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4)
레필리아 레소드-124화(124/398)
레필리아 레소드 124화
광전사의 노래(2)
리에르는 예전처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오히려 웬만한 사람들보다 눈치가 배 이상 빨라졌다.
때문에 그는 이제 확신하고 있었다. 유이가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다는 것을.
리에르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그때 리에르의 귓가에 쇠와 쇠가 마찰하는 철의 비명이 들려왔다.
끼기긱. 챙, 채엥!
리에르와 유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벌어지는 전투였다. 리에르는 자연스럽게 경계심을 바짝 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점점 소리는 잦아들고, 비명이 연이어졌다. 급한 상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리에르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유트를 데리고 와.”
리에르는 따라오는 유이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유이는 흥, 하는 코웃음을 쳐 보이며 뒤따랐다.
유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지는 교전을 오빠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금 전만 해도 심각하게 각혈을 하던 바보 원숭이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천천히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까지 다가갔을 때, 지독한 피 냄새가 두 사람을 반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들은 전부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참혹한 살육 현장을 보고 혀끝을 차 보였다.
병장기가 부딪힌 소리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전투가 끝났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일방적인 전투였다는 것.
리에르는 죽어 있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체는 하나같이 입고 있던 갑옷째로 몸뚱이가 잘려 나가 있었다. 식지 않은 피가 살점 위로 졸졸 흘러내렸다.
‘대단한 힘이군.’
리에르는 누군지는 모르나 상대의 실력이 놀라웠다.
경계 때문에 천천히 왔다지만, 전투가 벌어진 추정시간은 5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 많은 사람을 해치웠다는 것은 압도적이어야 했다.
물론 다수와 다수의 싸움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리에르는 바닥에 팬 발자국들을 바라봤다.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은 다수가 한 명을 상대로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리고 그 한 명에게 전부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참극이 벌어진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리에르는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대지의 기억을 마법으로 읽을 준비를 했다.
“나 좀 잠깐 지켜줘, 스캔 좀 해봐야…….”
말을 마치려던 리에르는 유이의 파리한 표정을 보고 멈칫하였다.
아니, 파리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까지 푸르스름한 채,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어, 응?”
리에르가 부르자 유이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이 평소 같지 않자 리에르는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어디 안 좋냐?”
“뭐가…….”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고운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그녀의 짜증스러운 말투를 들은 리에르는 안심이 되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시체의 옷을 들춰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서 스캔 좀…….”
“꺄악!”
리에르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꺄악?”
리에르는 자신의 귀에서 들린 비명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귀를 의심하였다. 하지만 귀의 신경이 고장 난 것은 아니었다.
유이는 등을 돌린 채로 은빛 머리카락을 감싸 안은 채 쭈그려 앉아 있었다.
보기에도 처량하게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저기 너 설마…….”
“마, 말하지 마!”
리에르는 허, 하는 숨을 내뱉었다. 누가 뭐라 해도 유이의 반응은 시체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시체보단 사방에 퍼져 있는 혈흔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전혀 모르고 있던 유이의 트라우마.
그녀는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양친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 잔혹한 칼날 아래 호화로웠던 방 안이 붉은 칠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 기억은 아직 그녀의 전신에 각인되어 피만 보아도 패닉을 일으키는 체질이 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전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마나를 사용하려다 중단했다. 마법을 사용하려면 집중을 해야 했다.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리즈나 엘 같은 고위급 마법사들은 회피 행동을 하면서도 주문을 외우지만 리에르에겐 한참 무리인 범위였다.
덜덜 떨고 있는 유이의 모습을 보며 리에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유이의 가녀린 어깨 사이로 빛의 알갱이를 반사하는 은색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떨어져서 보니 더욱 작아 보이는 그녀의 체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였다.
리에르는 저렇게 무서움이 많은 녀석에게 지금껏 괴롭힘을 당했다.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리에르는 패닉 상태의 유이를 가만둘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목을 붙들었다.
아무런 장애 없이 잡은 그녀의 손목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런 손으로 자신이 얻어맞았다고 생각하니 리에르는 기가 막혔다.
리에르의 손이 닿자 덜덜 떨고 있던 유이는 그제야 진정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적셔진 붉은 홍채를 들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토끼를 연상시키자 리에르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웃었다간 유이의 단도가 허벅지를 찌를지도 몰랐다.
“이제…….”
유이의 조그만 입술이 살며시 열어졌다.
“재미 들렸나 봐, 내 몸을 주물떡 거리는 게 즐거워?”
무슨 악당이라도 되는 듯이 유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악랄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뒷걸음을 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하고 있던 녀석이…….’
리에르는 민망하기도 하고 기분 상하기도해서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며 눈썹을 찌푸렸다.
“빨리 일어나, 이런 곳을 싫어하면 왜 따라온 거야. 일단 유트가 있던 쪽으로 되돌아가자. 전투가 벌어지면 당연히 누군가 죽게 되고 피가 낭자해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하나? 전부 당근 들고서 찔러댈 줄 알았어?”
유이는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툴툴거리는 리에르가 먼저 뒤돌아서서 걷자, 유이는 잔뜩 짜증 난 목소리 투로 답했다.
“시끄러워, 멍청아.”
리에르는 괜히 신경 써줬다가 잔뜩 망신만 당하자 머리만 긁적였다.
‘저 녀석 성격은 뻔히 알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리에르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다.
그는 손으로 수풀을 걷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유이가 따라오든 말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바삭, 바삭.
풀잎이 꺾이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불어오는 풀벌레 소리.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피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갑자기 리에르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순간적으로 주변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일반인, 아니, 웬만한 실력자는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을 감지하는 데에 있어 리에르는 비상할 정도로 발달돼 있었다.
그는 심상치 않은 낌새에 손을 검집에 가져다 대었다. 직감적으로 그는 알 수 있었다.
‘놈이다.’
방금 보았던 살육의 현장. 그 현장을 만든 장본인이 분명했다.
리에르 자신이 예전처럼 포스 사용자였다면 그 누구라 해도 싸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픈 몸으로는.
리에르는 뒤따라오는 유이를 흘낏 쳐다보았다. 시큰둥한 유이의 눈빛이 뭘 쳐다보냐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지금 다가오는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수풀이 우거진 상태이기에 사물에 보이는 것은 풀포기뿐이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옅은 안개가 끼기 시작해서 시야 확보가 힘들었다.
리에르는 제자리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유이는 갑자기 멈춰선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까 전엔 가슴, 그리고 손목. 이제는 껴안기까지!”
유이가 대번 리에르의 턱을 한 대 치려 했다. 그 순간 리에르는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무기 꺼내.”
갑작스러운 리에르의 행동과 말에 유이는 망설임을 길게 하지 않았다. 리에르는 바로 두 눈을 감고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라락, 나뭇잎을 부서뜨리는 발걸음. 음산하게 뿜어지는 숨소리. 모든 감각이 극대화되었을 때 리에르는 슬며시 눈을 열고 앞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기 전에는 모든 시야가 가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눈을 다시 뜨고 나서는 미시적인 사물로 모든 시야가 뒤틀려 보였다.
주변의 수풀들은 녹색의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품 안에 안고 있는 유이의 모습은 붉은 열기로 가득했다.
후우, 하아.
자신의 숨소리마저 느릿하게 귓가를 자극했다. 세상 모든 것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옅은 안개는 검은빛으로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짐승처럼 주변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시커먼 형체였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 천천히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것은 붉은 안광을 뿌리며 입에서 연기를 훑어내고 있었다.
‘보고 있다.’
리에르는 검은 형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의 시선으로 인해 주변의 장애물들은 의미가 없었다. 검은 형체는 지독하게 차가운 음산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리에르는 식은땀이 흘렀다.
두근두근.
리에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눈 한 번이라도 깜박거리면 그것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덤벼들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형체는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옅은 안개들은 산들바람에 밀려 산산이 흩어졌다.
리에르는 긴장을 놓치지 않고 좀 더 주변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순간의 오싹한 기분, 그리고 마나의 시선으로만 느낄 수 있는 절대 오감은 위험을 알렸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은 이제 보이지 않는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 때문에 리에르가 긴장하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많은 전투로 인해 자신보다 약한, 그리고 강한 존재들을 상대해 왔었다.
하지만 이렇게 전투 의지로만 가득한, 지독한 분노로만 가득한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머리부터 몸 끝까지 증오라는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 같은 생명체, 아니,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 온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체에는 체온, 즉, 불의 마나점이 보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방금 마주친 상대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유이만 봐도 그랬다.
수분을 포함한 물의 마나점. 그리고 온기를 품은 불의 마나점이 깃들어 있었다. 위험이 사라지자 리에르는 유이를 품에서 놓았다.
리에르는 유이에게 상황 설명을 위해 입가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아직 마나의 시선을 풀지 않은 그의 시야 안으로 유이의 몸 전신이 불의 마나점으로 가득 찼다.
리에르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마나의 시선을 거둬들였다. 활과 화살을 들고 있던 유이는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깜박였다. 리에르는 갑자기 옆구리에 강렬한 타격이 전해졌다.
훌륭하고 깨끗한 보디 블로우였다.
“뭐 하는 짓이야!”
리에르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번 성을 냈다. 유이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않는 장밋빛 얼굴. 그녀의 윤기 나는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할 말이지, 이 치한 원숭아!”
“와, 충혈 눈알. 방금 뭔 일이 있었는지나 알고 있는 거?”
“응, 잘 알고 있지. 호색 원숭아.”
“…….”
리에르는 깨닫게 되었다. 지금 그 어떤 말을 해도 유이가 들어줄 상황은 아니었다. 덕분에 그는 설명을 포기한 채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