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5)
레필리아 레소드-125화(125/398)
레필리아 레소드 125화
광전사의 노래(3)
유이는 리에르가 다가오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자신을 만지작거리면 당장에라도 화살을 쏘아버릴 기세였다.
두 사람이 한창 분위기가 어색할 때 타이밍 좋게 유트가 수풀을 해치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유트는 두 사람이 수풀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자 의아했다. 더군다나 유이의 비명까지 들려오자 유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오해를 불러들이는 유이의 표정 때문에 리에르는 자초지종을 열렬히 설명했다. 리에르의 이야기를 다 들은 유트는 흠, 하는 숨을 내뱉으며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 오면서 안개를 보긴 했었어. 금방 사라져서 이상했지만…… 일단 아까 그 장소로 가보자. 우리 영지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확인해야겠다.”
리에르와 유트, 그리고 유이 세 사람은 살육이 벌어진 현장으로 다가갔다.
유이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고 싶진 않았던지 유트의 등 뒤로 숨어 있었다.
리에르는 의외로 여자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는 유이를 보고 신기했다. 그녀라면 비명보단 욕지기를 내뱉으며 침을 뱉을 거로 생각했다.
‘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인가…….’
리에르는 혼자서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참혹한 살육의 현장은 아무리 익숙하다 해도 아무 감정 없이 보긴 힘들었다.
붉은 선혈의 비린내, 검상 위로 쏟아져 내린 연분홍 내장들은 금세 벌레 떼가 모여들어 꿈틀거린다.
“전부 일격에 갔군.”
유트는 상처들을 볼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리에르가 바로 받았다.
“혼자서 열 명을 3분 안에 해치웠어.”
“그래, 강한 놈이야. 죽은 남자들은 뼈가 굵은 용병들로 보이는데, 단 일격에 죽었어. 이놈 뭔가 있다.”
유트는 각자가 들고 있는 무기들이 하나같이 다양한 것을 보고 용병임을 눈치챘다.
정규군이라면 정형화된 갑옷과 비슷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시체들은 양날 도끼, 양손검과 블랙잭 등 다양한 무기를 개성 있게 들고 있었다.
용병이라는 족속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생업을 하는 부류였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거칠고 통제받길 싫어하고 괴짜가 많았다.
무엇보다 아집도 강하며 드세기에 누군가와 협동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현장의 발자국과 전투의 흔적은 의외에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한 명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일시 분란하게 움직였다.
무엇보다 잘 짜인 포진으로 상대를 검진 속에 몰아넣었다. 이런 팀워크와 기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용병들이란 의미였다.
“이건 뭐지.”
유트는 바닥의 발자국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이 묵직한 발걸음. 적의 일격을 받아낸 모양인데 비정상적으로 패였어.”
깊게 팬 발자국.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무릎을 구부린 자국이 의미하는 것은 상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내고 균형을 잃은 거로 보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있었다.
시체들의 상처는 롱소드 정도의 무기에 당한 거로 보였다. 하지만 패인 발자국의 주인공이 들고 있는 무기는 양날 도끼였다.
롱소드와 양날 도끼의 무게 차이만 해도 엄청났다. 그런데 아무리 힘의 차이가 있어도 오히려 도끼 쪽이 밀린단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체들의 검상은 롱소드야. 하지만 양날 도끼를 들었던 용병을 죽인 무기는 핼버드로군.”
아무리 무력의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젓가락으로 목검을 부숴 버릴 순 없다. 유트의 말을 이어 리에르도 입을 열었다.
“롱소드에 시체들, 그리고 양날 도끼에 시체들. 전부 같은 방식이야. 그리고…….”
둘은 입을 모아 말했다.
“발자국이 없어.”
피를 무서워하는 유이는 유트의 등 뒤에 숨어 있는 덕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질 못했다.
사람뿐 아니라 몬스터도, 대지를 걷는 모든 생명체도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은 족적(足跡)이었다.
하지만 전투 현장에는 용병들의 발자국밖에 없었다.
그들을 죽인 주인공의 발자국은 단 한 개도 보이질 않았다.
구태여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 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도로가 없는 외진 숲이었기 때문에.
“아까 유이와 함께 있을 때 수풀 속에서 놈과 마주쳤어. 직접 맞부딪힌 건 아니지만, 내 마법을 꿰뚫어 보고 오히려 그쪽에서 쳐다보더라.”
유트가 운영하는 영지의 세력권 안에 간당간당하게 들어올 만한 지역이었다.
몇 년 동안 유트는 영지를 수호하기 위해 강한 용병들을 끌어모았다. 아울러 검을 잘 다루는 주인 없는 기사와 검객들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존재는 만난 적이 없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기. 압도적인 무력. 더더군다나 마법까지 파훼시킬 수 있는 인간은 기억 안에 없었다.
“그 녀석의 몸은 그릇이라고밖에 말 못 하겠어. 그저 그 안에 있는 분노와 증오 덩어리들이 움직이는 시체나 다른 바 없어.”
리에르는 그것이 살아 있지 않은 것임을 확신했다. 아무런 온기를 갖지 않는 육체는 오로지 죽은 자의 것일 뿐이었다.
“놈을 잡고 싶지만…… 지금은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야.”
유트는 자기 영지 내에서 벌어진 살인에 관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영지에 도착해서 친구의 몸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트의 의견에 리에르 또한 이견을 달진 않았다. 유이는 빨리 이 피비린내 나는 소굴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아까 보았던 그 검은 존재에 대해서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가능하면 최대한 그것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앞서서 그것과 다시 마주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과 유이를 상대로 왜 돌아섰을지 그 이유도 궁금했다.
유트, 유이, 그리고 리에르는 사건에 대해서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 넣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앞으로 열흘이면 유트의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짐은 유트와 리에르가 짊어지고 유이는 자신의 체온을 따뜻하게 지켜줄 로브만 걸친 채로 뒤따라 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왠지 밉살스러워서 리에르는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넌 왜 아무것도 안 들어?”
“넌 나 같은 캐릭터가 짐 들고 가는 거 봤어?”
유이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리에르는 이해가 간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기야 하지. 너 같은 악랄한 캐릭터들은 나처럼 순수한 캐릭터를 등쳐먹는 법이니까.”
피잇!
전광석화 같은 화살이 리에르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 틈만 나면 공격하는 버릇 고쳐!”
“시끄러워, 바보 원숭아!”
“너 충혈 눈알, 왜 맨날 나보고 원숭이래? 내가 어디 봐서 원숭이를 닮았단 거야! 나도 이 정도 외모면 아가씨들이 좋아 죽는 다거든?”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나.
라고 말하는 듯한 유이의 눈빛. 그래도 리에르는 부끄러움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 키 크잖아.”
리에르는 왜 이렇게 유이와 대화하다 보면 말싸움으로 번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집 때문일지도 몰랐다.
리에르는 자신의 장점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유이의 입을 다물게 하려 했다.
“키 큰 원숭이.”
“까놓고 말해서 나 어디 가서 준수한 외모로 이야기 들었거든?”
“엄마한테? 너 얼굴 원숭이.”
“아니, 그니까 어디가 원숭이냐고.”
리에르의 성에 유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숭이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지?”
“어.”
“너도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어머, 귀까지 두 개네.”
처음엔 그냥 말을 받아주려다가 리에르는 울컥하기 시작했다.
“야, 그럼 유트는……!”
리에르는 유트를 가리키면서 얘도 원숭이네? 라고 말하려다가 할 말을 잃었다.
유트는 자신의 이마에 달라붙은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 보인다. 오뚝한 콧날, 쌍꺼풀은 없지만 깎아놓은 듯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눈동자.
다소 차갑게 닫혀 있지만 부드러운 미소라도 지을 새면 여성들을 환호성 지르게 할 것 같은 입술. 신이 만든 조각 같은 얼굴 아래로 뻗은 매끄러운 목선과 그 아래 숨겨진 근육.
전형적인 미소년처럼 몸에서 금빛을 뿌리고 있는 유트를 보니 리에르는 차마 말을 못 하고 손가락을 접었다.
‘아, 이 사기 캐릭.’
유트는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비해 누님들에게 사랑받을 것 같은 미소년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공격의 목표를 유이로 수정하며 리에르가 심술궂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야, 너는 뭐…….”
긴 속눈썹을 가진 아치형 눈썹 위에 매끄럽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 둥글고 큰 루비색 호수 위에 내리깔린 긴 속눈썹. 보드라운 장밋빛 뺨의 근처로 자리 잡은 앵두 같은 입술. 잘록한 허리위로자리 잡은 볼륨 있는 가슴. 새하얀 피부를 가진 팔과 다리.
가는 팔과 다리는 부러질 듯 가녀려 보여서 옆에서 부축하고 싶게끔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어렸을 적엔 절대 입지 않았던 치마 덕분에 남자의 눈길을 이끄는 각선미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짜증스러운 얼굴을 짓고 있지만 사실 귀여운 토끼가 연상되는 더듬이(?)를 보니 리에르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귀, 귀엽잖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린 리에르는 얼굴을 붉혔다.
“나 뭐? 뭐!”
유이는 리에르가 트집을 잡으려 하자 해보란 듯이 허리에 손을 짚어 보였다.
유트와 유이가 같이 붙어 있으니 눈에 보이지 않던 은빛 후광이 흘러넘치는 착각에 리에르는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렸다.
“나…… 나도 나름 괜찮을 건데…….”
리에르는 왠지 눈물이 나왔다. 유이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중얼거렸다.
“잘생긴 원숭이 해줄게.”
“정말?”
“응.”
유이가 이렇게 착한 아이였던가? 리에르는 그동안 유이를 괴롭혔던 자신이 얼마나 나쁜 남자였는지 반성하려다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원숭이냐.”
유트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맑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리에르는 이전과 달리 너무나 어두웠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유트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지금으로선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에.
하지만 함께 여행하면서 리에르는 서서히 본인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또한, 자연스레 말수도 많아졌다.
처음 여행을 떠나면서 하루에도 몇 마디 이상 꺼내지 않는 그의 모습은 이미 없어졌다.
“응.”
리에르를 골려 먹는 것이 재미있던지 유이도 쿡쿡 웃어 보였다.
유이가 웃고 있는 것이 묘하게 가슴 설레게 하지만 억지로 그런 것을 밀어내고서 리에르는 쳇, 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 보였다.
비록 놀림을 받긴 하지만 혼자 여행할 때와 같이 여행할 때는 확연히 달랐다.
유트, 유이 남매와 함께 떠나는 길은 외롭지 않았고, 더 이상 아르미안의 환영에 괴롭힘 받는 일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은 자들의 혼령이 발목을 끄집는 꿈을 꾸었는데 그마저도 더는 괴롭히지 않았다.
‘괜찮을지도…….’
무슨 일인지 이번엔 유트에게 달라붙어서 칭얼거리는 유이를 보며, 리에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밉살스럽지만 귀여운 유이, 동갑내기 친구로서 의지가 가능한 유트.
아픔이란 이름의 편린이 치유되어 간다. 하지만 리에르에게 찾아오는 어둠은, 확실히 카운터 되는 그의 죽음만큼이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행복이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