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15)
레필리아 레소드-115화(115/398)
레필리아 레소드 115화
잠행(5)
“큭!”
리에르의 손바닥에서 시뻘건 핏물이 튀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화살이 박힌 손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적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었지?’
처음에는 아르미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증오로 여기까지 달려왔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빈사 상태로 만들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허망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리에르 자신은 지금껏 행했던 모든 일은 악이었다. 그리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교단을 초토화한다고 죄가 없었던 것으로, 다시 새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아르미안을 대하면서 리에르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그저 죽을 자리를 찾아왔을 뿐이었다.
리에르는 이제 통증도, 감각도 없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덤벼드는 적들은 이제 느릿하게 보였다.
아일은 사정없이 리에르를 난타했다. 천천히 리에르의 무릎이 바닥에 꿇려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교단의 전사들, 그리고 아일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리에르가 고개를 숙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그들로선 이겼다고, 살아남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대체 정상 상태였다면 얼마나 강하단 거냐.’
아일도 탈진한 리에르에게 반격을 당하고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성기사들도 리에르에게 다가가질 못하고 머뭇거렸다. 언제 리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일이 리에르에게 당해도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르미안 덕분이었다.
아일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세계인 아르미안.
그녀가 리에르에 의해 소멸할 처지에 놓이자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없다면, 아일 자신의 존재도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
이미 침묵 상태인 리에르지만 그에 대한 공포는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 확실하게 죽이지 않는다면 다음이라는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아일은 리에르를 끝내기 위해서 손톱에 포스를 잔뜩 끌어모았다.
“그를 죽이면 안 돼.”
아르미안이 어느새 아일을 가로막고 나섰다. 크게 다치고도 리에르를 보호하는 아르미안을 보고 아일은 눈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죽여야 해!”
“그래, 죽이긴 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르미안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당연히 아일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리에르를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당신이란 사람도 정이란 것에 휘둘리는 건가?”
“이미 봉마진에 걸렸고, 포스를 분해할 거야.”
리에르가 중앙 교단에 쳐들어 왔을 때 아슬아슬하게 준비되었던 봉마진. 그것은 아무리 강력한 존재여도 모든 힘을 빼앗을 수 있었다.
아르미안은 냉랭해 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로 서글픈 눈동자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아일은 당장에라도 리에르를 죽이고 싶어서 연신 손을 들었다가 놓았다.
한 명을 상대로 순식간에 몰살당한 교단은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치명상을 입어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목숨이 위험하여 교단 내부에 옮겨진 뒤에 치료를 받게 되었다.
당연히 장로들이 크게 항의하였다.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적혈의 악마였다. 그를 신도들 앞에서 처형해야만 위신이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선지자인 아르미안의 한마디에 모든 의견은 묵살되었다.
아르미안을 위시한 고위급 성직자들은 지하 감옥에 봉마진을 만들어놓았다.
리에르는 봉마의 감옥 안에 갇혀 겨우 생명을 유지한 상태로 있었다.
리에르는 눈을 뜨면 마법진에 의해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 전신에 남아 있던 포스의 기운은 점점 티끌도 남지 않고 소실되어 갔다.
처음 리에르가 봉마 감옥에 갇혔을 때는 심하게 발악하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만 같은 지옥이 계속 이어졌다. 순간순간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수백 번을 혼절하였다.
이대로 봉마진 안에 놓으면 곧 죽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친절한 교단은 고위 성직자를 통해서 치유를 해줬다. 덕분에 리에르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통만 겪게 되었다.
어느 날 아르미안이 리에르를 찾아왔다.
말라비틀어진 입술, 퀭한 눈빛과 파리해진 안색은 죽음의 그림자로 만연했다.
“괜찮냐고 묻지도 못하겠네.”
아르미안은 빈정거리는지, 걱정하는지 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에르는 어차피 한마디 내뱉을 말도 없어 눈가만 힘겹게 열어 보였다.
“너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 힘은 오늘 이후로 네 몸에서 사라질 거야. 마치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포스로 뛰었던 네 심장은 더 이상 그 구동을 못 하겠지. 아마 살 날도 1년 안팎일 가야.”
죽음의 선고. 평화로웠던 시간을 망가뜨린 힘. 소중한 이들에게 돌아갈 수 없게 만든 저주받은 능력.
리에르는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언제 죽는다 해도 그저 달콤한 유혹처럼 느껴졌다.
“살고 싶지 않니?”
아르미안은 대답 없는 리에르를 향해 상반신을 숙이며 물어보았다.
리에르는 마법의 사슬에 묶인 채로 벽면에 기대어 시선을 들어 보였다.
리에르는 그녀에게서 달콤한 체취를 느꼈다. 몽환적인 느낌과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지만, 조용히 눈을 감아 내렸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힘든 삶을 끝내고 싶었다.
“네 친구 유트는 살아 있어.”
“…….”
리에르는 갑작스러운 아르미안의 말에 감았던 눈가를 열어 보였다. 아르미안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리에르가 반응을 보이자 생기 있게 웃어 보였다.
“네가 죽인 줄로만 알지만, 유트는 살아 있어. 네가 폭주하고 난 이후에 1대 포스 엘 파실드가 구해줬지. 지금은 페리안 영지 쪽에 가 있는데…… 보고 싶지 않니?”
리에르는 경련을 일으키듯 안면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또한, 파에트 아르빈트도 살아 있어.”
리에르는 이 순간 눈동자에서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 리에르의 반응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멍청한 남자는 자신의 생명보다, 지인들의 소식에 반응을 보였다.
그가 살아 있게 만들려면 삶의 이유를 부과해야만 했다.
그를 갖지 못한다고 존재를 지워 버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자신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기를 원했다.
“지금은 은퇴한 네 아버지와 함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르미안은 순간적으로 말하려던 이름을 내뱉으려 다가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자기 생각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자신은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 장난을 치는 마녀였다. 사람 같은 감정은 가질 필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질투가 나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해야만 리에르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레사 역시 살아 있어.”
리에르의 두 동공은 크게 벌어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의 생존 소식. 롬에서 복수자로 돌아섰을 때 느꼈던 슬픔은 살아 있을 생각마저 저버리게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뒤바뀌게 되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존재들. 그 존재들을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대륙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말만 들어도 기뻤다.
“그녀는 너를 찾아서 대륙을 여행하고 있다더라. 엘 파실드의 일행이 되어서까지 말이지. 보고 싶지 않니?”
“으…….”
리에르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으며 눈물을 토해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지쳐 버린 몸뚱이는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에레사라는 이름은 말라붙어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눈물도 다시 흐르게 했다.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그녀를 보러 가고 싶었다.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아르미안은 억지로 씁쓸함을 밀어내었다.
가식이라도, 혹은 마음 한편이라도 자신에 대한 것들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모습 속에 아르미안이란 존재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과욕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진 그였다.
그에게 최소한의 선물을 해야만 했다.
“앞으로 네가 살 시간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겠지만.”
정말 우스웠다. 가식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준다.
“살아남으렴.”
리에르의 눈가는 이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죽은 낯빛을 하고 있던 얼굴이었다.
아르미안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마음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애초에 자신의 과욕으로 인해서 그를 망가뜨렸기에.
“유트, 파에트, 네 아버지는 우리 교단에 위협적인 영웅들이야. 우리는 그들을 포섭해 보겠지만…….”
아르미안은 지그시 눈을 감아보았다.
처음에 리에르와 만났던 그 시간, 그는 얼마나 해맑게 웃던 소년이었던지 기억했다.
자신의 심술도 다 받아주고, 괴롭혀도 능청맞게 대처하던 소년과의 시간은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안 된다면 전부 죽일 테니까.”
리에르의 두 눈은 격앙되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눈동자는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감정을 전달해 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받으며 아르미안은 억지로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말이지…….”
아르미안의 차가운 손이 리에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르미안의 손길을 거부하듯이 리에르의 반응은 거칠었다.
‘이젠 정말로 안녕.’
죽음을 기다리며 싸늘하게 식어 있던 리에르의 뺨은 온기로 적셔졌다. 아르미안은 그의 체온을 느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복수 하고 싶다면 살아남아서 발버둥 쳐봐. 포스를 잃은 네가 얼마나 싸울진 모르지만.”
리에르의 원망, 그리고 분노와 애증이 섞인 눈동자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했다.
“포스의 힘을 잃은 심장은 곧 기능을 정지하겠지. 네가 살려면…… 한 가지밖에 없단 것을 기억해.”
아르미안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분노에 몸을 떠는 리에르를 놔둔 채로 아르미안은 해맑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별인사를 했다.
‘그래, 이러면 된 거야.’
들끊는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르미안의 눈가가 촉촉이 적셔져 왔다.
신의 저주로 인해 망가지고 삐뚤어진 욕망은 한 소년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감옥 안에 갇힌 리에르의 눈가에서도 끊임없이 눈물이 밀려들어 왔다.
어긋나고 일그러진 두 사람의 운명. 이날을 기점으로 대륙을 뒤흔들었던 세 번째 포스는 소멸하게 되었다.
신의 곁으로 떠난 동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리에르 아르빈트를 찢어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교단 내 권력자가 된 아르미안은 처형을 반대했다.
물론 대외적인 변명거리는 있었다. 적혈의 악마로 이름 높은 리에르 아르빈트를 교단의 입장에서 척살함으로써 의심의 눈길을 피한다. 아울러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교단의 모습으로 신뢰도를 높인다는 생각이었다.
교단으로선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아르미안의 강한 발언을 막을 수 있을 만한 실권자는 전혀 없었다.
리에르에게는 보편적인 롱소드 한 자루와 몇 일치의 건조 식량과 기본 물자들이 제공되었다.
교단은 계획대로 리에르를 설원 속에서 버리고, 미리 모집했던 헌터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아울러 각국의 기사단에는 적혈의 악마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