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04)
레필리아 레소드-104화(104/398)
레필리아 레소드 104화
어벤져(11)
뚜벅, 뚜벅.
피로 얼룩진 옷을 걸친 청년이 걸어왔다. 감히 그를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은 선혈로 가득했다. 한눈에 보아도 그가 범인임이 분명했다.
“내가…… 나 때문에……!”
마리엔느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떨려오는 두 손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거부했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도 현재 상황을 본다면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있었다.
마리엔느의 시야 안으로 검이 보였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떨려오는 손으로 그것을 집었다.
연약한 손으로 쥔 힐트의 느낌은 어색하기만 했다. 근육 하나 없는 마리엔느가 들어 올리기엔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마리엔느는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서슬 퍼런 눈동자로 롬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소중한 혈육을 잃어버린 마리엔느.
그녀는 이성을 잃은 채, 리에르가 지나간 핏빛 융단을 따라갔다.
마리엔느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롬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이렇게 주저앉아 울고만 있기에는 비통함이 너무나 컸다.
“아가씨!”
하녀는 무서운 눈빛으로 뛰쳐나가는 마리엔느를 보고 깜짝 놀라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참혹한 상황에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쏴아아!
퍼붓기 시작하는 빛줄기는 쉽게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장대비로도 마리엔느의 슬픔과 분노를 씻어주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검으로 원수를 찔러야지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 해도.
그녀가 연회장 밖으로 나갔을 때 밖에 쓰러져 있는 호위병들이 보였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호위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서 있는 자는 없었다.
“괴…… 물…….”
“말도 안 돼…… 겨우 한 녀석에게……!”
나름 실력에 자신 있던 사람들이었다. 실력이 없다면 귀족에게 비싼 돈으로 고용될 리 없었다.
누구 하나 적혈의 악마를 막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적혈의 악마는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 살인마였다. 하지만 지금은 죽지 않은 자가 너무나 많았다.
매우 놀랄 만한 사실도 마리엔느에겐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냉랭한 얼굴의 남자. 표정이 없는 것 같은 조각상 같은 외모였다. 하지만 가끔 보여주는 어색한 웃음과 눈동자는 다정하게 느껴졌다.
검은 청년은 마리엔느에게 있어 첫 설렘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으로 분노를 알려주었다.
뛰어난 기사, 용병도 힘없이 무너졌다. 검을 쓸 줄도 모르는 마리엔느가 가봤자 개죽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켰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그리고 화사한 드레스를 적셨다.
얇은 드레스는 흠뻑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고 머리카락은 시야를 어지럽히며 눈가에 달라붙었다.
평소라면 이런 마리엔느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검은 청년의 그림자를 뒤쫓았다.
“거기서!”
순간의 콩깍지.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큰 착각.
마리엔느는 그것이 얼마나 화가 나는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깨달았다.
리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빗속이라 소리가 전달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의 앞 머리카락은 빗물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아래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마치 야생 동물 같은 섬뜩함이 있었다.
“네가 할아버지를 죽였지?”
마리엔느는 독기 어린 눈으로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리에르는 무표정했다. 빗물에 젖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려졌다.
“그랬다면?”
“왜!”
마리엔느는 눈가에서 빗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녀는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체구로는 휘두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겉모습이 가녀려도 그녀 역시 이실렌 대공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마리엔느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도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철컹, 철컹.
어디선가 규칙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규칙적이던 소음은 이제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리엔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대비 때문에 시야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은 위압적이었다.
신의 사자들.
신이라는 미명 아래 살인을 허가받은 존재들.
그들은 녹슬지 않는 검은 갑옷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카이트 쉴드를 들고 있었다.
신을 거역하는 존재들을 말살하기 위한 창과 검. 그것들은 리에르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성전사 롬 님이 아니시던가?”
성기사들의 앞으로 우람한 체구를 가진 남성이 걸어 나왔다.
단단한 근육에 타이트하게 조여지는 흉갑. 그리고 모든 것을 부서뜨릴 것 같이 느껴지는 시커먼 워 해머(War Hammer).
그는 코스모스의 장로인 라스였다.
“롬이 아니다.”
리에르는 입을 열었다. 그의 등 뒤로 칠흑의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검은 날개가 되어 비를 튕겨내는 반사광을 일으켰다.
붉은 안구와 검은 날개를 펼쳐 든 리에르의 모습은 포식자 그 자체였다.
“리에르 아르빈트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충견에서 쓰레기로 레벨 업은 했겠군.”
라스는 리에르가 포스의 힘을 드러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코스모스에 있는 최고의 직책. 12명의 장로 중 파괴를 권장하는 라스는 무력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을 괴물이었다.
물론 그는 포스라는 존재에 대해 격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신에게 축복받은 이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신성 마법 사용이 가능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을 거역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절단할 수 있는 오러(Aura) 블레이드였다.
이 기술 하나만으로도 성기사는 일당백으로 바뀌었다.
파괴를 권장하는 라스. 그리고 일당백의 성기사들. 그들은 미쳐 날뛰는 재주밖에 없는 포스 사용자가 두렵지 않았다.
“언젠가 버릇없는 네놈과 거만한 네 주인년의 버릇을 고쳐주려 했었지.”
라스는 조소를 뱉으며 성기사들에게 손을 올려 보였다. 성기사들은 언제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검을 뽑아 들었다.
리에르는 빗속의 파편들을 맞으며 눈가를 열어 보였다.
라스는 들어 올린 손을 세로로 내렸다. 그와 동시에 성기사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마리엔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리에르는 빗속의 어둠에서 짐승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먹잇감들이 다가오는 것을.
* * *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남자가 죽었다.
그로 인해 대저택은 혼란에 휩싸여져 있었다.
순백의 기사들은 침통하게 고개를 떨궜다. 귀빈들도 갑작스러운 참변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저 대귀족과 인연을 맺고 싶었는데, 그의 장례를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맥크웰은 흐릿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장을 파악한 결과 상황은 최악이었다.
적혈의 악마를 막기는커녕 거의 전멸과 같은 전투를 당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저 적혈의 악마라는 것은 사람들의 소문이 과장된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맥크웰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목숨도, 거동도 지장은 없었다. 다만 온전한 체력이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맥크웰에게 여러 가지 보고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리엔느가 대공의 죽음을 보고 충격 받아 뒤쫓아 갔다는 것. 그리고 피스라는 기사가 대저택에서 도망쳤다는 것.
맥크웰이 기억하는 피스는 평범한 인상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맥크웰 자신도 굉장히 눈여겨보고 있던 인재였다.
‘정말로 도망친 건가?’
맥크웰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혈의 악마를 뒤쫓고 있다는 보고가 있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일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단장님, 적혈의 악마가 인근에서 전투하고 있답니다!”
맥크웰은 부하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코스모스의 장로, 라스가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순백의 기사가 적혈의 악마를 제거하고 명성을 얻는단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대공을 살해한 불구대천의 원수. 그런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있을 순 없었다.
백기사들은 맥크웰의 명령에 무리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하나의 주군. 그를 잃은 상처받은 맹수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 * *
짧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눈매를 가진 청년. 피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빗소리 속에서 중얼거렸다.
“적혈의 악마가 전투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혼란과 암운이 감도는 전장의 기운은 음산했다.
“그럴 테지. 이제 그는 적혈의 악마가 아닌, 어밴져니깐.”
노년의 남성은 피스의 말에 답변하였다.
비를 막기 위해, 그리고 얼굴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푹 눌러쓴 후드. 그 안으로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수염이 보였다.
그는 이실렌이었다.
“복수하지 못해서 안타까운가?”
“…….”
이실렌의 말에 피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가느다란 눈매로 전장을 바라봤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인가……!’
피스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불과 조금 전만 해도 피스는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 상대는 적혈의 악마. 피스의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학살자였다.
피스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그와 전투를 치렀다.
적혈의 악마가 달려들자 피스의 검이 뻗어졌다. 하지만 그의 검은 상대에게 닿지도 못하고 검은 장막에 막혔다.
포스를 지키는 절대 보호막. 피스는 검은 장막 속에 흡수된 검을 빼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이실렌 대공을 향하여 검은 칼날들이 번뜩였다.
이실렌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들을 로드(Rod)로 쳐냈다. 그러고는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가 입고 있는 제복의 깃이 기류에 펄럭였다.
피스로서도 처음 보는 이실렌의 정령 마법이었다. 하지만 리에르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진 않았다.
리에르는 손을 들어 올렸다. 곧 알현실 안은 번뜩이는 검은 칼날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것들은 그대로 살아 움직이며 이실렌을 향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이실렌을 감싸 안은 푸른 안개는 검은 칼날을 막아냈다.
리에르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들었다. 검은 번개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주변을 밝혔다.
그것을 보고 이실렌은 자신의 엄지를 물어뜯어 피를 냈다. 그러고는 합장하며 다시 주문을 읊조렸다.
이실렌의 발밑으로 육망성이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푸른 물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물 파편을 일으키며 등장한 것은 반인 반어의 형태를 한 정령이었다.
“소용없다.”
리에르는 그것을 보고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검은 번개가 이실렌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졌다. 공기마저도 산화시키는 지독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이실렌의 뒤로 소환된 푸른 정령은 입을 벌렸다.
쏴아아!
세찬 물줄기가 하나가 되어 검은 번개와 맞붙었다. 그것들은 서로 얼키설키 얽히더니 조금씩 산화되어 사라졌다.
리에르는 그사이 검은 칼날을 양손에 쥐고서 이실렌의 앞까지 당도했다. 그의 두 눈동자가 붉은 이채를 일으키며 미소를 흉내 냈다.
그가 베어드는 검은 칼날은 이실렌의 몸을 토막 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로 끝났다.
“리에르 아르빈트!”
피스는 검 채찍을 빙글빙글 돌리며 리에르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포스의 절대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아니, 그 누구라 해도 적혈의 악마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