서 고개를 들고 말았다.
이순의 나이대를 넘긴 사내의 허리가 굽어 있기는커녕, 웬만한 전사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