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6)
레필리아 레소드-126화(126/398)
레필리아 레소드 126화
광전사의 노래(4)
“씻고 싶어!”
“좀만 참아.”
유이가 칭얼대던 것은 목욕이었다. 일행이 마을을 떠나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노숙을 일삼다 보니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고 싶은 건 누구나 매한가지였다.
“왜, 아까 지나온 호숫가에 몸이라도 담그시지.”
겨울이 다가오는 열 번째 달. 얼어붙진 않았지만 들어갔다간 감기에 걸릴 확률은 너무나 높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리에르는 짓궂게 말했다.
“너야 안 씻으니깐 모르겠지, 야생 원숭이.”
“내가 얼마나 자주 씻는데? 청결의 리에르 몰라?”
“아까 머리 깎아줄 때 진득진득하던데?”
유이는 일부러 손을 들어 불결하다는 듯이 어우, 소릴 내어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싫다는데 억지로 깎은 게 누군데!”
“우리 오빠 같은 타입이라면 모를까, 네 얼굴에 머리 치렁치렁. 뭐니 정말.”
유이에게 제대로 한 방 날려주고 싶지만, 딱히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없었다. 그냥 착한 내가 참자 생각하는 리에르의 눈 안으로 이상한 것이 보였다.
“유트, 유이 눈 가려.”
리에르의 말에 유트는 유이의 앞을 가로막아 주었다.
안 그래도 유트 역시 갑작스럽게 피비린내를 맡고서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유이는 갑자기 또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아까의 기고만장함은 금세 쑥 들어가고 말았다.
리에르는 수풀 사이로 삐져나온 손목을 보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 수풀을 손으로 젖혀보니 그 안에는 무언가에 얻어맞고 심하게 훼손된 시체가 있었다.
이번에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빛을 잃어버린 눈가에는 피와 엉켜진 눈물이 흘러내려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반인이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을 잡았던 굳은살이 없는 손바닥.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은 사체는 철퇴 같은 것에 맞아 머리가 으깨져 있었다.
‘아까 그놈인가.’
사용한 무기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도 리에르는 머릿속으로 그 검은 형체를 떠올렸다. 그러던 리에르의 동공은 점점 크게 확장되었다.
머리가 으깨진 남성의 시체. 그 뒤쪽으로 어린 소녀를 끌어안은 여성의 시체가 보였다. 그녀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감쌌고, 그 결과 머리가 잘려 나가 있었다.
어린 소녀도 이미 죽어 있었다. 소녀의 가슴은 시커먼 검상이 생긴 채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인근에 마을이라도 있었던 듯 보였다. 가족 단위로 근처 숲에 열매라도 따러 나왔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리에르는 저절로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싸울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일반인을 처참하게 죽인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리에르 자신도 저주에 사로잡혀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던 주인공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생각도 하기 싫은 공포, 두려움. 그것들이 기분 나쁘게 몸에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때였다. 습기 찬 공기를 맡고 리에르의 미간이 움직였다. 동공 안으로 보이는 옅은 안개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은 리에르는 허리춤에 찼던 검을 뽑아 들었다.
“놈이 온다.”
리에르는 싫은 기억을 끄집어내 준 학살자를 용서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주변에 대한 오감을 극한으로 끌어모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유트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여동생 유이를 보호하며 스르릉, 두 자루의 도를 꺼내 들었다.
사박, 사박.
무언가가 걸어오는 소리.
사륵, 사륵.
수풀이 몸에 스치면서 나오는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치지직 거리는 괴음을 뿌리며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옅었던 안개는 더욱 자욱해졌다. 주변의 풀벌레 소리도, 떠들던 새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는 바람에 살랑이던 나뭇가지의 춤도 멈춘 듯 시간이 멈춰 있었다.
치지직. 치직.
검은 형체에게 나오던 이상한 괴음. 그것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리에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나의 흐름이 몸 안에 집중되면서 오감이 집중되었다. 슬며시 눈가를 열자 푸른 이채의 동공 속으로 검은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숨 막힐 듯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것이 입을 벌리자 입김과 함께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일행들을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두고 볼 것도 없이 리에르는 뽑아낸 검을 찌르고 들어갔다.
챙!
검과 검의 마찰음이 비명이 되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리에르의 선제공격을 손만 들어 막아낸 괴한은 눌러쓴 헬름 사이로 연기를 뿜어내었다.
기리릭, 검과 검이 비틀어지며 나오는 소음이 발생한다. 괴한은 검을 회수하지도 않고 그대로 리에르를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괴력에 리에르는 뒤로 밀려났다. 그것을 보고 유트가 지원하기 위해 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유트를 보고 괴한은 리에르의 배를 걷어찼다. 하지만 리에르는 옆으로 몸을 회피하면서 공격을 피해내고는 괴한의 갑옷 틈새를 찔렀다.
빈 허공을 찌르는 손의 느낌. 리에르는 분명히 슈트 아머를 걸친 괴한의 몸을 찔렀다고 생각했으나 손안에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사이 유트는 괴한의 몸통을 찌르고 들어왔다. 검을 크게 휘두르는 괴한의 공격을 몸을 낮춰 피함과 동시에 두 개의 도가 적을 노린다.
티릭, 정확하게 괴한의 갑옷 틈새로 유트의 검이 들어갔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진물과 뒤섞여서 검면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캉!
괴한의 팔목으로 한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뒤이어 예리하게 날아 들은 화살을 맞고 괴한이 잠시 주춤했다. 리에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비틀었다.
푸쉭!
검은 진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리에르의 검이 괴한의 헬름 안을 정확하게 베어 넘겼다. 거의 목이 잘려 나간 것이나 다름없는 즉사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아직 살기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느끼고 검을 들어 올렸다.
괴한은 중상을 입어도 리에르를 향해 멈추지 않고 검을 내려찍었다. 리에르는 괴한의 검을 막아내며 반격할 준비를 했다.
키이이이익!
요란한 검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리에르는 육중한 괴한의 힘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자신의 검이 불꽃과 함께 잘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리에르가 들고 있는 보통의 검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포스가 없어도 레필리아 레소드를 익힌 실력자였다. 그의 마력이 보호하고 있는 검은 이렇게 쉽게 잘려 나갈 성질이 아니었다.
푸쉭!
멈추지 않는 괴한의 검이 리에르의 어깨를 베어냈다. 붉은 선혈이 튀며 리에르는 이를 사리물었다.
“리엘!”
유트의 도검이 괴한의 검은 롱소드를 쳐냈다. 유트는 중상을 입은 리에르를 감싸면서 이도로 괴한을 압박했다.
리에르는 검상을 입은 어깨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순간적으로 리에르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찢어질 듯한 고통에 리에르는 창백한 얼굴로도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유이의 지원 사격이 계속 이어졌다.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완력의 한계. 그것 때문에 유이는 검을 포기하고 활을 들었다.
유이는 페이서스 검식으로 날렵한 검술에 능했다. 하지만 유이는 페리안에서 스승을 만나 검에서 활로 전향하였다.
유이가 쏘아내는 궁술은 매우 빠르고 위력적으로 적을 압박했다. 유트가 있어도 유이의 화살은 빗나가는 일 없이 괴한만을 적중시켰다.
리에르는 유이의 활 솜씨에 감탄할 시간이 없었다. 피가 많이 흘러 정신이 혼미했고, 고통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왔다.
리에르는 유트의 검술이 더욱 뛰어나진 것을 지켜보고 안심했다. 아니, 순수하게 검만으로 친다면 리에르보다 몇 수 위였다.
유트는 공격의 흐름을 읽고 베고 빠졌다. 그 모습은 전투를 장악하는 존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적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투를 지속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리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둑, 툭.
그의 어깨에서 굵은 핏방울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리에르와 유트, 거기다 유이의 물리 공격을 맞아도 적은 피해를 보지 않은 듯 보였다.
물리 공격력이 의미가 없다면 단 한 가지. 마법 공격력밖에 없었다.
유트와 유이, 리에르 세 명 중 유일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바로 자신이었다.
생각지 않게 치명상을 입은 리에르는 밀려드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며 유이에게 다가갔다.
유이는 유트를 엄호하기 위해 연신 활시위를 놀렸다. 하지만 화살은 떨어져 가고, 괴한의 몸은 화살 꼬챙이가 되어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벌써 몸에 화살 다섯 개 이상이 명중했지만, 괴한은 꿈쩍도 안 했다.
유트의 빠른 맹공 덕에 괴한이 밀리고 있긴 하지만 불사신처럼 움직이는 상대와 한방만 스쳐도 치명상을 입는 유트는 불리함이 달랐다.
이제 남은 화살도 몇 개 안 남았기에 더욱 신중하게 쏘기 위해서 유이는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순간적으로 많은 양을 쏟아부었기에 그녀의 어깨도 통증이 상당했다.
“유이, 잠깐만.”
어느새 다가온 리에르가 유이의 화살집에서 화살 한 개를 꺼내 들었다.
순간적으로 많은 피를 흘린 리에르의 안색이 좋지 않았기에 유이는 재어놓았던 활시위를 놓고서 그를 부축했다.
리에르는 뽑아 든 유이의 화살을 멀쩡한 손으로 쥐어 잡고서 눈을 감았다.
마나의 시선. 차원의 틈새를 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산재되어 있는 불의 연소점.
리에르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끌어당겨서 화살 안에 도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확실한 한 방을 먹이는 것이 중요했기에 주변에 모든 소음에 대해서 무시하고, 자신의 고통마저 무시했다.
웅웅웅, 리에르에게만 들려오는 마나의 자장이 서로 마멸되고, 화살에 입혀져 간다.
유트와 검은 괴한은 벌써 수십 차례 맞부딪혔다. 괴한의 말도 안 되는 힘을 알기 때문에 유트는 절대 정면으로 공격을 막아내지 않았다.
살짝 공격을 쳐내면서 비켜나가도록 하였고, 자신은 확실하게 상대의 몸을 공격하였다.
벌써 여덟 번 이상 유트의 검에 찔렸지만, 놈은 끄덕하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고 공격해 왔다.
처음엔 롱소드더니 어느 순간에는 양손검으로 변경되더니 이제는 괴한의 무기가 조금 굵직한 레이피어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뭐지.’
유트는 괴한의 무기가 상황에 맞게끔 달라지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스러웠다.
공격은 점점 막기 어려웠고 까다로워졌기에 체력 소모도 심해져만 갔다.
어느새 유트의 이마로 은빛 머리카락이 땀에 젖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발의 움직임도 종전보다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한은 처음과 달라진 모습 없이, 아니, 오히려 더욱 거세게 유트를 압박했다.
유트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괴한이 용병 십여 명을 순식간에 해치운 것은 뛰어난 검술 실력이 아닌, 전부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 희귀한 방법으로 해치웠다는 것을.
“하앗!”
유트의 입에서 기합과 함께 두 자루의 도가 매섭게 괴한을 몰아붙였다.
막아내기에 급급하던 괴한은 검술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유트의 시야 안으로 괴한의 검에서 기류가 흐르는 것이 보인다.
윙, 철컹.
기묘한 괴음과 함께 괴한의 검은 분자 형태로 흩어지더니 순식간에 검은빛 바스타드 소드로 변했다.
유트는 괴한의 몸을 찌른 무기를 회수하려 했으나 무언가에 걸렸는지 빠지질 않았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바스타드 소드의 일격.
어쩔 수 없이 유트는 양손에 쥐었던 도를 놓고서 뒤로 회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