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13)
레필리아 레소드-113화(113/398)
레필리아 레소드 113화
잠행(3)
리에르는 뒤로 한 걸음 회피했다. 그리고 양손에서 흡수했던 아일의 마력을 뿜어냈다.
“콰아아!”
칠흑으로 변한 나선의 고리들이 아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아일은 가까스로 몸을 숙여 회피하였다.
그가 지쳐 있기에 권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착각을 했다.
아일은 컨디션이 좋을수록 권리가 강해졌다. 하지만 리에르는 반대로 지칠수록 권리가 강해진다.
아일이 회피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리에르의 올려 차기가 들어갔다.
“컥!”
아일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순간 칠흑의 칼날들이 번뜩였다.
살갗을 도려내고, 존재를 삼켜 버리는 칠흑의 칼날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아일은 사방에서 몸을 베어내자 고통에 몸부림쳤다.
순식간에 넝마처럼 되어버린 아일은 땅바닥에 선혈을 가득 적셨다. 쓰러져서 버둥거리는 아일의 모습은 마치 밟힌 벌레와 비슷해 보였다.
리에르는 냉랭한 눈빛으로 아일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어 보였다.
“사, 살려줘.”
아일은 말살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아일은 잠시 고통도 잊은 채 얼굴을 막았다. 비굴함보다 앞서 드는 생각은 죽고 싶지 않다는 갈망뿐 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아르미안을 볼 수가 없었다. 지금껏 악착같이 살아온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너와 내가 죽였던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지.”
교단의 사람 누구 하나 용서할 생각이 없었고, 자기 자신마저 저주했다.
리에르는 그대로 검은 구체를 쏘아냈다.
“치지직, 치직!”
간헐적으로 뒤틀리는 번개가 검은 구체를 감싸 안았다. 리에르는 그 마력의 집약체를 아일을 향해 쏘았다.
그때였다. 아일과 리에르의 사이로 번뜩이는 검광이 일어났다.
리에르는 자신의 마력을 부서뜨린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몸으로 찾아온 것도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끌어올리게 하는 그녀.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투명한 날을 가진 검을 들은 채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아르…… 미안.”
리에르의 안구는 더욱 진한 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앙다물어졌던 입술 사이로 비죽비죽 광기 어린 웃음이 흘러나온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상처도 피로도 한순간 잊혔다. 너무나 보고 싶던 얼굴이었다.
“아르미아아안!”
물론 나쁜 쪽의 의미였다.
리에르는 그대로 아르미안에게 검을 찌르고 들어갔다.
앞뒤 재지 않고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공격을 보고 아르미안은 여유 있게 뒤로 물러섰다.
리에르는 찌르고 들어가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아르미안의 허리 쪽으로 검을 베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리에르의 주변에 칠흑의 칼날들이 번뜩였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아르미안을 베기 위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르미안은 도움닫기도 없이 제자리에서 아크로바틱을 하였다.
덕분에 리에르가 펼친 첫 번째 맹공은 그녀에게 상처 하나 주지 못했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을 당장 죽이지 못한 것이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머릿속으론 냉정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했다.
죽은 형과 친구, 첫사랑의 무덤에 저 여자의 목을 가져가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사선의 고리.”
리에르를 중심으로 빠르게 흑의 반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미처 반원의 영역을 피하지 못한 성기사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검게 타들어 갔다.
아일은 영역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웅크린 채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곧 사방으로 검은빛이 뿜어지며 반원 형태로 폭발하였다.
아르미안은 자신의 검을 땅에 꽂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리에르는 지금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저런 마력을 쏟아낸다는 것은 끝장을 보겠단 의미였다.
아르미안은 주문을 읊조렸다.
그녀의 맑은 음성은 보통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로 나열되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춤을 추고 노래를 시작했다.
찬트였다. 그것도 앞서 교단이 보여줬던 보편식 찬트가 아닌, 진짜 고대의 찬트였다.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그녀의 찬트에 리에르는 눈썹을 찌푸렸다. 포스로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범위 결계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오랫동안 생을 유지한 마녀라는 건가.’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공간이었다.
리에르는 속으로 당황했다. 자신의 범위 공격과 펼쳐놓은 범위 결계로 모든 것은 자신이 유리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결계가 깨지면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교단의 군대들도 시간을 끌어준 아일과 아르미안 덕분에 재정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제 그만 포기해.”
아르미안이 슬픈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리에르는 분노를 참지 않고 끊듯이 소리쳤다.
“포기? 하!”
“더 이상 싸우면 넌 죽어.”
아르미안은 리에르가 필요했다. 포스가 필요하다면 아일로 대신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오로지 리에르가 필요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너희들을 쉽게 죽이진 않을 거다.”
리에르는 칠흑의 날개를 펄럭이며 포스를 끌어모았다.
아르미안은 역시나 그가 거절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자의든지 타의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봉마진(封魔陣).”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고대 주문을 막기 위해 검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미 리에르는 주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가 던진 검은 황금빛 사슬에 묶여 사라졌다.
리에르의 사방에서 황금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사슬로 화하여 날아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내가 느끼지 못했다고?’
리에르는 자신의 보호막이 사슬 앞에선 무의미한 것을 보았다.
황금빛 사슬은 보호막을 그냥 통과한 뒤에 리에르의 발목과 손목을 묶었다.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황금빛 물들이 주변에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죽인 장로와 성기사들의 피가 황금색으로 변형되었다.
“미끼였다는 건가.”
설마 교단의 중요인물들과 정예 성기사를 전부 미끼로 삼으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교단의 인물들은 교리를 위해선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광신도들이었다.
리에르는 급속도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의 날개는 전부 칠흑의 깃털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내 날개는 산산조각이 나듯이 소멸하였다.
‘한 방에 끝내야 한다.’
리에르는 최대한 단기전으로 가려 했던 것이 오히려 큰 위기로 작용한 걸 느꼈다.
이제는 승부수를 걸 수밖에 없었다. 비록 교단의 군대를 싹 쓸어버리지 못한다 하여도 좋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녹색의 마녀만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리에르는 도망칠 체력도, 마력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미 손실된 마나들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리에르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대지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이제 그의 등 뒤로 남아 있는 칠흑의 깃털은 전부 타들어 간 지 오래였다. 그와 동시에 리에르를 중심으로 대지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리에르 아르빈트의 이름으로 말하노라.”
검게 물든 대지는 리에르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꿈틀거렸다.
“나 원하노라. 내 앞의 적을 찢으리라.”
쩌적, 쩍!
검게 물들어진 대지는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빠른 시동어를 막지 못하고 방어를 준비했다.
‘두 번째 초월기.’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갑작스러운 초월기를 예상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리에르의 두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다. 그의 무서운 시선은 오직 아르미안을 향했다.
“나 맹세하노라. 이 땅에 서 있는 것은 나 하나.”
솟아난 검은 빛기둥에서 수없이 많은 불똥이 파생되기 시작했다. 파생된 많은 빛은 리에르를 제외한 생명에게 폭격이 가해졌다.
“나 바라노라. 살아 있는 체하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리라.”
그의 주변에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듯한 검붉은 검 날이 생성되었다.
일명 홀 블레이드.
그것들의 손잡이에서 칠흑이 꿈틀거렸다. 그 칠흑은 곧 그림자로 화하고, 그 그림자는 이내 인영이 파생되었다.
순식간에 리에르의 뒤로는 100기 이상으로 이루어진 그림자 부대가 생성되었다.
“모두 정비된 부대를 움직여라! 이제 녀석은 이 초월기가 끝나면 무력하다! 살아남아라!”
당장은 버티기 위한 부대가 있는가 하면 그대로 리에르를 죽이기 위해 돌격하는 부대도 있었다.
칠장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특수부대였다.
“전원 모든 신성력을 치고 그대로 돌격한다!”
성직자들로만 이루어진 그들은 스스로에게 온갖 버프와 체력 회복을 하면서 돌격하고 있었다.
이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강력한 신앙을 바탕으로 단단하게 결집했다.
그들이 다가오자 리에르의 뒤편에 있던 그림자에게서 입이 생겨났다. 아무것도 없는 얼굴 부분에 생겨난 유일한 입은 찢어질 듯이 웃으며 칼을 쥐고 출격했다.
단말마의 비명이 전장을 휘감았다. 살아 있기 위한 발버둥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절대적으로 명중하는 죽음이 이어졌다.
아르미안은 무수히 날아드는 검은 빛줄기를 보호 주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둔탁하게 날아드는 불똥들은 강도가 강력했다.
순식간에 그녀가 자랑하는 안티 실드(Anti Shield)는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강했던가…….’
아르미안은 포스와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들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3대 포스인 리에르는 1대와 2대를 넘어서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아르미안의 시야 안으로 리에르의 초월기로 생성된 그림자들이 보였다.
일명 팬텀 나이트(Phantom Knight)라 불리는 것들은 순식간에 칠장로와 그의 부대원들을 학살했다.
그것들은 단순히 목을 베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들이 토막 낸 적의 머리를 씹어 삼키며 웃었다.
성직자들의 보호막은 그림자들의 공격에 종이처럼 잘려 나갔다.
교단의 군대는 이제 군대라고 할 수 없었다.
하늘에선 칠흑의 광선이 쏟아져 내렸고, 지상에는 베어지지 않는 그림자들이 학살을 자행했다.
삽시간에 대지는 핏물의 강이 되어 넘치기 시작했다.
아르미안의 보호막도 금세 깨져나갔다. 검은 광선들은 집요하게 그녀를 노렸고, 이제 막아낼 시간이 부족했다.
“팡!”
아르미안은 검은 광선을 맞고서 피를 토해냈다.
복부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대량의 마력이 허공에 흩어졌다. 덕분에 아르미안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통보다 앞선 편안함. 길었던 삶의 나락을 끝마쳐 주는 검은 사신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감사하고 싶었다.
몇 차례 더 공격은 이어졌다.
아르미안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눈가를 열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자 팔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검은 사신이 혼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가득 메우던 비명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무슨 생각에선지 리에르는 정적만이 존재하는 전장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아르미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 바보, 체력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얼른 안 끝내고 뭐 하는 거야…….’
비록 같이 지낸 시간은 짧으나 아르미안은 항상 리에르와 있었다.
적어도 그의 표정과 행동만 보아도 싫은지 좋은지, 몸이 아픈 건지, 기분이 좋은지 정도는 쉽게 판가름할 수 있었다.
더는 볼 수 없을 리에르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아르미안은 감겨 가는 시야를 애써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