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18)
레필리아 레소드-118화(118/398)
레필리아 레소드 118화
북으로(3)
악명 높은 그에게 쟁반을 집어 던질 수 있는 여자아이는 흔하지 않았다.
청년은 누군가에게 무방비하게 얻어맞은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니, 자신이 이런 적이 있었나 싶기도 했다.
청년은 3년 만에 적혈의 악마가 아닌, 리에르 아르빈트로 돌아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바보 원숭이.”
눈앞에 있는 은발의 미인은 정말로 유트의 여동생 유이였다.
청년, 아니, 리에르는 왠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분명히 사선에 있었다. 죽이고 살고, 죽이고 사는 저주받은 나선에 엉켜있던 것이 바로 전의 이야기였다.
생사를 걱정하던 자신이 옛 기억을 더듬고, 달라진 친구 여동생을 보며 놀라워하는 평범함을 느낀다. 그런 감정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하여 깊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삼일 이상 누워 있었으니 배고프지? 좀 더 쉬고 있어. 스프라도 만들어줄 테니.”
리에르는 어릴 적 유이의 모습만 기억했다. 지금 눈앞의 청초한 아가씨는 생소해서 어색함을 느꼈다. 마치 꿈만 같다.
리에르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현실이 아니라 꿈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고르게 숨을 내뱉는 유트의 편안한 얼굴. 그리고 규칙적으로 지저귀는 새소리. 그에 발맞추어 걸어가는 행인들의 노닥거림. 꿈치고는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리에르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정신이 가다듬어졌다. 그는 밖을 보기 위해 먼지 덮인 낡은 커튼을 열어젖혔다.
따사로운 햇살 덕분에 리에르는 한참 동안 눈을 가늘게 떴다. 빛에 어느 정도 명순응하자 안구 속으로 여러 가지 풍경들이 보였다.
채 눈이 녹지 않은 도로변 위에 뛰노는 어린아이들, 긴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하프를 손질하는 음유시인과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로 바쁘게 걸어가는 소녀.
눈앞의 풍경은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평화스러운 풍경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평화라는 것이 지겨웠다. 그렇기에 말썽을 부렸고, 사고를 치기 위해 노력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 지루한 삶은 이제 소망하고 소망하는 일이 되었다.
순간 리에르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 내가 있으면 안 돼.’
리에르 자신은 불행을 이끌고, 불행을 낳는 존재였다.
이제 아르미안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해도, 코스모스에 대해 알고 있는 자신을 다른 간부들이 살려둘 리 없었다.
리에르 자신이 있는 곳은 언제 전장으로 바뀌어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삼 일이나 잠들어 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따뜻한 빛을 전하겠다는 가식적인 코스모스의 포교.
그 아래 활동하는 원정단이 적혈의 악마를 제거하겠다고 움직인 것이 불과 얼마 전일이었다.
종교에 몸을 팔고, 영혼을 팔아버린 인간들에게 있어 자신의 교리와 반대되는 것들은 용납되지도, 용납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코스모스의 교리 안에 지배되는 자들은 자신의 가족이든 친구든 가리지 않고 척살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마을의 평화도 코스모스가 맘먹는다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할 수 있었다.
코스모스의 교리를 맹신하는 인물들은 광신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거룩한 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선 못할 일이 없었다.
리에르 자신 역시 코스모스의 교리 안에 있던 자였다. 코스모스의 열두 장로를 대변하는 선지자의 검으로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 죽여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살려달라는 사람을 제거해 나가던 자신.
그런 자신이 떠오를 때마다 온몸에 열기가 퍼지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아무리 세뇌를 당했다 하더라도 뿌연 안개처럼 남아 있는 살육의 기억들은 계속해서 리에르를 괴롭혔고, 속박해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런 곳에 있다가는 이 마을이 위험했다. 그리고 유트에게 다시 한번 피해를 줄지도 몰랐다.
리에르는 몽롱했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기 시작하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바닥에 발을 디딘 그는 자신의 짐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침대에서 멀지 않은 방구석에 놓인 낡은 가방. 그리고 관리가 덜 되어 이가 빠진 장검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처를 감쌀 붕대와 노숙을 위한 모포가 담긴 가방은 핏기가 서려져 있었다. 챙길 가치도 없는 낡은 가방은 볼썽사나워 보였다.
한때는 흰 천 조각으로 감겼을 이가 빠진 장검은 팔 곳도, 살 곳도 없는 폐품이었다.
하지만 리에르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을 지켜줬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정든 물건을 서슴없이 버리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가장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는 자기 자신이었기에.
리에르는 한동안 배를 곯았기 때문에 행동이 느릿느릿하고 힘이 없었다.
덕분에 짐을 챙기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 기운이 없어 간헐적으로 떨려오는 손가락으로 장검을 짚었다.
힘겹게 가방끈을 어깨에 멘 리에르는 잠들어 있는 유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자신을 찾아온 친구.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버리지 않은 친구.
리에르는 오랜만에 만난 유트와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고 싶었다.
아니, 잠시나마 얼굴을 맞댄 채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되도록 그동안에 못했던 대화를 하고 싶었으나 리에르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복수를 지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너무나 촉박했다.
무엇보다 악인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리에르가 아쉬운 마음을 내리누르고 발끝을 돌릴 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흠칫 놀란 리에르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을 들어 검집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긴 은빛 머리 소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몇 일간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한 리에르를 위해서 빨리 가져온 수프.
그 덕분에 리에르는 발목이 붙잡히게 생겼다.
리에르가 가방을 짊어진 것을 보고 유이는 대충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리에르는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따가운 시선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유이는 새삼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리에르의 얼굴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분명 머리 반 개 차이밖에 나지 않던 두 사람의 키였다.
하지만 세월의 마법 속에 리에르는 180cm 이상의 키를 가진 준수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잠시 딴생각하던 유이는 현 상황을 확실하게 하려고 입술을 열었다.
“뭐 해?”
“…….”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지나쳐서 나가는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하지만 유이는 수프가 담긴 쟁반을 들은 채로 리에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대화를 하고, 구태의연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리에르는 적혈의 악마라고 불리게 된 살기 어린 눈동자로 유이를 쏘아보았다.
검으로 밥 먹고 사는 전사들마저도 뒷걸음질하게 만드는 마왕의 눈동자.
리에르는 자신의 예상처럼 유이의 얼굴이 파리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뿐 아니라 가녀려 보이는 어깨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 덕분에 외양이 달라졌다곤 하나, 유이는 아직 10대 소녀에 불과했다.
예전에 아무리 같이 뛰어놀았던 소꿉친구라 해도, 어릴 적의 리에르와 지금의 리에르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리에르는 그녀들을 위해 서라곤 하지만, 본의 아니게 겁을 주는 것이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대로 있으면 더 큰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번에 살아 돌아온다면.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게 된다면.
그때 꼭 사과하리란 생각을 하면서 리에르는 문을 열었다.
“와…… 대박.”
유이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이라기엔 힘들었다.
아니,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리에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얼굴이 파리하게 물들었던 것은 울컥하는 것을 삼키는 중이었다.
어깨와 손이 떨렸던 것은 단순히 화가 나고 있던 것이었다.
“무슨…….”
리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고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 육중한 타격이 보디를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헙.”
리에르는 오랜만에 느끼는 강렬한 타격에 얻어맞은 배를 감싸 쥐며 헛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스……!”
갑자기 공격받고 울컥한 리에르가 항의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손가락 두 개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푹.
“아악, 내 눈!”
피할 새도 없이 눈을 찔린 리에르가 얼굴을 감싸 안고 고통스러워했다. 눈도 뜨지 못하는 리에르에게 냉랭한 유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눈알에 힘 좀 빠져?”
“…….”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고 불리는 적혈의 악마였다. 하지만 그런 괴물을 제압하는 10대 소녀가 있단 사실을 누구도 믿을 리 없었다.
리에르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유이를 쏘아보았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원한다면 옛날처럼 대무라도 해줄 수 있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어여쁜 숙녀라서.”
그렇게 말하면서 유이는 가볍게 스커트 한쪽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고는 턱 끝으로 침대 쪽을 가리켜 보이며 아직 김이 식지 않은 수프를 다시 들어 보였다.
“난 시간이 없다.”
리에르는 이제야 눈물이 멎어서 겨우겨우 눈을 떴다.
유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입에서 픽, 하는 공기 빠지는 소리를 냈다.
“놘 쉬가뉘 읍다아.”
“…….”
유이는 노골적으로 리에르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러고는 샐쭉한 눈동자로 쏘아봤다.
“되게 무게 잡는다, 너.”
쓸데없는 말장난이었다.
리에르는 더 이상 유이를 상대하지 않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꼬르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가뜩이나 없는 기운으로 몸을 움직인 데다 배까지 얻어맞았더니 배고픔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지사일지 몰랐다.
다시 한번 픽, 하는 비웃음이 들려왔다.
리에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다.
그곳엔 몸만 성장한 유이 페브리안이 어렸을 적과 똑같은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윤기가 흐르는 입술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바보 원숭이.”
“흠,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리에르는 잠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유이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적혈의 악마라는 악명으로 대륙에 알려진 남자. 피를 부르는 공포의 대마왕이 먹을 것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주세요. 겠지.”
유이는 한술 더 떠서 히죽, 웃어 보이며 사족을 달아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리에르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세 미간을 풀어 보였다.
리에르는 아까처럼 유이에게 두 눈을 찔리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제 자신은 성인이었으므로 어린애와 투덕거리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유이가 가져온 스프 속에 굵직하게 담긴 고기, 그리고 잘게 썰려진 야채들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유이는 그새 조그만 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침대 위에 탁자를 올려둔 뒤에 스프와 수저를 얹어주고 리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먹어도 좋다는 의미였다.
예전의 그녀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리에르는 경계하면서 수저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