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8)
레필리아 레소드-128화(128/398)
레필리아 레소드 128화
광전사의 노래(6)
유트는 천재적인 검술가였다.
하지만 영주로서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진 알 수 없었다.
또한, 아무리 뛰어나다곤 해도 이제 막 생긴 세력이다.
기반이 단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세력이 분열되기에 십상이었다.
개인주의가 강한 북방민족이라면 더더욱 분열이 쉬웠다.
“차라리 남겨진 시간이 아깝다고 하시지?”
유이는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리에르를 힐난했다.
순간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 그녀를 보면서 리에르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녀의 빈정거림이 속상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은 시간이 없었고,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친구의 호의를 모른 채 받아가며 민폐를 끼치는 것에 불과했다.
예전에 검술대회에 억지로 참가한다고 했을 때부터 리에르는 민폐였다. 결과가 좋았다곤 하나 민폐였던 것은 확실했다.
유트는 희생했다. 지금도 희생했다. 자신을 위해 모친 라일라가 희생했다.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추악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지금 제정신인 것을 원망한다. 당장에라도 목을 매고 싶은 충동이 손끝까지 치밀었다.
“시간? 하, 곧 죽을 시간? 그딴 것이 뭐가 중요해. 넌 죽는 게 그냥 밥 못 먹으면 죽는다고 생각해? 난 너희 남매의 곁에 있을 수 없어. 난 내 이름을 밝힐 수도 없어. 이미 살아 있지만 지금도 시체야. 아까 봤던 그 괴물처럼 걸어 다니고 싸울 수는 있지만 난 내 생각대로 할 수 없지. 살아 있는 시체. 너희가 원하는 것은 시체야.”
남겨진 시간이 없다 하여도, 친구 유트의 곁에서 끝까지 서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악명은 그런 마음을 지우게 했다. 세상에 떳떳하게 나올 수 없는 허망함.
그런 마음을 내내 가지고 있던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유이에게 화풀이하고 말았다.
유이는 들고 있던 장작을 팽개치면서 리에르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그러곤 상기된 얼굴로 리에르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살아 있는 시체? 그럼 울 오빤 시체 하나 구하자고 자신 목숨을 걸고, 영지 일까지 내팽개치고 간 거였네? 너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너희는 시간 낭비했어.
리에르는 애써 그 말을 집어삼켰다. 지금 그들과 함께 있는 이 짧은 시간이 행복했다. 누군가와 다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감정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그들을 만나 기뻤다. 행복했다. 소중한 것이 생기니 두려워졌다. 소중한 것이 없다면 그것을 잃을 일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기면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후회해?”
차가운 유이의 목소리. 차라리 평소처럼 보디 블로우라도 날렸으면 리에르의 마음은 덜 불편했다.
“그래서 넌 바보 원숭이라는 거야.”
유이의 표정은 오묘했다. 입가는 웃는 듯 보이지만 눈가는 처연함이 가득했다.
리에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유이는 분한 심정 때문인지, 혹은 리에르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리에르는 유이를 바라보면서 다친 어깨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일어났구나, 리엘.”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유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에르는 멋쩍게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유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눈가를 슥슥, 훑어 내렸다.
“어구, 다행이구려. 친구분이 무사하셔서.”
리에르는 유트 이외에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의 곁에는 평상복을 걸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땀을 훑고 있었다.
“이곳 마을 의사분이셔.”
“반갑습니다. 광전사를 상대로 이만한 것은 주신의 기적이구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마을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광전사라는 말에 리에르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유트를 바라보았다.
유트는 마을 의사가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서 리에르의 어깨 붕대를 푸는 것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가 싸웠던 검은 형체를 그렇게 부른대.”
“그렇군.”
리에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마을 의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붕대를 풀어낸다. 달라붙었던 약초들을 훑어내자 시커멓게 딱지가 붙기 시작한 상처에서 통증이 밀려 들어왔다.
“다행히 뼈는 안 다쳤군요. 약만 잘 바르고 움직이지만 않으면 금세 낫을 겁니다.”
의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리에르나 유트가 아닌, 유이를 보면서 말을 해주었다.
의사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자 유이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도리질을 해보였다.
“난 딱히…….”
“아가씨가 제일 걱정 많은 것 같기에 그랬는데, 나이 먹고 주책이었나 보구려. 껄껄.”
의외로 짓궂은 데가 있었는지 산골 의사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유트도 곁에서 빙그레 웃고 있는데 리에르만 의사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상처 위에 약을 바르고 살펴보던 의사는 깨끗한 붕대로 리에르의 어깨를 치료하였다.
“감사합니다.”
리에르는 의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본업이 의사신가요?”
리에르는 어깨의 통증이 금방 완화되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으로 안도하였다.
당장 오른쪽 팔을 움직이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나, 또다시 전투가 벌어질 때 아무 보탬 없는 사람이 되진 않을 것이다.
“껄껄, 산골 마을에 의사라고 할 그것까지 뭐 있겠소. 그냥 상처를 하도 만지다 보니 손에 익어서 하게 된 것이지.”
“그렇군요. 상처를 많이 본 만큼 무기를 많이 휘둘러보신 것 같아서요.”
리에르는 눈앞의 의사에게서 짙은 피 냄새가 난단 것을 느꼈다. 자신 스스로도 피를 많이 보았고, 죽인 사람의 수가 많았기에 같은 부류의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
더더군다나 의사가 상처를 치료할 때 그의 손안에 두꺼운 굳은살, 그것은 어지간히 무기를 연마하고 굳은살이 찢어지고, 또 찢어져서 몇 번이나 단련되어야만 가능한 손이었다.
절대 약초나 만지작거려서 만들 수 있는 손은 아니었다.
리에르의 말에 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손사래를 쳐보였다.
“이런 산골 마을에서 호신 검술 정도는 익혀둬야지. 그리고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무차별하게 공격해 오는 광전사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전부 무기는 다룰 줄 안다오.”
“검술을 하셨어요? 손안을 보니 그레이트 엑스 같은 대형 무기를 사용하신 것 같았는데 틀렸나 보군요.”
리에르의 말에 중년 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말을 잊었다. 검술을 익혔다면 아무리 양손 무기로 사용한다 해도 오른쪽이나 왼쪽, 한쪽의 굳은살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일정하게 꽉 잡힌 굳은살. 핼버드 종류의 무기라면 창을 뻗어내는 손가락 옆쪽의 굳은살이 발달하게 된다.
손바닥부터 손가락까지 전체적으로 골고루 굳은살이 박인 의사의 손은 그레이트 엑스 종류의 대형 무기.
리에르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의사가 호신용으로 배웠다면 으레 검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의술 실력도 좋은데 무력까지 단련한 것 같아 존경스러워서요.”
절대로 보기에도 위압적인 그레이트 엑스를 호신용으로 배우는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에르는 교단에서 배우고 듣고,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 덕분에 잘 모르는 상대에 대해선 쉽게 신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경계심을 계속 만들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냥 처음에 배우다 보니 이것저것 손에 익혀서 그렇소. 껄껄, 의사쟁이가 도끼질도 해대니 신기한가 보구려.”
호의를 베풀었는데 오히려 이상한 질문만 하는 리에르의 말에도 중년 의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면서 의사가 말했다.
“놈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피하는 것이 좋소. 환자도 있으니 마을로 내려갑시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유트는 겸양 섞인 말을 하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의사는 다시 의료 도구들을 가방 안에 넣고는 앞장서서 일행을 마을로 안내했다.
다소 수상해 보이지만 일단 도움을 주었기에 리에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광전사라는 존재도 그렇고, 조금 전의 의사 또한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때문에 마을로 들어서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애써 고생한 유트의 노력을, 그리고 목욕을 하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유이를 생각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리에르가 다쳤기 때문에 짐은 유트가 좀 더 들고, 남은 것은 유이가 메기로 하였다.
유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 단단히 삐친 거로 보였다.
사실 유이의 말이 틀린 부분은 없었다.
자기 일은 전부 내팽개치고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유트. 그리고 그런 유트를 말리지 못하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유이.
두 남매의 소중한 마음을 찢어버리고, 부정하는 말을 스스로 내뱉고 말았다.
스스로 한심함을 느낀다는 듯이 어깨의 상처에서 조금씩 고통이 전해져 내렸다.
본의 아니게 유이에게 화풀이해 버린 미안함에 사과할 기회를 찾아 리에르는 힐끔힐끔, 시선을 옮겨본다.
하지만 유이는 아예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 광전사라고 불리던 것은 언제부터 출몰한 건가요?”
유트는 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내려가며 중년 의사에게 물었다. 중년 의사는 음, 하는 신음 소릴 내뱉더니 입을 열었다.
“약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우리 마을은 외부와 완벽하게 끊겨 있소. 다른 곳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전부 놈에게 살해당했고, 마을 바깥을 나가는 사람들은 영락없이 귀신처럼 나타난 광전사에게 죽었다오.”
중년 의사의 말에 유트는 의아함이 들었다.
상대해 본 검은 괴한이 일반 마을로 쳐들어간다면 하루 안에 초토화가 될 터였다.
그러한 유트의 의아함을 중년 의사는 다음 말로서 풀어주었다.
“놈은 산골 마을 안에 들어오지 못하오. 오, 신이여. 그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시오? 만약 그 악독한 놈이 마을 안에 들어선다면 아이고, 노인이고 전부 놈의 흉검 아래 토막 날게요. 나 같은 중년들이 무기랍시고 들고 덤벼봤자 그놈에게 상대도 안 될 테니 말이오.”
중년 의사의 말에 유트는 공감하는 표시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그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거군요.”
“알 수가 없소. 하지만 분명한 건, 놈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을진 모르나, 놈은 원래 엘프 종족이었다 하더구려.”
“엘프…….”
유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 보였다.
북 대륙 어딘가에 엘프라는 종족들이 모여 사는 숲이 있다고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자연과 친화력이 높은 종족.
겉모습은 인간과 유사하나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살육을 즐기지 않으며 여유로움을 즐기는 신의 종족.
직접 보진 못했으나, 알려진 소문에 의하면 엘프들은 인간과 외모는 닮았다고 들었다.
또한, 인간처럼 병장기를 걸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사용한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