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1)
레필리아 레소드-11화(11/398)
레필리아 레소드 11화
축제(5)
“기운이 넘치는 것은 좋은데 두 사람 다 일단 의무실에나 다녀오고 나서 다퉈라.”
유트의 말을 듣자 리에르는 잊고 있던 통증이 떠올랐다.
비록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다 해도 충격을 전부 완화해 주지는 않았다.
리에르는 쿠레드에게 얻어맞았던 곳들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연달아 시합했더니 막노동이라도 뛰는 기분이었다.
“내가 만약 첫 시합을 방심하여 상처만 입지 않았어도 전승으로 데뷔하는 건데.”
“검술보단 법률을 공부하지 그랬어? 구실을 만드는 것을 검술보다 더 잘하니까.”
유이가 힐난했다.
리에르가 유이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유이도 지지 않고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리에르는 상대를 베어버릴 듯한 매서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도 유이는 한번 붙어보겠냐는 얼굴로 도발했다.
‘아, 저 녀석이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리에르는 예전엔 사이가 이렇게 나쁘진 않았을 건데 하고 중얼거리며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유트랑 같이 검술 놀이하다가 실수로 목검이 미끄러졌던 적이 있었다.
덕분에 졸고 있던 유이의 머리에 큰 혹이 났었다.
하지만 겨우 이런 정도로 원한을 가질 리 없었다.
유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딸기 케이크를 몰래 훔쳐 먹었던 일을 떠올려 본 리에르는 다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키가 작다고 난쟁이라고 비아냥거렸던 일이나 에레사랑 비교하면서 절벽이라고 불렀을 때를 생각해 봐도 원한을 가질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리에르가 추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유이가 울컥하면서 중얼거렸다.
“혹시 어디까지 맞아봤어?”
리에르는 유이의 말에 움찔하였다.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 자칭 정령 나라 공주님이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도 주파수를 읽는 거냐?”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중얼거렸다.
유이는 리에르의 말을 듣고는 미친놈을 보는 듯한 얼굴을 지어주었다.
당연히 평범한 소녀에 불과한 유이가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남자의 속마음을 꿰뚫는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예전에 리에르는 용돈이 부족해서 몰래 모친 라일라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귀신같이 알아챈 모친이 없어진 돈 만큼 때렸었던 기억이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고기를 먹고 싶은데 자꾸 야채 종류로만 요리를 만들어주는 모친에게 대항하기 위해 몰래 재료들을 버렸다가 벌로 온종일 굶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여자란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매우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리에르는 새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유이와 리에르의 신경전에 더 신경 쓰기 싫은지 유트는 알아서 의무실에 예약을 걸었다.
곧 리에르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리에르 아르빈트 선수. 의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리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유트와 유이 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만?”
“응.”
다 같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셋 중에 다친 사람은 리에르 혼자였다.
유트, 유이 남매는 은색 머리카락이라는 것 이외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다.
유이도 유트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식의 검술은 상대를 희롱하고도 남았다.
“젠장.”
리에르는 투덜거렸다.
기사단장인 아버지와 천재인 형.
두 사람과 같은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무능력한 자신.
유트 남매를 보니 같은 핏줄에 같은 재능이란 것이 티가 났다.
하지만 왜 자신은 같은 핏줄인데도 이렇게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다녀올게.”
리에르는 안내원을 따라 의무실에 들어갔다.
안에는 흰 커튼이 쳐져 있는 간이침대 여러 개가 비치되어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전부 타박상 정도군요.”
“네.”
진료원은 리에르를 진찰해 보고는 간단하게 처방을 시작했다.
“이야, 아저씨도 진료원 하기 전에는 카에르에서 공부를 했단 말이죠.”
“네에.”
“나도 그때 검술을 했었는데, 아 진료원이 검술을 왜 했느냐고? 검술 잘하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거든. 하하, 부끄럽지만 아저씨만 한때는 다들 그랬어요.”
“네에에.”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약초와 함께 붕대로 감아준다.
붕대 안으로 뜨끈뜨끈한 온기가 전달되었다.
“아, 그때 만난 여자가 지금 와이프인데. 정말 실수했지. 그때 양다리를 걸치던 것을 들키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네에에에.”
약효는 좋았다.
금방 통증이 완화되고 몸이 개운해졌다.
“아아, 아쉽구먼.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였는데.”
“네에에에에.”
“다음에 또 다치게.”
“네에에에에에.”
리에르는 쓸데없이 말이 많은 의사에게 도망치다시피 나왔다.
-영광의 상처들이네, 리엘.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첫 경험은 원래 아프지요.”
-두 번째 경험을 겪을 때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쭉 조용하길래 자는 줄 알았더니.”
-주변에 사람 있을 때 너 혼자 떠들고 있으면 미치신 분으로 오해받을 거 아냐.
“배려 감사하네요.”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서 리에르는 웃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수련시켜 줄게.
“겨우 하루 이틀 수련한다고 좋아지는 거 있겠어요?”
-아까도 말했잖아. 넌 기본기는 잘 되어 있어. 지금 부족한 것은 요령이야.
리에르는 그녀의 말에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에게 검술을 배운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지만 리에르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리에르는 자신의 실력으로는 강해지는 것이 힘들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공주병 걸린 검에게 수련을 받는 것은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오늘 쿠레드가 휘두르는 검이 확실하게 보였어요. 다른 사람들의 검도 마찬가지고요.”
-몸이 안 따라갔을 뿐이지만. 원래 모든 교육은 백 번 듣는 것보다, 실제 한 번 해보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거든.
리에르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 어떤 강의를 들어도 머리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조금 찰과상 입었다고 봐주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다른 때 같으면 몰라도. 지금 같을 때는 환영하는 바죠.”
대회 때문에 코가 석 자였다.
리에르는 강해지고 싶었고, 그녀는 떠들고 싶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니 최고의 파트너일 수밖에 없었다.
“어? 리엘, 여기 웬일이야?”
그때 리에르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샤의 검은색 제복과 흰색 블라우스가 잘 어울리는 금발의 여성이었다.
“에렌?”
리에르는 생각지도 못하게 에레사를 만나자 반가움을 느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자면 피로도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옆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건장한 체격에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예선전에서 조금 다쳐서…….”
“어머, 예선 통과한 거야?”
에레사의 질문에 리에르는 머쓱하게 어, 응. 하는 식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반응이 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에르의 시야는 에레사의 옆에 있는 남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 처음 보는 거지? 같은 카이샤에 다니는 티미 선배야.”
“티미?”
리에르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내 남자친구.”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아르빈트구나? 반갑다. 우리 처음 보지?”
티미라고 소개된 건장한 남성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검술로 단련된 굳은살. 그 굳은살이 근육처럼 박힌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티미 아크우드.
배경이 좋은 명문가의 장남이자, 매우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재였다.
티미의 현재 랭킹은 2위.
그가 랭킹 1위가 아닌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었다.
작년 검술대회에서 그는 유트와 연장 시합을 치른 끝에 패했다.
한 끗 차이의 승부였기 때문에 다들 아쉬움을 표했었다.
그 결승전을 리에르는 지켜본 적이 있었다.
세상에 유트를 상대할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었는데, 예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날이었다.
“리엘, 뭐 하는 거야? 선배 손이 무안하게! 선배, 미안해요. 애가 옛날부터 장난기가 있어서.”
에레사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무안해할까 봐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에렌, 너 미쳤냐. 어울리지도 않는 그 콧소리는 뭐냐?’
리에르는 에레사의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에레사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가 우는 얼굴, 웃는 얼굴, 투덜거리는 얼굴, 삐친 얼굴, 화난 얼굴 등 여러 얼굴들을 보았었다.
하지만 저렇게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행복해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오로지 티미라는 남자를 향해서만 보여주는 에레사의 낯선 얼굴.
리에르는 그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무엇보다 티미라는 남자는 한눈에 보아도 다부진 체격에 남자답게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강하고, 남자다웠다.
분명히 자신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남성이었다.
리에르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여자는 에레사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에레사는 리에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보였다.
아니,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왜 검술대회에 나가려고 했던 거지……. 그래 맞다, 카이샤에 진학하려고 했지. 에레사 때문에…….’
피식, 하는 비웃음이 리에르의 입가에 지어졌다.
리에르는 지금껏 자신이 하려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저 안일한 생각으로 무사태평하게 잘될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검술에 대한 열망도, 재능도 없었다.
오로지 좋아하는 여자애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놓지 않은 검술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러한 사실을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들었다.
-리엘……?
그녀가 리에르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나지막하게 입을 연다.
“혹시 대회 출전 하나요?”
리에르의 물음에 담소를 나누고 있던 에레사와 티미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려주었다.
“당연하지! 티미 선배가 얼마나 강한데!”
“너한테 물은 건 아니거든……?”
리에르는 에레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작년에 유트에게 졌죠?”
리에르는 입가에 비아냥을 품었다.
티미는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사람 좋아 보이던 웃음이 픽, 하고 꺼져 나갔다.
카이샤에 다니는 엘리트 기사수련생인 티미가 세 살 연하인 유트에게 패배한 것은 가십거리가 되었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티미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 잊고 싶은 아픔을 리에르가 건드렸다.
성격이 좋기로 소문난 티미라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리에르의 무례한 언사에 에레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너 선배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래, 편들어줘라.’
에레사가 티미라는 남자 때문에 화를 내자, 리에르는 속이 더욱 끓어올랐다.
리에르는 결국 끓어오른 불길을 참아내지 못하고 티미를 향해서 끼얹는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근육 씨. 올해 유트랑 한 팀인데 작년의 기억 되살리지 않길 바랄게요. 그럼 전 이만.”
후회하는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애초에 속 좁은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티미라는 남자에게 모욕을 주었다.
더더군다나 자신의 실력으로 상대를 모욕을 준 것도 아니고 절친한 친구를 무기 삼아 비굴하게 이용하였다.
저벅저벅.
리에르는 걸어 나오면서 티미를 한번 흘겨보았다.
티미는 에레사의 앞이라서 억지로 화를 집어삼키는 것이 티가 났다.
그는 목에 핏줄이 서고 얼굴이 붉어졌지만, 입은 꾹 닫고 있었다.
에레사는 화가 나서 의무실 바깥으로 나가는 리에르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너 이게 무슨 무례야? 선배에게 사과 안 해? 야! 리엘.”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이냐, 이 한심한 놈.’
그렇게 속으로 뇌까리며 리에르는 의무실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믿어지지 않던 일이 사실로 벌어졌다.
에레사에게는 남자가 있었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잘난 남자가.
리에르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