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3)
레필리아 레소드-123화(123/398)
레필리아 레소드 123화
광전사의 노래(1)
“이리 와봐.”
은회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아침 댓바람부터 손을 까딱거렸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단도가 들려져 있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 리에르는 파리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쳐보였다.
“대체 네가 무슨 상관인데!”
“친절할 때 와라, 늦으면 목에 상처 날 수 있으니. 바보 원숭이.”
은색 머리카락의 소녀, 유이는 겉으로 보이는 가녀린 외모와는 전혀 다른 말투를 사용했다. 리에르는 그녀의 말투에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침부터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고 유트는 쿡쿡, 웃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사이좋다니깐.”
“어디가 좋아 보인단 거냐! 네 여동생 좀 말려!”
리에르는 남의 속도 모르고 약 올리는 유트의 말에 성을 냈다.
사건의 발단은 매우 단순했다.
유트가 거주하는 페리안 영지로 가기 위해선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자면 여행을 해야 했고, 가는 길에 마을이 없는 곳은 노숙해야 했다.
남녀를 구분하고 노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짚과 마른 나뭇잎을 넣는다. 그 안에서 침구류로 몸을 똘똘 말고 잔다지만 모닥불이 꺼지면 추위가 찾아들었다. 아울러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에 불침번을 서야만 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야외에는 맹수들이 살고 있으며, 독을 가진 곤충들이 우글거린다.
또한, 잠들어 있는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야행성 몬스터는 번뜩이는 눈을 두리번거린다.
얼음 왕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유트마저도 불편한 잠자리에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피부가 거칠어졌다.
유트마저 그러니 한창때 소녀인 유이는 말도 못 하게 고충이 심했다.
연신 냇가 쪽으로 가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머리카락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그런 두 사람에 비해 리에르는 의외로 쌩쌩했다. 표정도 맑았으며,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건조 식량과 수프를 준비하는 사람은 리에르였다.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리에르는 오랜 도주 생활로 인해 노숙에 익숙했다. 아울러 그는 불침번을 서는 데에도 익숙해서 피곤함도 덜했다.
유이는 피곤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 준비를 하는 리에르를 보니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트집 잡은 것이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리에르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전투할 때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불편하지도 않았어?”
유이의 딴죽에 리에르가 즉답했다.
“너도 길잖아.”
전쟁은 시작되었다. 유이는 자신과 털긴 바보 원숭이가 똑같으냐는 억지로 전투를 시작했다.
유이는 능숙한 사냥꾼처럼 날이 번뜩이는 단검을 흔들었다.
리에르는 활시위에 겨냥당하는 사슴처럼 눈망울을 빛내며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그 징그러운 머리카락 잘라줄게.”
“정확히 말해. 내 머리카락인지, 내 목인지.”
단검은 유이의 왼손과 오른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위협감을 일으켰다. 리에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감싸면서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사실 리에르가 머리카락이 길게 된 이유는 외형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귀찮아서 내버려 뒀더니 길어지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충 길어지면 한 손으로 쥐어틀고서 단검으로 잘라내기만 했다.
교단에 가면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암살하러 다니는 처지에 한가롭게 머리를 깎을 여유는 없었다.
긴 머리카락이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이의 기세에 눌려 리에르는 도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유이는 능숙한 사냥꾼처럼 그를 몰아갔다.
결국, 리에르는 막다른 구석에 몰렸다. 도망칠 곳이 사라진 그는 결국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붙들렸다.
리에르는 유이에게 강제로 연행당해 앉혀졌다. 뒷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는 유이의 손이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
사각, 사각.
리에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허공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저 귀찮아서 자르는 것을 잊어먹었던 머리카락에 불과했다. 하지만 타인의 의지 때문에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은 왠지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리에르는 순간적으로 실연당한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잘라낸다는 징크스를 떠올렸다.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순간 그의 목덜미에 서늘한 칼날이 느껴졌다.
“움직이면 목에 상처 날지도 몰라. 바보 원숭이.”
“…….”
리에르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리에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존재로서 대륙에 군림하였다.
비록 대외적인 명성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림자 뒤편의 최강자였다.
하지만 포스를 잃은 그는 10대 소녀에게 목덜미를 붙들리는 신세에 불과했다. 애초에 포스가 있어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었겠지만.
유이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은 성장한 몸 이외엔 없었다.
“노숙을 좋아하니, 야생 원숭이답네.”
서걱, 서걱.
머리 뒤에 잘 드는 단도를 들고 있으니 리에르는 함부로 말대답도 못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녀의 손놀림은 숙련되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를 매만지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말투는 투덜거려도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손길은 섬세하고 다정했다.
“이렇게 노숙을 계속해야만 할 정도로 힘들었겠지.”
왠지 모르게 유이의 말투가 안쓰러움이 묻어나왔다.
춥고 배고픔 따위는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힘들었던 것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리에르는 선잠을 자면서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검을 뽑아 들었다. 몇 개월 동안 입 한번 열지 않고 살아왔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 비해선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언제 누군가가 튀어나와 비수를 들이댈지 몰라 경계했던 나날들.
그러나 지금은 소중한 지인들과 대화를 하면서 평화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도주라는 단어는 어느새 여행이라는 의미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리에르에게 있어서 기적이었다.
“자.”
유이의 손길이 멈췄다. 제법 바닥에 검은 머리카락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느새 리에르의 머리카락은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유이는 상대적으로 긴 머리카락들을 쓸어 올리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가까이 달라붙은 유이의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선머슴같이 짧은 머리카락. 복장도 투박했고, 행동은 까칠했던 소녀. 밉살스러운 소리만 골라서 하고, 어지간히 투덕거렸던 소녀였다.
불과 3년의 세월이 지났을 뿐이었다.
지금의 유이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묶고 있었다. 긴 머리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성숙해 보이고 여성스러웠다. 피부는 백옥처럼 맑고 투명하게 바뀌었다.
토끼를 연상시키는 붉은 홍채. 매끄럽게 다듬어진 몸의 곡선.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초승달 형태의 귀걸이. 더군다나 가까이 올수록 더 짙게 느껴지는 달콤한 체취.
리에르는 왠지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얼굴이 붉혀졌다. 애써 그런 어색함을 밀어내기 위해 그는 귓불을 긁적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순간적으로 사레가 들려 기침을 시작했다.
“가만있어!”
유이는 단도를 가까이 대고 있는데 머리를 움직이는 리에르 때문에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그 순간 리에르는 뒤통수에 부드럽고 물컹한 무언가를 느끼며 움찔했다.
퍽!
대번 유이는 리에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기침하다가 얻어맞은 리에르는 그녀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변명했다.
“고의가 아니잖아!”
“바보 원숭이에, 야생 원숭이. 이제는 발정 원숭이지? 이 치한아!”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유이의 당황한 얼굴이었다.
신기한 광경이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다. 화가 난 유이의 손에는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살기등등한 유이의 모습에 리에르는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삭였다. 그러더니 생각난 것이 있던지 입을 열어 보였다.
“근데 마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크더라.”
쉬익.
유이가 들고 있던 단도가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리에르는 유이를 피해 수풀 속으로 도망갔다.
유이는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짐 속에서 활과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리에르가 도망친 수풀 속으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발정 원숭이, 넌 절대로 죽었어!”
리에르와 유이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고 유트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한창 힘든 친구에겐 차라리 저렇게 사는 것이 어울렸다.
힘든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친구.
그런 친구의 우는 모습은 유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힘든 일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같은 포스인 리즈에게 리에르에 관련된 일들을 상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험과 연륜이 갖춰져 있었다. 즉, 리에르에게 조언하기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리에르를 쫓아간 유이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활시위에 화살을 꽂아 넣었다.
그녀는 자기 딴엔 리에르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리어 성희롱을 당할 줄은 몰랐기에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 독을 품었다.
유이는 매의 눈으로 리에르를 물색했다. 어찌나 잘 숨었는지 리에르는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이의 귓가에 익숙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유이는 샐쭉한 표정으로 활을 들어 보였다. 진심으로 그를 맞출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몸을 스치도록 해서 겁을 줘야 할 필요는 있었다.
‘어?’
유이는 화살을 재어놓다 깜짝 놀랐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바닥에 떨어진 붉은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기침이 들려오는 수풀까지 간헐적으로 흘려져 있었다.
유이는 그러고 보니 리에르가 계속 기침을 멈추지 못하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내 생명은 1년, 아니,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은 그 이하일 거야.’
유이는 충격적인 리에르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굳이 두 사람의 말을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음식을 먹고 탈이 난 리에르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소화제라도 가져다주려고 다시 두 사람의 방을 찾아왔었다.
유이가 문의 고리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리에르는 유트에게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사형선고를.
유이는 그 말을 듣고서 방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지금 방 안에 들어가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한참 서 있다가 그곳을 조용히 떠났다. 그날 밤 그녀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이에게 있어서 리에르는 매우 특별한 소꿉친구였다.
어릴 적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던 그녀에게 있어 유일하리만큼 대화하고, 토닥거릴 수 있는 상대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유트 대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내 리에르의 기침이 잦아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유이는 서둘러 몸을 피하려 했다.
바스락.
하지만 유이의 신발이 나뭇가지를 밟아 소리가 나버렸다. 자연히 리에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유이의 당혹스러운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리에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려 보였다.
“뭐야, 실수한 것 가지고 무기까지 들고 나온 거야? 불쾌한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일부러 유이를 도발했다. 하지만 유이는 리에르를 공격하긴커녕 조용하기만 했다.
그녀의 시선은 리에르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에르의 얼굴에는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입을 틀어막았던 손에는 선혈 자국이 가득했다.
유이의 홍채는 리에르의 손에서 얼굴로 옮겨졌다. 그냥 멍하니 서 있는 유이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리에르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유이가 화살이라도 쏴야만 했다. 하지만 덤비기는커녕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너…….”
유이의 조그만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처럼 샐쭉거리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얼굴을 보면서 리에르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