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29)
레필리아 레소드-129화(129/398)
레필리아 레소드 129화
광전사의 노래(7)
아울러 그들은 더러움과 야욕으로 가득한 인간을 매우 증오하여, 인간과의 교류를 끊은 지가 오래였다.
그들이라면 정말 끔찍할 만큼 인간들을 혐오할 수도 있었다.
“놈이 정말로 엘프라면 끔찍한 일이오. 우리 마을은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놈에게 벗어나지 못할 거란 말이니.”
중년 의사의 말처럼 엘프라는 종족은 1세기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과는 달리 약 10세기가량의 수명을 갖고 있었다.
세속의 더러움에 찌들어 사는 인간들은 항상 스트레스를 겪기에 스스로의 목숨을 단축시킨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순리에 따라 움직이는 엘프는 병드는 일 없이 영원을 산다고 한다.
지혜롭고 강인하나 인간보다 번식력이 약한 그들은 1천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명의 자식을 본다고 한다.
물론 다른 예도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그들의 수가 줄어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에게 있는 욕구라는 것이, 엘프라는 종족에겐 없었다. 성욕이 없었기에 당연히 후손을 볼 일은 극히 드물었다.
“우리가 본 건 엘프 따위가 아니었어요.”
가만있던 리에르가 입을 열었다. 살점들은 다 떨어져 나가 뼈가 훤히 드러난 채로 퇴색된 핏방울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검은 형체.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것만 머릿속에 담긴 그릇을 엘프와 동일하게 볼 사람은 없었다.
“다 이 사람 저 사람 떠들다 보니 와전된 이야기가 많으이. 놈을 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히 드문 일이니까.”
“하물며 물리친 사람도 적었겠죠.”
리에르의 물음에 중년 의사는 고개를 돌아보았다. 지금껏 지었던 인자한 미소는 사라지고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천천히 열린다.
“처음이오.”
리에르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중년의 의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 역시 리에르가 의심 섞인 눈빛을 내보인단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동류의 길을 걸었던 상대끼리는 서로를 믿지 않으며 서로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좋은 무기가 필요하겠군요. 아까 전투에서 제 검 두 자루를 괴물에게 빼내질 못했거든요.”
유트 역시 중년 의사의 의중을 알아챘다. 중년 의사는 아무런 이득 없이 리에르를 치료해 주고, 그들에 관해 호의를 베풀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어지던 오솔길을 내려가고 돌다리를 지났을 때 깊숙이 숨겨져 있던 산채가 일행의 눈앞에 보였다.
한적한 산골 마을을 예상하던 리에르는 예상외로 잘 만들어진 산채의 규모를 보고 감탄했다.
커다란 나무를 잘라 끝을 뾰족하게 깎은 뒤에 하나하나 세워서 정교하게 묶은 나무 성벽. 경계를 서기 좋도록 세워진 망루.
예상외로 잘 만들어진 마을은 마치 수성 전을 대비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전쟁이라도 벌어질 분위기군요.”
산골 요새를 보고서 유트는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중년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광전사뿐만 아니라 이곳은 몬스터들, 혹은 산적들의 공격도 많으니까요.”
치안이 잘 수립된 남부, 동부와 비교하면 실제로 오트리아의 북부 지대는 무법천지였다.
북부를 다스리고 패왕이 사라진 이후 오트리아 황실마저 무너져 영지는 완벽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바뀌어 있었다.
“패왕 지크 페브리안의 사후, 이런 산골 마을마저도 살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하니까요.”
유트는 부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였다.
패왕의 혈육으로서 이 길 위에 올라섰다. 하나, 아직은 너무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유트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지 못한 곳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들의 고통과 싸움은 유트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중년 의사가 손을 들어 보이자 망루를 지키고 있던 병사는 아래쪽으로 뭐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끼익, 끼리릭. 하는 쇠사슬의 마찰음과 함께 성채의 양쪽 문이 열렸다.
“소문으론 지크 페브리안 패왕의 핏줄이 다시 이 땅 위에 일어섰다고 하던데, 다시 북부 지역의 치안이 강화되면 저희 같은 산골 마을도 조금은 살기 좋아지겠지요. 허허.”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중년 남성은 눈가의 주름을 잡으며 웃어 보였다.
내일의 안녕을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유트는 복잡한 심경에 빠져 있었고, 리에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중년 남성을 쏘아보았다.
유트는 오랜만에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기분 좋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의 눈에는 상대가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는 거로 보였다.
성채의 안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만 집들이 보였다.
산골 마을이라고 해서 100명도 안 되는 인원이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사람이 많아 보였다.
집의 개수만 보아도 약 80여 가구는 됨직 보였으며, 가구당 2~3인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200명은 되는 인구였다.
“생각보다 큰 마을이군요.”
유트는 성채 안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듯이 말했다.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던지 중년 남성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자랑스럽게 외쳤다.
“비록 나라님의 군대는 없어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키며, 자급자족하는 마을이죠. 여느 도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곳이오. 추운 계절에 여행하느라 지쳤을 텐데, 맛있는 계절 음식과 따뜻한 목욕을 하면서 쉬면 눌러 살고 싶을 것이오.”
중년 남성은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유이를 향해 애교 있는 윙크를 날렸다.
여행자는 대다수 용병이라던가.
헌터, 혹은 상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90% 이상은 남성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여성의 몸으로 추운 계절에 여행한다면 목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리울지 모른다.
유이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생각을 하니 화색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외지인이 신기하다는 듯이 시선을 모았다. 특히나 유트 남매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산골 꼬마들은 와, 하는 소리를 내면서 유트 남매를 뒤따라 왔다.
개중에 짓궂은 녀석들은 유이의 긴 은발을 만지면서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성격 까칠한 유이마저 긴장된 전투 이후 마음이 풀어졌다.
꼬마들이 귀찮게 구는데도 싫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 했다.
가는 곳마다 외지인들이 환영하는 손 인사를 해보였다.
리에르는 유트 남매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체크 했다.
‘도주로가 없다.’
평범해 보이는 산골 마을 속에서 리에르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일행이 들어간 곳은 촌장의 집이었다.
손님이나 여행객이 잦은 곳이 아니었기에 여관 같은 것은 없었다.
촌장의 집은 크진 않으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방들은 충분했다. 촌장 역시 사람 좋은 인상을 한 60세 노인이었고, 리에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게 얼마 만에 찾아오는 여행객인지, 허허.”
노쇠한 촌장이 손님을 맞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신세 지겠습니다.”
유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예의를 취했다. 유트의 웃는 모습이 마치 왕자님 같기라도 했는지 소녀들의 눈빛은 묘하게 변했다.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촌장댁 창문틀에 매달려 있었다.
“이야길 들어보니 광전사에게 공격받았다고 했는데 죽은 분이 없어서 참 다행일세. 곧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할 테니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게나.”
나이 먹은 노인도 아름다운 여행자를 만난 것이 반가워보였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손님 대접을 준비하러 나갔다.
그의 며느리와 아내로 보이는 아낙들은 은발 남매를 훔쳐보다가 촌장에게 걸려서 멋쩍게 웃으며 나갔다.
“좋은 마을이군요.”
유트는 겸양이 아닌 진심을 담아 중년 의사에게 말했다. 중년 의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요새 광전사 때문에 그렇지도 않다오.”
“그것에 대해서 저희 도움을 원하시나요.”
유트는 좀처럼 말하지 못하는 중년 의사 대신에 본론을 말했다. 유이는 창가에 달라붙은 아이들을 보며 손을 내밀어 보였다.
꼬마 아이들에게 유이는 한없이 아름답고 어른스러워 보이는지라 눈을 반짝이고 쳐다봤다. 그런 모습이 리에르는 너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이도 저런 꼬마들과 다른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위대함은 심술쟁이 꼬마를 아름다운 미소녀로 만들어 주었다.
유이는 우연히도 고개를 돌렸는데 리에르와 눈이 딱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화나 있겠지.’
리에르의 생각대로 유이는 아이들에게 웃어주던 모습과는 다르게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유이의 모습에 리에르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감정이 일었다.
유이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유트는 대륙의 주적이라고 악명이 높아진 친구를, 위험하단 것을 알면서도 구하기 위해 찾아왔다.
자신의 나약한 생각과 마음은 유트를 무시한 처사이며, 유이를 상처 입힌 행동이었다.
“뭐라 드릴 말이 없구려……. 우리 마을 자경단만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니 도움을 청하고 싶소.”
중년 의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리고 간절함이 깃든 얼굴로 유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다른 누구라 해도 마을에서 어쩌지 못한 괴물이 있다면 가능한 사람에게 부탁해 올 것이다.
그리고 유트의 눈 안에 들어온,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을 봤으니 그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부족한 힘이지만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리에르의 생각대로 유트는 그렇게 답했다.
자신이 하는 말에 추호도 의심이 없으며 거침이 없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유트였으며, 자신이 하는 행동에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유트의 말에 중년 의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손을 모았다. 그의 입에서 유일신 테헤라자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기뻐하는 중년 남자를 보면서 리에르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저 기뻐하는 모습마저도 가식이고, 모든 대답을 유도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바깥에서 듣고 있던 촌장마저도 거실로 돌아와 기뻐하며 유트의 양손을 끌어 잡았다.
유트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너무 경황이 없어서 소개도 못 했구려. 이쪽은 우리 마을 촌장님이신 그레이, 나는 아까 밝힌 대로 마을 의사인 리안이라고 하네.”
촌장과 리안은 마을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또한 광전사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나온 이야기는 아까 의사 리안이 말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광전사에 대한 정체는 전혀 모르고, 수해 전부터 이유 없이 마을 주변을 순찰하듯 돌면서 사람을 학살한다는 것.
똑같은 이야기들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듣기 지루했지만, 유트는 특유의 성실함을 발휘하여 눈도 깜박이지 않고 다 듣고 있었다.
이후 촌장과 의사는 유트의 이름과 성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현 페리안의 영주이자, 패왕 지크의 아들을 눈앞에서 본 것이 영광이라는 듯 황송해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촌장과 의사는 유트에게 모든 관심을 쏟은 채, 그가 해온 업적들을 입에서 쏟아냈다.
리에르조차 잘 알지 못하는 최근 사건들까지 알고 있었다.
‘의외로 정보에 대해 빠삭하군.’
그런 모습들이 리에르에게 더욱 의심 어린 눈길을 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