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19)
레필리아 레소드-119화(119/398)
레필리아 레소드 119화
북으로(4)
리에르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수저를 들었다. 그러고는 국물과 야채, 고기를 같이 건져 올려 한입 베어 물었다.
음식의 따뜻한 온기가 수저를 통해 전해졌다. 그것은 리에르의 말라붙은 입술을 적셔 부드럽게 입안에 감돌았다.
“먹…… 으면 안 돼……. 안……돼…….”
유트의 신음과 함께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에르는 유트가 잠에서 깬 건지, 악몽울 꾸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오빠, 괜찮아?”
유이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통스러워하는 유트의 곁으로 다급하게 걸어갔다.
유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리에르의 눈동자는 아련하게 바뀌었다.
그가 입은 부상들은 전부 자신 때문에 입은 것이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유트가 저런 큰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을 떠올리던 리에르는 갑자기 극심한 통증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온기가 담긴 수프를 입 안에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리에르는 배 속의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목이 타는 듯이 괴로움을 느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수프를 잡고 있던 리에르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려왔다.
그는 당장에라도 검은 핏물이 입에서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항상 누군가가 목숨을 노려오는 것이 당연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그녀가 되리라고 생각하진 못했었다.
리에르는 방금 먹은 음식 속에 맹독이 담긴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행히 소량의 음식을 섭취해서 당장 목숨에 지장이 없을지는 모르나,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독을 먹게 된 것은 치명적이었다.
‘대체, 왜…….’
절대적인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그리고 너무나 보고 싶었던 친구,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의 만남.
그것이 리에르를 방심하게 했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교단의 개로서 살았다. 그리고 복수자로서 검을 들은 이후로 냉정한 마음을 유지했다. 하지만 단 한순간의 방심은 큰 위험을 불러들였다.
“넌 또 왜 그래?”
유트의 잠꼬대에 놀랐던 유이는 이번에 리에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갸우뚱거렸다.
“왜…… 왜, 나를 죽이려는 거야……!”
“뭔 말이야, 바보 원숭이. 맛없어?”
리에르는 벽면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심호흡을 반복했다.
유이는 자신이 만든 수프를 내려다보더니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넣었다.
혀끝으로 감미로운 수프의 향기를 즐기던 유이는 이내,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곧 유이는 몸을 숙여 음식물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입술을 열어 보였다.
“다, 다른 거로 가져올게.”
“…….”
서둘러 나가는 유이의 뒷모습을 보고서 리에르는 헛숨을 내뱉었다. 그는 분명히 맹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단순히 맛없는, 아니, 지독하게 맛이 없는 음식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유이는 나가다 말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움찔하였다.
“울 오빠 일어날 때까지 꼼짝하지 마. 바보 원숭이.”
리에르는 저런 말 정도는 당장에 무시하고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피로가 쌓이고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를 치르기엔 무리였다. 어차피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파서 움직이는 것도 무리였다.
“오빠 말처럼 넌 여전히 바보 같네.”
유이는 문밖에서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왠지 그녀의 목소리가 기쁜 듯이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착각이겠지.’
유이가 나간 후 리에르는 잠시 멍한 상태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달라진 게 없다는 건가…….”
리에르는 예전에는 유이의 빈정거림이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눈시울에 뜨겁게 맺힌 것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소망했다. 이룰 수 없는 일이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지금이 아닌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보라고 불려도, 둔재로 불린다 해도, 금발의 미소녀 에레사를 짝사랑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과거로 돌아가기엔 너무나 많은 길을 돌아왔지…….”
리에르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안은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검붉은 핏물로 적셔진 듯 보인다.
도망치고 싶었던 죄업.
더 이상 그것에게서 도망가지 않는다.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교단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열두 장로를 암살하고 코스모스를 약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교단의 세력은 다시 확장되어 갔다.
혼자서 교단과의 전쟁이 가능하게 했던 포스의 능력은 한순간의 실수로 소멸하였다.
지금의 자신이 교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혼자 상념을 하고 있던 리에르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과 동갑이지만 항상 점잖고, 기댈 수 있던 친구였다.
유트는 언제 깼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바보 원숭이 소릴 듣는 거다. 이 바보 놈아.”
“너…….”
유트가 곤하게 자는 모습을 봤으니 생명에 지장 없을 거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일어난 것을 보니 리에르는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잘 지냈냐고 묻진 못하겠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비록 몸 곳곳에 붕대를 감고는 있으나 유트의 안색은 좋아 보였다.
“너를 다시 만나서 기뻐.”
“…….”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설움, 외로움, 감동이라는 여러 가지 단어들로 점철되었다.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여전한 친구의 반응을 보고 유트는 픽,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어.”
리에르 자신도 적혈의 악마에 관련된 소문들을 아는데 유트가 모를 리 없었다.
그 소문들이 대다수 과장이 포함되었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그 중심에 있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기에.
“들려주고 싶지 않아.”
“아니, 들어야 해.”
유트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단호하게 답했다.
대외적으로 교단은 진리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보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악마로서 조명되고 있었다.
“네 생각은 알겠어.”
유트는 한숨을 쉬었다.
“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단과 악연이 있는 사람이니까.”
“뭐……?”
리에르는 유트의 말에 어안이벙벙해졌다.
그가 교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악역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트와 유이.
두 남매의 보금자리를 불태우고 비극을 선사했던 장본인은 교단이었다.
유트의 착 가라앉은 눈동자는 아직도 그들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는 이제 리에르에게도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에르와 유트는 서로 말없이 시선만 주고받았다. 유트는 먼저 후우,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일단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 참고로 너 예전에 우리 집에서 애플파이 먹고서 기절해서 기억 잃은 적이 있어.”
갑자기 생뚱맞은 유트의 이야기에 리에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리에르는 유트의 말을 들으니 무언가 생각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안개가 낀 것처럼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런 리에르의 반응에 상관없이 유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고는 말을 마무리했다.
“그 파이 유이가 만든 거야.”
“……뭐? 무슨 말이야?”
리에르의 물음에 유트는 자리에 누운 채로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이는 아까 말한 것처럼 다시 음식을 가져왔다. 하지만 리에르의 눈가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따뜻한 김을 허공에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수프. 그릇 속에서는 해괴하게 생긴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빨판을 움직여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이는 콧대를 세우면서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딱히 너 주려고 만든 건 아니지만, 울 오빠가 일어나지 않아서 운이 좋은 줄 알아.”
‘그럴 리가……? 조금 전만 해도 나랑 계속 대화했는…….’
리에르는 유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트는 입을 꼭 다물고 곤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리에르는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엔 배에서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그렇다고 수프를 먹자니 그릇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수상한 빨판 생명체가 신경에 거슬렸다.
“자.”
유이는 리에르가 먹기 좋도록 작은 탁자 위에 수프와 수저를 올려주었다.
그동안 리에르는 수프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 * *
“그냥 먹지 말지 그랬냐.”
유트가 좀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리에르는 지금 빈사 상태가 되어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이가 가져온 음식을 리에르는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촉수가 달린 괴생명체는 리에르의 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리에르는 적혈의 악마라는 칭호답게 그것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녀석은 리에르의 입안에서 도망 나왔다 씹혔다, 도망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잠잠해졌다.
“헐…….”
그 광경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온 유이마저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로 앞에서 눈을 깜박거리면서 쳐다보는데…… 어쩌란 거야.”
리에르는 오랜만에 유트를 향해 볼멘 말을 내뱉었다.
이미 씹어 삼킨 괴생명체는 아직도 소화되지 않고 리에르의 뱃속을 휘젓고 다녔다. 덕분에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널 보니까 유이가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손수 음식도 만들어 오고.”
“두 번만 반가웠다간 목숨이 남아나지 않겠다.”
리에르의 불평에 유트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 봬도 요리하는 거 되게 좋아해.”
“그거참 불행한 일이네, 인류에게는.”
리에르는 단언할 수 있었다. 유이의 음식을 먹어봤다면 인류를 들먹이는 자신을 절대로 이해하리란 것을.
리에르는 집에서 먹었던 라일라의 음식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그래도 그 녀석 요리를 대접하는 남자는 너와 나 정도밖에 없어.”
“너란 녀석은 위로에 익숙하지 못하구나?”
리에르는 오랜만에 자신이 적혈의 악마라는 사실도 잊어먹고 있었다.
유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영지에서 유이가 얼마나 인기 좋은데.”
“충혈 눈알이? 하, 너희 영지 아가씨는 오크들만 모인 건 아니겠지?”
“네 눈에는 유이가 그렇게 보이는 거야?”
리에르는 유트가 이전과 다르게 짓궂어졌다고 생각되었다.
유트는 리에르가 쏘아보든 말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순순히 대답하면 리에르 아르빈트가 아니었다.
“절벽에, 눈만 치켜 올라가고, 충혈 눈알에, 성격도 안 좋고, 게다가 그 장난 아닌 음식까지. 더 대야 하나?”
“유이 듣고 있다, 지금.”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황하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유트는 맑은 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하하, 대륙 최강자가 겨우 여자애 하나에게 겁먹는 모습이라니. 소문내기 좋아하는 음유시인에게라도 들려주고 싶은걸.”
“너…… 성격 안 좋아진 것 같다……?”
리에르의 힐난에 유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