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7)
레필리아 레소드-127화(127/398)
레필리아 레소드 127화
광전사의 노래(5)
콰앙!
유트가 있던 자리의 땅이 움푹 패면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만약 저런 걸 맞았다간 살 조각 하나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공격은 피했지만, 무기를 잃어버린 유트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부상을 입은 리에르가 전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유이 혼자서 저런 괴물을 상대로 버틸 리 없었다.
리에르는 그때 마나를 입힌 화살을 유이에게 넘겼다. 리에르는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모아서인지 이마에는 땀으로 흥건했다.
“갈겨 버려, 유이.”
한참 동안 자신의 화살을 쥐고 있던 리에르의 의미 불명의 말.
유이는 지금껏 아무리 공격해도 괴한에게 화살이 먹히지 않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기를 잃은 유트, 치명상을 입은 리에르.
두 사람 이외에 공격이 가능한 인물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유이는 입술을 깨물고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오빠에게 달려드는 괴한의 몸을 향해 활시위를 깊게 당겼다.
유이는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튕기듯이 놓았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 유이가 쏜 화살은 정확하게 유트를 스쳐, 괴한의 가슴에 명중하였다.
콰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굉음에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유이는 안 그래도 큰 눈동자를 더 크게 뜨고서 리에르를 쏘아보았다. 저런 거면 진작 말하라는 듯이.
리에르는 애써 그녀의 힐난하는 시선을 회피하였다. 그러고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유트와 괴한을 탐색했다.
“그그그그.”
다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리에르는 설마 하는 눈으로 흙먼지 속을 바라보았다.
유트도 리에르와 유이 쪽으로 합류했을 때, 불꽃의 폭발 속에서 괴한이 걸어 나왔다.
이번만은 타격이 있었는지 괴한이 입고 있던 낡은 갑옷은 절반쯤 날아가 있었다.
하지만 끔찍한 광경이 모두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드러난 괴한의 몸뚱이는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썩어가고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을 기어 다니는 지네와 애벌레들도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리에르는 상대가 죽음에서 되돌아왔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녀석의 정체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직도 놈은 불사 같은 상태였고, 이쪽은 제대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여자아이 하나뿐이었다.
“그그그그.”
놈은 거대한 핼버드를 땅에 질질 끌면서 걸어왔다. 몸 곳곳이 검은 누액을 보글보글 소리 내어 뿜어내자 모두는 눈을 찌푸렸다.
역한 냄새와 함께 구역질이 나오는 모습을 하고도 괴한은 핼버드를 높이 들고서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모았다. 단전 속은 이미 허전해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유트는 유이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리엘을 데리고 일단 피해 있어!”
“하, 하지만…….”
유트는 맨손으로라도 전투를 지속 할 수밖에 없었다.
유트는 리에르와 유이 앞을 가린 채 괴한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유트라 해도 저런 괴물과 맨손으로 싸울 순 없다.
유이는 리에르를 재빨리 부축하며 유트에게 자신의 단검 한 자루를 던져주었다. 재빨리 그것을 받아 들은 유트는 달려드는 괴물의 핼버드를 옆으로 피해냈다.
붕!
바람을 찢어내는 핼버드의 소음이 들려온다. 놈의 무기는 유트 대신 땅을 내리쳤다.
힘이 어찌나 센지 바닥을 때린 순간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흔들리는 듯 느껴졌다.
유트는 그런 것에 당황하지 않고 괴한의 무릎을 밟고서 뛰어올랐다.
푸우욱.
유트가 양손으로 힘껏 내리꽂은 단도는 괴물의 정수리에 박혀 검은 핏물을 뽑아냈다.
놈은 사정없이 머리를 흔들며 손을 들어 올렸다.
유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괴한에게 어깨를 붙들렸다. 그 순간 괴물의 손에 있던 시커먼 핼버드는 어느새 단도로 변했다.
“말도 안 돼.”
유트는 자신을 붙잡은 괴한의 팔을 비틀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아슬아슬하게 괴한의 시커먼 단도는 유트 대신 자기 자신의 팔을 찢었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전법이었다. 자기 자신이 피해를 보던지 말던지는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적을 베기 위해 움직이는 괴물을 보고 유트마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이번에도 멀쩡하게 뛰어들 것 같았던 녀석은 아까와는 다르게 비틀거렸다.
괴한은 자신의 팔을 베고서 검은 핏물을 연신 후두둑 흘려냈다.
‘뭐지.’
유트는 주변의 옅은 안개가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괴한은 서서히 안개 속에 묻히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괴한 때문에 유트는 최대한 모든 감각을 기울인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리에르 역시 유이에게 부축된 채로 최대한 몸의 호흡을 운용하고 있었다.
상처는 입었지만, 유트가 위험하면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연기가 옅어지고 사라질 때까지 모두는 공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괴한은 안개와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트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대로 계속 전투를 했으면 죽는 것은 자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괴한을 보고 유이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유트는 리에르가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다가와 그를 땅에 눕혔다.
리에르의 이마에는 땀으로 적셔진 검은 머리카락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파리했다.
출혈량이 많았다. 리에르는 꽤 많은 기력을 소모해서 탈진해 있었다.
유트는 자신의 옷가지를 찢어서 리에르의 다친 어깨를 동여맨 뒤에 짐 가방 쪽을 뒤졌다.
리에르는 물밀 듯이 몰려드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만약에 유트나 유이 둘 중에 한 사람이 크게 다쳤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왔을 것을 느낀다.
유이도 피를 많이 흘리는 리에르를 보고 안색이 파리했다.
피가 무서워서인지, 리에르가 걱정돼서인지는 몰랐다. 혹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유이는 리에르가 조금이나마 쉴 수 있도록 자신의 무릎을 베개 삼아 내주었다.
리에르는 허벅지의 부드러움을 느낄 기운도 없었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운 상처가 계속 아팠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유이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가득 찼다.
‘만약 내가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면…….’
방금 보였던 그 괴한 따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단 몇 합만으로 그런 괴물은 산산조각 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더 이상 포스의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 힘 때문에 인생이 뒤틀렸지만, 편했던 힘인 만큼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설원에서 추격을 당하고, 죽음을 목전 앞에 두었을 때조차 포스가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오히려 죽어서 편해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목을 들이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르는 죽고 싶지 않았다.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었다.
리에르는 상처 부위가 벌어졌는지 이마에서 열이 펄펄 올랐다. 유트는 약초 몇 가지를 가져와서는 입안에 넣고 잘게 씹었다.
유트는 입안에 다진 약초를 리에르의 상처 위에 바른 뒤, 다시 약초 몇 뿌리를 입안에 넣고 씹었다.
약초의 효능인지, 아니면 상처의 고통인지 쓰라림이 어깻죽지를 타고 오자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리에르는 목덜미에 닿는 허벅지의 푹신함도,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훑어주는 유이의 가느다란 손길도 왠지 기분이 좋아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피를 많이 흘려 흐릿해져 가는 시선으로 유이의 은발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려 보였다.
결국, 리에르는 힘겹게 버티던 눈꺼풀이 닫히는 것을 느꼈다.
리에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타닥, 타닥.
기분 좋은 불꽃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끼룩끼룩.
기분 나쁜 밤새소리가 전해지자 리에르는 누운 상태에서 눈동자를 움직였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누운 채로 보이는 밤하늘 위로 은은한 빚을 내는 달이 떠 있었다.
달은 별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당장에라도 놓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별빛들이 하늘 아래 쏟아져 내리니 누워만 있을 수 없었다.
리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흰 붕대가 말끔하게 감긴 것이 보였다. 또한, 불꽃이 만들어낸 나무 재가 허공에 튀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일어났네, 바보 원숭이?”
주변의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있던 유이가 콧잔등을 찡그려 보였다. 오랫동안 잠들어서 그런지 리에르는 아직 정신이 혼미했다.
“유트는?”
“오빤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 약 좀 얻으러 갔어.”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마을? 이런 곳에?”
“그래, 다행히도 근처에 산골 마을이 있더라고. 바보 원숭이가 부상이 크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오랜만에 목욕물에 몸을 적실 수 있겠지?”
“미안하게 됐네.”
유이의 핀잔에 리에르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예전에는 나약해서 남들에게 민폐만 끼쳤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비록 포스를 잃었어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실력이 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여행 도중 첫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서 기절해 버렸다.
리에르는 유트, 유이 남매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설원에서도 유트에게 끼친 민폐가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더 심술 맞게 말할 줄 알았던 유이가 의외로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리에르는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치맛자락에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자국을 보니 리에르는 자신이 그녀에게 계속 무릎베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왠지 모를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어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갑자기 유이가 검지를 들며 리에르에게 소리쳤다.
“참고로 이 치마 아끼던 거야.”
“그래?”
“너 때문에 못쓰게 되었으니 한 벌 사줘야 해!”
“아끼던 거면 여행길에 입지 말고 집에서만 입지 그랬냐.”
투덜거리는 리에르를 보고 유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적어도 너 때문에 입은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리에르는 지금껏 유이가 치마를 입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던 그녀의 다리가 이렇게 잘빠졌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알았어.”
의외로 리에르가 간단하게 대답하자 유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검지를 흔들며 거래를 제시했다.
“아니다, 괜히 피해만 봤으니 세 벌.”
“너…… 내가 백수인 건 알지?”
광기로 미쳐 있던 동안 소년에서 남자로 바뀌었다. 방학을 기다리던 학생이 자고 일어나보니 아저씨가 되어 있다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어차피 오빠랑 일할 거 아니야?”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입을 닫고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아른거리는 불빛 속으로 유이의 오묘한 표정이 보인다.
그녀는 당연히 리에르가 유트와 함께할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 따위도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그녀에게 눈물이라도 보일 것 같았다.
리에르는 유트 남매와 함께 있고 싶었다. 또한, 유트가 하는 일을 옆에서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화 속 이야기에 불과했다.
“내가 적혈의 악마로서 살아왔단 건 알고 있지?”
“응…….”
리에르의 말에 유이의 긴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그녀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적혈의 악마, 대륙의 주적은 죽었다고 알려졌지. 그런데 그 악명 높은 살인마가 신생 영지에 있다고 알려져 봐. 모르긴 해도 아직 유트의 입지는 안정적이진 않겠지. 그런 상태에서 대륙의 주적을 옆에 둔다? 너희들에게 돌아갈 피해는 어마어마할 거야.”
유트는 자신의 아버지, 지크 페브리안의 뒤를 이어서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영주에게 있어서 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영주민들이 영주를 따르기 위해선 그의 인덕을 의심해선 안 되고, 자신들을 절대적으로 보호해 줄 힘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