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39)
레필리아 레소드-139화(139/398)
레필리아 레소드 139화
광전사 사냥(7)
쿼렐에 박혀 쏟아지는 끈적거리는 진물들. 불꽃은 썩은 살을 재생시키지 못하도록 불태웠다.
쿵!
처음으로 광전사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리안은 드디어 광전사가 무너지자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광전사의 은신처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곳을 공격하면 알아서 광전사가 무너지리란 것만 알고 있었다.
자경단은 더 이상 쿼렐을 장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크로스 보우 대신에 창과 검, 그리고 도끼와 둔기를 장비했다.
광전사는 자경단들이 달려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냥 노예 신세로 귀족 물이나 빼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리안은 일어나지 못하는 광전사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는 처음 광전사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광전사는 매우 출중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멍청한 엘프에 불과했다.
인간의 야비함을, 세상의 어두움을 모르고 지내온 엘프 부부.
그들은 이제 막 빛의 숲에서 나온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였다.
엘프 부부는 그저 유희를 위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알지 못했다.
황금알.
아름다운 겉모습만으로도 재산가와 귀족가가 군침을 흘리는 존재다.
그들은 부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가에 판매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독특한 특기가 있었다. 예지력이라 불리는 위기 인지 능력이다.
그들은 비록 점술가처럼 정확한 미래를 짚어내진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프는 보물상자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회복의 피.
엘프의 몸에 흐르는 액체는 강력한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그들의 피를 뽑아내 팔기만 해도 장사가 아닌 사업으로 뒤바뀐다.
옛 대륙에선 엘프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 그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리안에게 있어 세상 물정 모르는 엘프 부부를 속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엘프 특유의 위기 감지 능력은 아무 소용없었다.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력이 너무나도 부족했기에.
마을 사람들은 반항하는 남성 엘프를 함정에 빠뜨렸다. 그의 혀를 뽑고 눈알을 파내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한 것은 회복의 피를 뽑아내는 일이었다.
그들은 오열하는 여성 엘프를 고가에 매입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마법사, 귀족, 재산가들을 수소문하던 그들은 그녀가 임신 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준 신의 축복에 감사했다.
그들은 남의 것을 강탈하는 것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엘프 부부의 존재는 새로운 삶을 살라는 구원과도 같았다.
여성 엘프는 출산해도 청초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이도 불사의 피를 갖고 태어날 터였다. 무엇보다 반항적인 엘프 부부와 비교하면 다루기는 손쉬울 수밖에 없었다.
도적들은 여성 엘프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잘랐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아이를 보듬을 수 있는 시간뿐 이었다.
발목을 잘랐어도 마을 사람들은 24시간 교대로 엘프들을 감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남성 엘프가 탈옥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피를 뽑히고 먹이고 싸고를 반복하는 재배 속에서 앙상한 몰골만 남았다. 그런데도 그는 무슨 힘이 생겼는지 어디선가 검을 하나 주워왔다.
그는 검은 칼날을 가진 무기로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싸웠다.
힘겹게 그는 승리했다. 죽은 간수의 시체를 넘어서 가족을 되찾았다.
눈이 파였어도 가족의 온기를 느꼈다. 죽어가는 몸은 가족을 끌어안고 있었다.
남성은 움직였고, 달렸고, 싸웠다.
리안은 엘프들을 지키던 사람들이 전부 몰살당한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팔자를 고치게 해줄 황금알들을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재빨리 추격을 시작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으로도 남성 엘프는 끝없이 교전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들을 입어도 그는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을의 추격 범위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여성 엘프는 발목이 잘린 상태였다. 엘프 특유의 회복과 재생으로도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아직 젖먹이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추격을 피한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성 엘프는 결국 아내가 몸이 호전될 때까지, 아이가 조금이라도 자랄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그들은 조그만 집을 경계로 생존권을 위해 싸웠다.
몇 년간 계속 되풀이된 싸움. 마을이 고용한 각지의 용병들. 그리고 마을 자경단의 감시와 순찰.
몇 번의, 몇 십 번의, 몇 백 번의 전투를 반복했을지 기억이 나지 않았을 무렵 남성 엘프는 예지를 느끼기 시작했다.
남성은 자신이 죽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썩어 문드러지는 손을 보면서 그 미래가 머지않았음을 예감했다.
창과 검을 고나 쥔 채로 달려드는 적들. 광전사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광채는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희미해지는 그의 눈가 사이로 본능이 꿈틀거렸다.
지금 싸우지 않는다면 등 뒤의 가족들이 위험했다.
광전사는 다시금 투지를 불태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당도한 것은 자경단의 창과 검이었다.
“으아아악!”
그때 끔찍한 비명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광전사가 내뱉은 비명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비명이란 것을 지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핏빛으로 물든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어느새 자경단을 막아섰다. 자경단은 검은 청년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타인의 피로 말라붙은 머리카락과 옷은 상대로 하여금 위압감을 전달하였다.
수십의 자경단들은 검은 청년 한 명에게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자경단원들도 하나같이 전투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가진 분위기와 살기는 경계할 줄 알았다.
광전사는 약해진 안광으로 검은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칠흑의 날개를 펄럭이는 듯한 사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광전사는 평온함을 느꼈다. 끝없이 느껴지던 고통의 지옥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해방해 줄 인물.
드디어 그를 만났음을 인지했다.
비명. 잠식. 죽음.
항상 몸을 감싸는 갑주처럼, 항상 숨 쉬게 하는 피비린내.
항상 눈을 뜨게 하는 칼날의 휘광. 창과 칼이 나부낀다.
리에르의 검이 달려드는 앞줄을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자경단은 아군의 시체를 밟고서 진격해 왔다.
리에르는 그들의 창날을 뒤로, 혹은 측면으로 회피하며 계속해서 적을 베었다.
다대일의 전투.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선 다수는 뭉쳐서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수로 움직이면 오히려 판단력과 타이밍에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리에르는 일대 다수의 전투 경험이 그 누구보다 풍부한 전사였다.
포스라는 능력이 없어도 리에르는 일대일 전투에서 절대로 밀릴 인물이 아니었다.
적이 머릿수를 이용해 공격해 온다면 뭉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자경단원들은 자신의 인원들이 빠르게 줄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리에르의 움직임은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검은 잔영만을 남기는 그의 모습을 쫓다 보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한다.
거침없는 일격과 정교한 검격이 쉬지 않고 선혈의 꽃을 피웠다.
자경단원들은 상대가 생각보다 강하자 당혹스러워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강함에 혼란스러워하였다.
“다들 흩어져서 포위해!”
자경 단원 중 그나마 서열이 있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그제야 그들은 너무 한곳에 뭉쳐 다닌 덕분에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경단원들은 포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서로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벌린 채, 상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적들은 더욱 기세 좋게 무기를 앞세운 채 달려왔다.
리에르는 다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적은 원형으로 둘러싸서 일제히 공격하려 했다.
리에르는 적의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숲길과 수풀을 통해서만 움직였다.
원형을 그린 채 도적들은 리에르를 일제히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리에르를 완벽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또 바뀌게 되었다.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지형 덕분에 창을 들고 있는 도적이 불리하게 되었다.
창은 검보다 리치가 길어 유리하지만, 좁은 곳에선 걸리적거렸다.
리에르는 나무를 등지고, 혹은 나무를 돌아서 무리에서 떨어진 녀석들을 하나하나 착실하게 베어 넘겼다.
리에르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땀방울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말라가는 입술 사이로 더운 김이 뿜어졌다. 피로감에 머리는 무겁고 어지러웠다.
리에르는 적의 공격을 전부 피해내진 못했다.
그러나 잔 상처들 속에서 혈흔이 흘러넘쳐도 절대 멈추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경직된다면 찾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나무 사이를 유영하듯 움직이는 리에르를 상대로 자경단원들은 반격도 못 해보고 맥없이 쓰러져갔다.
그들은 붉은 피를 칠한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감히 덤벼들 생각도 못 하고 뒷걸음질만 하였다.
리에르를 보는 자경단원들은 머릿속에 한 가지를 떠올렸다.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던 광전사. 그 괴물 이상의 괴물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준수해 보이는 청년에 불과했으나, 지금 전장을 날뛰고 있는 것은 악마나 다름없었다.
‘적혈의 악마.’
자경단원들은 순간적으로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그 호칭을 떠올렸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흑요석을 깎아놓은 듯한 눈. 180티의 장신에 마른 체형이지만 전투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을 죽이고 잡아먹는 괴물.
리에르의 검이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져 나갔다. 벌써 꽤 많은 목숨을 처리했고, 그 결과 검이 한계에 돌입한 것이었다.
리에르가 빈손이 되자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경단원들이 검을 높이 들고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상대가 내려찍는 검을 옆으로 굴러 피했다. 그와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진 창을 쥐어 잡았다.
자경단원은 재차 공격하기 위해 검을 비껴들고 다가왔다. 하지만 리에르는 그대로 창을 집어 던졌다.
덕분에 달려들던 상대는 비음만 토하며 나무와 함께 창에 꿰어져 버렸다.
다시 사방에서 자경단원이 공격해 들어왔다. 리에르는 창에 꿰어진 시체에게서 검을 잡아 뺐다. 그러고는 웃음을 지으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자경단원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악마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자경단원들은 그저 광전사의 은신처를 급습해서 엘프들을 납치할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살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창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 살려줘. 난 집에 기다리는 가족이……!”
자경단원들은 더 이상 아까와 같은 여유도, 아까와 같은 패기도 없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목숨을 구걸하는 적을 향해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서겅!
리에르가 들은 검이 피보라를 일으켰다. 더운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공격.
그는 다시 부서진 무기를 버리고 다음 무기를 짚었다.
즐겁다.
리에르는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었는지조차 잊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는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