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4)
레필리아 레소드-14화(14/398)
레필리아 레소드 14화
최악의 약혼자(3)
리에르는 주변을 에워싸던 뿌연 안개 너머로 예전에 한 번 느꼈던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밤의 어두움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나무도, 풀숲도.
지금 이 순간은 환한 녹색 빛 자장이 일어나고 있다.
-마나라는 개념은 이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존재야. 마나를 느끼고, 깨우치고 축적하면 자연스럽게 법칙을 알 수 있어.
그녀는 이어서 설명했다.
-그 마나의 덩어리가 모인 곳에는 핵이 있어. 그 핵에 특정한 마력을 주입하면 반응하게 되지. 저번에도 얼음송곳을 만들 때 기억하니?
“기억해요. 정확히는 제가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미안이 나지막하게 웃는다.
-네 몸이 만들어낸 거잖니. 어차피 그 감각은 기억할 거잖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합식을 만들어서 미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었을 때 마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리에르처럼 재능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코끼리라는 동물에 관해서 이야기만 들은 시각장애인들은 코끼리의 생김을 서로 다르게 말한다.
하지만 코끼리를 본 사람은 그것의 생김새에 대해서 정확하게 짚어낼 수가 있다.
처음부터 마나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큰 이점이었다.
-레필리아 레소드가 보통의 검법이 아니게 된 이유는 주변의 연소점을 폭발시키는 전투법이기 때문이야. 기본만 익혀두어도 웬만한 몬스터는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해. 신나겠지?
“네, 신나네요.”
그녀의 상기된 듯한 말투와는 다르게 리에르의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내일도 본선을 위한 시합들이 있었다.
당장에 쓸모 있는 방법들을 가르쳐주긴커녕, 듣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것들만 이야기하고 있다.
리에르가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각 연소점이 폭발할 때 나오는 효과는 전부 달라. 너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겠지? 한번 주변의 연소점들을 터트려 봐.
리에르는 그녀의 말처럼 집중을 시작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오로라가 하늘을 휘감고 있었다.
평소엔 발목까지만 오던 잔디는 진한 녹색의 아지랑이를 흩날리며 허리까지 올라와 있다.
“연소점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이어지는 그녀의 즉답.
-자장이 일어나는 곳을 잘 보면 한곳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을 거야. 그 중심 부위에 레필리아 레소드로 폭발시킬 수 있어. 한번 해보렴.
리에르는 그녀의 설명에 따라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변에 있는 바위 중 하나는 그녀의 말처럼 중앙에서부터 갈색의 자장이 물결처럼 주변에 퍼져 나갔다.
‘직접 해보라고 시킨 일이니 아마도 위험한 일은 없겠지.’
리에르는 바위의 주변에 떠 있는 마나 덩어리를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부드러운 촉감이 전달되었다.
리에르는 몇 개 더 찔러 보았다. 검 끝이 핵을 찌를 때마다 비눗방울 터지듯이 산화한다.
“끝……?”
리에르는 생각보다 허전해서 물어봤다.
아르미안은 미소하듯이 말했다.
-자, 정 자세를 취하고 한번 휘둘러봐.
리에르는 후, 숨을 내쉬며 검을 양손으로 말아 쥐었다.
하압!
리에르는 허공에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육중한 느낌이 손끝에서 전달되었다.
펑!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검을 긋는 것과 동시에 갈색의 자장이 흩뿌려졌다. 그것은 곧 공기 중에서 딱딱하게 고체화되더니 나무에 박혀 들어갔다.
“어?”
리에르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끔벅거렸다.
우두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은 나무가 허리가 꺾여지며 쓰러졌다.
“이…… 이건?!”
분명 그녀가 조종한 것이 아닌 리에르 본인이 해낸 것이었다.
그저 그녀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는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리에르는 등에서 무언가가 쭈뼛하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리에르에게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말했던, 부친이나 형과는 다른 재능을 지니었다고 말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너도 잘 알고 있는 기술이야. 검기(劍氣), 혹은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리에르는 방금 자신이 쓰러뜨린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작은 나무이긴 하지만 떨어진 거리에서 휘두른 공격에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만약 실전에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런 리에르의 생각을 이미 꿰뚫어 본 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실전에서 사용할 수는 없을 거야. 이 마나의 공간 안에 들어오기 위한 집중과 연소점을 찾는 시간, 그리고 연소점을 폭발시키는 그 시간 동안에도 너를 향해 칼날은 날아 들어올 테니 말이야.
“하지만, 제가 단련하면 된다는 말이죠?”
리에르가 살짝 겸연쩍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분명 넌 누구보다 그 단련을 빨리할 수 있을 거야. 너를 믿으니깐.
리에르는 아까만 해도 그녀를 털북숭이 대장장이에게 넘겨 버리기로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를 곧바로 깨야만 했다.
그녀는 이미 리에르를 위해 안배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 * *
“다녀왔습…….”
리에르는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자신감이 찬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안에는 못 보던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
마른 체형의 야윈 볼을 가지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보면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속삭일 법한 미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리에르와 눈을 마주쳤다. 미소년의 고운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응?”
“너, 너……!”
미소년의 검지는 리에르를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마검사 리에르 님의 첫 희생양이 되어야겠군.’
-엉뚱한 소리.
아르미안의 핀잔에 리에르는 일단 한 번 참아주었다.
“네, 네 녀석이 아르빈트 아저, 아니, 스승님의 아들이었냐!”
“응, 그래. 누군진 모르지만 안녕. 그리고 다음에.”
리에르는 대수롭지 않게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문득 거슬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스승님이라고 했다.
“뭔데? 그리고 아르빈트 스승님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냐?”
“아, 이럴 수가……. 아르빈트 스승님의 자제분이 이런 불결한 사내라니……. 차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구나.”
리에르는 한탄하는 미소년을 보고 인상을 써 보였다.
“넌 뭔데 아까부터 나한테 손가락질이셔? 어느 나라 대왕마마라도 되는 거냐?”
“아아…… 네 녀석은 자신에게 좋은 일은 기억하고 자신에게 나쁜 일은 금방 잊는 스타일인가 보지?”
“그럴 때도 있지.”
“대낮부터 여기저기 부딪히며 시비 걸고 다니는 짓을 하는 망나니가 로이스타 스승님의 둘째 자제분이란 것을 과연 누가 알았을까?”
“뭔 소리야.”
“넌 지금 나에게 미안함을, 그리고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네 그 좁쌀 같은 명예를 나도 지켜줄 마음이 들 테니깐.”
리에르는 드디어 미소년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알아차렸다.
“아, 그래.”
리에르는 궁금증이 풀린 것을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안락한 침대가 기다리는 복층 계단을 밟았다.
미소년은 황당한 표정으로 리에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녀석은 나에게 사과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적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뭐 엄마 손님인가 본데 적당히 궁둥이 깔다가 가라.”
리에르는 그렇게 성의 없이 중얼거린 뒤에 문을 닫았다.
그때 불현듯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부엌에서 방안까지 단 1초도 안 걸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편인 로이스타에 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신속을 보여주었다.
성난 라일라는 문을 열면서 차가운 뱀의 혀와도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에르으으으!”
“네, 마미. 난 학과 업무 때문에 피곤해요. 그리고 잠을 잘 권리가 있어요. 난 그 권리를 지금 행사하고 싶어요. 이런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나요, 마미?
리에르는 크지도 않은 눈망울을 빛내며 호소하였다. 그리고 맞았다.
라일라에게 착한 아들 만들기 구타를 당하고서 얼굴이 퉁퉁 붓게 되었다.
벌에 물린 것 같은 리에르의 몰골을 보고 미소년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리에르는 눈빛 레이저를 미소년을 향해 힘껏 쏘았다.
하지만 곧 라일라에게 발견되어서 꿀밤 하나를 추가했다.
어쩔 수 없이 리에르는 퉁퉁 부은 입술로 입을 찢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머, 제이미. 우리 바보 아들을 오늘 처음 보겠구나. 보다시피 파엘과는 전혀 다른 아르빈트가 둘째란다.”
“그렇군요. 두 번째 만나 뵙네요? 리에르. 오늘 아침에 귀하의 튼튼한 체력에 나자빠지고 나서 또 뵙다니, 이게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네요.”
‘아아, 신이여. 당신은 정말 유년시절도 없던가요.’
리에르는 미소년에게 손짓 발짓을 하였다.
오늘 아침 일을 나의 어머니에게 말하면 네 녀석 죽여 버리겠다. 라는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제이미라는 미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라일라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제분이 꽤 팔팔한가 봐요. 뒤에서 춤을 추고 있네요?”
리에르는 그냥 얌전히 있었다.
제이미에게 반성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제이미도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기 싫었기에, 더 이상 그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리엘, 여기 제이미는 네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자 주군이신 아레스트 후작의 자제분이란다. 아레스트 후작 가와 아르빈트 가는 친밀한 가문이니 인사하거라.”
리에르는 어쩐지 상대가 계집인지 사내인지 알 수도 없는 몰골이라 생각했다.
귀한 가문이라면 그것에 맞게 온실 속의 화초. 즉 도련님 중의 도련님일 수밖에 없었다.
“제이미 룬 아레스트네.”
마주 잡은 손은 사내 녀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냘팠다.
기분 좋을 정도의 매끄러움, 이 기분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에레사의 손을 잡고 다니던 때의 기분이었다.
“로이스타 스승님의 둘째 아들은 검술을 하지 않는다던데 의외로 자네 손에 근육이 잘 잡혀 있구나.”
제이미는 그냥 망나니같이 생각하던 그의 손에 굳은살을 느끼고는 새삼 다시 봤다는 듯이 감탄하였다. 그리고 리에르는 다른 의미로 새삼 감탄하였다.
“우리 아버지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검술이 아닌 사교춤이었던가? 자네 손이 참 매끄럽구나.”
“뭐야!”
제이미의 고운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그와 동시에 리에르는 모친 라일라에게서 아들 훈육 펀치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제이미, 오랜만에 아줌마가 맛있는 걸 해줄 테니 저 바보 아들은 상대하지 말고 이리 오려무나.”
“네, 아줌마가 해주시는 파이는 항상 성안에서도 생각났었어요.”
라일라와 제이미는 하하, 호호 웃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내 맛있는 치즈 파이의 냄새가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두 사람이 곧 로이스타와 파에트에 관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것이 들려왔다.
로이스타에게 검술을 배우는 이야기. 파에트가 이번에 유격기사단을 끌고 수차례의 공훈을 세운 이야기들.
제이미는 마치 그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나 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이 나서 자랑했다.
라일라도 기쁘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시큰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에레사에게도 단 하나의 사람이 되지 못했던 소외감. 그리고 저렇게나 기쁜 듯이 아버지와 형 이야기를 듣는 모친.
자신은 채워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저절로 하아, 하는 한숨을 내쉬며 리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대한 아버지, 너무나도 잘난 형을 둔 존재의 설움이라는 건가.”
리에르는 낮은 저음을 듣고서 시선을 돌렸다.
늑대 같은 인상의 마른 남성은 어울리지도 않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엘빈이다. 네 잘난 형 때문에 항상 서열에서 밀리는 말단 기사지.”
“잘난 동생 하나 두면 적어도 형에게 이기는 것 하난 있겠네.”
엘빈의 말에 리에르는 비아냥했고,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음험한 얼굴로 어울리지도 않게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쉽게도 동생이 없어서 말이야. 그리고 그 존재감 없는 동생이라는 말치곤 네 기운은 범상치 않은데?”
리에르가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을 뿌리며 엘빈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뱀처럼 리에르의 전신을 시선으로 핥으며 바라본다.
등골의 오싹함 때문에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단지 검술만 갈고 닦은 기운이 아니다. 네 몸 곳곳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이 녀석은 대체 뭐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때 엘빈의 비릿한 음성이 귓가를 핥았다.
“넌 뭐냐?”
리에르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엘빈의 매서운 눈길이 마주쳐진다.
시선을 피해 도망치려 해도 그 눈길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뱀 앞의 쥐가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혹시 마법을 공부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