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03)
레필리아 레소드-103화(103/398)
레필리아 레소드 103화
어벤져(10)
꿀꺽.
맥크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적혈의 악마라는 이름은 숱하게 들었다.
분명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니 그게 아니었다.
명백한 살의. 그것을 내뿜는 붉은 안구의 청년.
그 뒤로 보이는 것은 피로 칠해진 방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어지럽혀진 서재와 누군가의 주검이 보였다.
두근, 두근.
맥크웰의 가슴이 뛰었다.
‘죽었다. 강철의 대제라고 불리는 그 전설의 남자가!’
이제 맥크웰은 실질적으로 아제리엘의 지휘관이 되었다.
아제리엘의 단장으로 있는 남자는 형편없는 인물이었다.
실력도, 인망도 맥크웰에게 비할 바가 안 되었다.
아제리엘의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이 나라 최고의 정예 기사들을 얻는단 의미였다. 그리고 정예들을 얻는단 의미는 곧 이 나라 최고의 군수권자가 된다는 말이었다.
전국의 시대에 군사력을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은 나라의 핵심이었다.
나라의 핵심. 즉, 중추가 된다면 이 나라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었다.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이실렌 대공의 주검. 그것을 보니 맥크웰은 적혈의 악마를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짜인 대본대로 행동해야만 했다.
맥크웰은 분노한 듯이 검을 들어 청년을 가리켰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츠르릉, 촤라락.
사방에서 검을 뽑아 드는 기사들의 분노가 울려 퍼졌다. 전투가 시작될 것을 감지한 귀족들은 허겁지겁 객실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들이 이끌고 온 호위병들은 저택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순백의 기사들뿐이었다.
순백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접견실 안에 있는 검은 청년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하지 않았다.
그저 강철의 대제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한 사실에 분노했고, 그 범인을 찢어 죽이고 싶어 했다.
“쳐라!”
맥크웰의 외침과 동시에 성난 기사들이 물결처럼 달려들었다.
맥크웰은 스스로의 연기력에 흐뭇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전투만 끝나면 명실상부한 군의 권력자로서 군림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가슴이 먹먹하다. 너무 연기에 과잉된 것은 아닌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맥크웰은 손등으로 눈가를 훑었다. 눈물이 묻어져 나왔다. 다 닦이지 않은 눈물이 턱에 맺혔다.
‘그렇군…….’
언제나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던 남자.
상대가 그 누구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맞섰던 남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선 목숨도 버릴 수 있던 남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섰어도 항상 정열적이던 남자.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약하던 남자.
청렴결백함이 대쪽 같았던 남자.
‘나 역시 그를 존경했었지.’
맥크웰은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맥크웰뿐이 아니었다. 그는 로빈타 모두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아렌 왕국에 신검의 아르빈트가 있었다면, 로빈타 왕국에는 강철의 이실렌이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로빈타는 보잘것없는 소국에 불과했다.
마이어 론 로빈타라는 일개 소영주와 농사나 짓던 일개 몰락 귀족의 만남.
그 두 사람은 노스펠리지에서 만나 개국을 하고 인재를 모았다. 많은 일을 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이 일어선 땅에서 낙엽처럼 지고 말았다.
신검 아르빈트와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남자가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다.
맥크웰은 마음이 갑갑해졌다.
애초에 자기 뜻을 믿어주고, 맡겨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맥크웰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이를 사리물었다.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이야기였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며,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검은 청년, 아니, 리에르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상대로 바라만 보았다. 조용히 오른쪽 발을 들어 땅을 디디자 그의 등 뒤로 검은 깃털들이 휘날렸다.
일순간 사람의 등 뒤로 칠흑의 날개가 펼쳐지자 분노, 그리고 용기로 치솟았던 기사들도 잠시 멈칫하였다.
“비켜.”
기사들은 거대한 존재가 눈앞에서 날개를 펼쳐내고 있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하였다.
이때 맥크웰이 선두에 서서 고함을 지르며 나섰다.
로빈타의 백사자라는 이름답게 매몰찬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적혈의 악마였다.
리에르는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젖혔다.
맥크웰의 검은 리에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아!”
맥크웰은 기합과 동시에 찌르기에서 검의 곡선을 바꿨다. 그의 검은 위에서 아래로 상대를 베어 들어갔다. 하지만 리에르는 가볍게 공격을 잡아냈다.
맥크웰은 자신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리에르를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검이 상대의 손아귀에서 힘없이 부서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부단장!”
기사들은 맥크웰이 위기에 처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전투에 끼어들었다.
리에르는 가볍게 발을 들어 땅에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검은 마법진이 연성되며 빛이 상승했다.
“모두 피해라!”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맥크웰은 산개 명령을 내렸다.
커다란 복도를 전부 메워 버린 마법진 위로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하더니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도 수십 자루는 됨직한 숫자였다.
리에르는 아무도 막아서지 않는 앞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생성된 칠흑의 검들은 기사들을 향해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으아악!”
외마디 비명이 가득했다. 기사들이 나뭇잎처럼 떨어졌다.
맥크웰은 그것을 보고 이를 사리물었다. 적혈의 악마가 악명이 높으니 어느 정도 강력할 것은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맥크웰의 오만이었고, 착각이었다.
더 이상 복도에는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 붉은 융단이 깔려 있던 복도는 더 짙은 검붉게 칠해졌다.
리에르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맥크웰은 적혈의 악마가 걸어 나갈 때마다 피가 첨벙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변은 선혈로 가득했다.
맥크웰의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기 생각 이상의 괴물이었다.
“하…… 하하.”
맥크웰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붉은 광채를 띈 눈동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첨벙, 첨벙.
리에르는 피로 적셔진 복도를 걸었다. 그가 선혈을 마음껏 뿌리고 가도 감히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들이 토해져 나왔다.
‘좀 더 다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잖아!’
리에르는 걸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얇은 입술이 이빨에 짓이겨지며 비릿한 피 맛이 혀끝으로 들어왔다.
이미 죽이는 것에 익숙해진 몸은 저절로 상대에게 반응해 버린다.
전투에 돌입했을 때 리에르에게 가능했던 것은 죽지만 않게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어려웠다.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림을 느끼면서 리에르는 스스로에게 공포를 느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이들을 찢고 싶었다. 그들의 허리를 분질러 내장이 토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것이 피칠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지독한 목마름.
리에르는 눈이 마르고 목이 말랐다. 자꾸 불끈불끈 유혹과 고통은 머릿속을 열로 들끓게 했다.
리에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미쳐 있다는 것을.
“다, 다들……!”
리에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에레사를 닮은 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한창 치장에 힘썼었다.
동경하던 맥크웰을 만나는 기쁨인지, 아니면 왠지 모르게 끌리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산양같이 감아올렸던 머리는 풀어내려 꽃으로 장식했다. 갈아입은 흰 드레스는 화사했고, 몸매를 잘 드러나게 해주었다.
난생처음 가벼운 화장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광경은 끔찍했다.
“아, 아가씨!”
그녀와 함께 있던 하녀는 비명을 질렀다. 마리엔느는 기사들이 전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리엔느의 해맑았던 눈동자는 떨려왔다. 눈물의 결정들이 눈꺼풀을 밀고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 할아버…… 지…….”
마리엔느, 그녀가 어렸을 적에 무서운 인상 때문에 피했었던 할아버지.
하지만 생김과는 다르게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사람. 그리고 구국의 영웅인 할아버지가 소녀에게는 유일한 자랑거리였었다. 소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토해내었다.
차갑게 굳어버린 이실렌의 얼굴과 몸에 고착되어가는 붉은 선혈. 그것은 다시는 소중한 존재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마리엔느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리에르는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였다.
‘에레사. 어떻게 너를 잊고 있었을까?’
항상 함께하던 소녀,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했던 금발의 여성을 떠올리며 리에르는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겨진 에레사의 죽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첫사랑을 떠올리며 리에르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에레사를 노리고 검을 뻗어오는 티미, 그리고 그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방관하고 있던 아르미안.
정신이 없던 그 당시엔 알 수 없었다. 티미가 에레사를 공격하는 순간 아르미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을. 하지만 아르미안은 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소를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붉은 미남자. 리즈를 기습하여 그를 절명하게 했다. 이후 리에르는 아르미안에게 조종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라고 종용받았다.
‘에레사가 죽었다. 유트를 죽였다. 형을 베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던 영상의 단편들이 하나하나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한다.
단 하나의 친구, 은색 머리칼의 소년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언제나 자랑스러운 형, 파에트마저 죽이고 그의 기사단마저 전멸시켰다.
결국, 밀려드는 눈물은 턱 끝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 죽이렴…….’
진녹색 머리칼의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넌 내 곁에 있어야 해. 너에겐 나밖에 없어…….’
아르미안의 서글픈 눈동자. 촉촉한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부드러운 혀끝으로 달콤한 유혹이 쏟아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리에르의 인생은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는 수레처럼 악몽이 굴러다녔다.
끔찍한 살육의 기억이 몸 곳곳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아르미안…… 너를…….’
그녀가 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런 것을 생각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치켜드는 생각들은 단 하나뿐이었다.
‘죽이겠다.’
리에르의 눈동자는 피눈물을 흘리는 듯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조직에게 어금니를 드러내게 되었다.
* * *
“어떻게 이런 일이…….”
마리엔느는 지금 보이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신음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귀족들. 그리고…….
“할…… 아버지…….”
마리엔느는 큰 충격을 받고 주저앉았다. 오열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주진 않았다. 따뜻한 손길을 보내면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져야 했으니까.
마리엔느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이실렌이 분명했다.
분명 그곳에선 사랑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롬이라는 남자를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현실은 너무나 지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