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3)
레필리아 레소드-13화(13/398)
레필리아 레소드 13화
최악의 약혼자(2)
가슴속에 잊고 싶은 것이 있거나 우울함만 자리 잡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머리를 비우고서 단 한 가지에 몰두하면 슬픔이 누그러진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잊는 방법이 된다.
물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떠오르는 기억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시간은 가장 좋은 치료법이었다.
리에르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과 함께하고, 가장 친하게 지내오던 소녀를 떠올렸다.
언젠가 리에르에게 시집가라는 짓궂은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긍정적인 대답을 하던 소녀.
그 소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찾아든다.
가슴속 한쪽이 얼얼할 정도로 차갑다.
실수로 살짝 밀면 넘어져서 운다.
개구리나 다리가 많은 벌레를 보면 울음을 터트렸다.
에레사는 그렇게 겁많은 소녀였다.
겁이 많은 소녀는 항상 리에르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자신이 두 살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리에르가 너무 심술궂게 대하거나 괴롭히면 울든지, 혹은 물든지 할 때가 있다.
그런 행동은 다른 아이들이 아닌, 오로지 리에르에게만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너무 가까우므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이였다.
-에레사가 네 마누라냐?
어릴 적, 동네에서 가장 덩치 크고 힘 좀 쓰는 녀석이 그렇게 놀렸다.
리에르는 그대로 상대를 들이받았다.
싸움의 결과는 명백했다.
리에르는 덩치 큰 친구에게 늘씬하게 두드려 맞았다.
에레사는 다친 리에르에게 상처약을 발라주면서 연신 훌쩍거렸다.
그녀는 리에르가 화난 이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과 연결되어 놀림당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불쾌해서 화가 난 거라고 착각했다.
물론 그건 그녀만의 오해였다.
리에르는 잠시 의미 없는 후회를 해보았다.
차라리 그때 제대로 감정을 밝혔다면 지금쯤은 무언가 달라졌을까?
마을의 짓궂은 녀석들은 눈에 띄게 예쁜 에레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짓궂은 장난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리에르는 정의로운 기사처럼 애들과 치고받았다.
-에레사를 괴롭힐 권리는 이 몸에게만 있다!
리에르는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었다.
허세를 부림으로써 얻은 영광의 상처들. 그리고 대가로 받는 것은 울먹이며 걱정하는 에레사의 얼굴.
어쩌면 리에르는 자신만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에레사의 얼굴을 보며 일그러진 소유욕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우리 에렌을 항상 챙겨줘서 고맙구나.
언젠가, 에레사의 엄마는 자상한 미소를 머금으며 리에르에게 말했다.
그때 에레사의 모친은 막 구운 과자를 대접하며 리에르에게 미소했다.
사실 에레사를 제일 괴롭히는 것은 저예요!
리에르는 왠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에레사의 어머니는 리에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입안으로 과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지켜주는 거란다. 리엘은 우리 에레사를 언제나 지켜주니 나중에 멋있는 사람이 되겠구나.”
싫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싫지 않았다. 에레사와 자신이.
싫지 않았다.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에레사가.
정말 싫은 것은……. 한심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이후로 리에르는 결심했다.
가녀린 그녀를 지키기 위한 기사가 되겠노라고.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그녀는 달라졌다.
가녀리기만 했던 그녀는 성격도 활달해졌다.
그녀는 카에르에 입학하고 나서 페이서스 검식에 매료되었다.
에레사의 실력은 정확히 본 적 없지만, 소문이란 것이 있었다.
카이샤에는 실력 없고 재능 없는 사람들이 갈 수 있을 정도로 자리가 남아돌지 않으니깐.
그녀에게 자신은 필요하지 않았다.
* * *
-그래, 잘하고 있어!
아르미안이 들뜬 목소리로 리에르를 독려했다.
투명한 그녀의 검신이 달빛에 반사되어 눈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녹색을 뽐낸다.
그녀에게 배운 대로, 몸으로 익힌 대로 발을 움직였다.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검붉은 하늘을 허공을 베듯이 녹색 빛이 그어진다.
밤공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검술을 연습하느라 땀에 젖어 덥기만 했다.
리에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락, 사락. 어지럽게 넘어가는 풀잎들이 성을 낸다.
신기했다.
예전 같으면 그저 내려치기만 했다.
예전과는 달라진 몸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녀는 검술과 마법은 다르다고 말했다.
하나 리에르는 생각했다.
자신을 며칠 만에 이렇게 달라지게 만들어주는 거야말로 마법이 아닐까 하고.
리에르는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리에르는 달라지고 싶었다.
잘난 사람들 틈바구니서 짓눌려 살아왔다. 나약하고, 자존감 없는 자신을 부수고 싶었다.
-잘했어, 이제 좀 쉬려무나.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무너지듯이 풀밭에 드러누웠다.
밤의 풀밭 무도회를 준비하던 풀벌레들이 성내듯이 쐐액, 쐐액 거렸다.
그런 항의 따윈 상관없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알 것 같아요.”
리에르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수업에서 억지로 교육받았던 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리에르는 그녀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아니라면 자신 같은 둔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못할 검무였다.
-드디어 하나 배웠구나, 생각보다 빠르네? 앞으로 천이백사십 개만 배우면 돼.
‘내일 잘 아는 대장장이 아저씨를 찾아가야겠다. 가슴에 털이 북슬북슬한 분으로…….’
리에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리에르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설명을 계속했다.
-마나라는 것은 공기 중에 떠도는 자연력이야. 자연력이란 만물을 생성시키고 세상 모든 것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단위체를 의미하는 거야.
“그렇군요.”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하늘의 흐름이 변하다 날씨가 바뀌는 것 등 자연환경이 바뀌는 의미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마나에 의한 변화야.
“쉽게 말씀해 주시죠.”
리에르는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처럼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곧 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재차 설명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를 운용함은 사람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력을 사용하여 마나와 접촉, 또는 연소시켜서 마법이라는 것이 시전 되는 거야. 어렵지?
“네, 어렵네요.”
리에르는 참 머리 나쁘고 솔직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열성적이고 성실한 교사이다.
-당연히 아직은 이해를 못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직접 마력만 운용하게 된다면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이해가 갈 거야.
‘과연 그럴까…….’
리에르의 비극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그녀는 신난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머리보단 몸으로 배우는 것이 더 빨랐었지?
“이론보단 실전에 강하다고 말해주시겠어요?”
리에르의 뚱한 표정에 그녀는 깔깔깔, 웃으며 답한다.
-가장 먼저 마나 운용법을 연습하자. 눈을 감으렴.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변의 정적이 귓가를 간질인다.
-마나의 운용법은 호흡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조용히 내쉬렴. 공기의 흐름과 주변 사물을 느끼도록 노력해.
카에르에서의 수업과는 전혀 다른 수업이었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교과서들을 억지로 주입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런 것 하나 배우고 습득하지 못한다면 넌 패배자다,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교사들이 두려웠다.
온화하고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 리에르는 온전히 몸과 마음을 그녀에게 맡기며 숨을 깊게 쉬고 뱉었다.
-반복해.
“후우……. 하아…….”
리에르는 내뱉고 들이킴을 반복했다.
평소엔 아무 규칙 없이 울어대는 듯했던 풀벌레 우는 소리. 하지만 잘 들어보니 그들의 울음은 일정한 화음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춤추는 것이 느껴졌다.
수풀이 손을 들어 바람에 몸을 적시는 광경이 그려졌다.
-축제 때 같이 갈 남자 정돈 있거든.
리에르는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다.
-같은 카이샤에 다니는 내 남자친구.
그녀가 인도한 호흡의 템포가 흐트러졌다.
리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리에르를 감싸 안고 있던 정적은 깨지고, 편안함은 무너졌다.
그의 가슴속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온다.
리에르에게 있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내일에 대한 막막함.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숙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리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그녀는 잘 유지되고 있던 호흡이 흐트러지자 다그치듯 말했다.
리에르는 이내 호흡을 다시금 가다듬고 아까와 같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애써 연소점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평정심을 유지해 보렴.
리에르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평소 익혔던 호흡법대로 폐까지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어 본다.
-그래, 그렇게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체내의 기운에만 집중하렴. 마나 호흡법은 운용법과 매우 근접해 있어.
“후우, 하아…….”
천천히 감정이 잦아들었다.
주변의 정적과 자신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러간다.
-너랑 난 예전부터 좋은 친. 구. 고 가족처럼 지냈지만…….
자연스럽게 리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호통을 칠 것 같아서 다시 주변의 공기에 집중하려 했다.
-오늘은 더 말하지 않을게. 다음에 선배 만나면 꼭 사과해 줘.
-리엘!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리에르는 가슴팍이 조여 오는 통증을 느꼈다.
곧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토해져 나왔다.
“쿨럭.”
리에르의 입가에서 검붉은 핏덩어리가 토해져 나왔다.
검술을 연마하다가 다치면 근육이 상한다. 마법을 연마하다가 다치면 정신이 손상된다.
정신적 상처는 육체적 상처와 비교하면 회복도 힘들고, 오래 남는다.
그녀는 그 위험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호흡시켜 줄게, 그냥 편안하게 있어.
후우, 하아.
리에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호흡이 가다듬어진다.
-이제부터는 숨 쉬는 것을 의식하지 마. 숨이 조여 올지 모르지만 놀라지 말렴.
그녀의 말과 함께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 고통을 유발한다.
‘어떻게 의식하지 말라는 거야!’
그녀에게 조종당해 숨도 쉬어지지 않는 고통은 버티기 힘들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몸 전신이 답답했다.
-이제 좀 편할 거야.
그녀의 말마따나 갑자기 답답함이 씻은 듯 사라졌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도 맑아진 느낌이었다.
리에르는 놀라움을 느꼈다.
평소에는 호흡하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달랐다.
호흡을 위해 순환되는 혈액의 움직임이 느껴진다는 착각이 들었다.
펌프질하는 심장의 박동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리에르는 희미한 기운이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움직였다.
들어오고 배출되고, 배출되고 들어오고.
그 빛은 덩어리를 이룬다. 어떤 것은 바위와 혼연일체가 되었고, 또 어떤 것은 나무뿌리에 심어진다.
풀에 달라붙어 있던 녹색의 염체는 바람에 둥둥 떠다닌다. 그것들은 거부감없이 리에르의 몸 안에 스며들었다.
지금 이 순간 풀밭과 리에르는 하나가 되었다.
경쟁처럼 단단한 땅을 올라가서 빗물을 향해 고개를 내미는 풀의 감정이 느껴진다.
느껴질 리 없는 감정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감정이었다.
“이건…….”
리에르는 열리지 않던 입술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귓가에 그녀의 미소 짓는 듯한 말투가 들려왔다.
-코와 입이 아닌 몸 바깥으로 숨 쉬는 호흡법이야. 아직 익숙하진 않겠지만 익숙해지도록 해야 해.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수업에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체력 훈련은 되어 있었고, 마력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경험하게 하고, 느끼게 하여 그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훈육 방법과 리에르의 습득 방법은 최고의 파트너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