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42)
레필리아 레소드-142화(142/398)
레필리아 레소드 142화
여명(1)
-Master에게 정당한 대우를 요청합니다.
“시끄러워, 고철.”
웅웅, 울리는 듯한 기괴한 음성. 그것에 답하는 청년의 답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Master는 아르카의 존엄성에 대해서 다시 파악하길 요구합니다. 아르카 Program은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Interface를 제공함은 이것이 아닙니다.
위협하듯이 웅웅거리는 칠흑의 무기, 저주받은 검이라고 불리는 아르카는 현재 자신과 함께하는 청년에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청년은 자기 생각을 끝까지 관철하였다.
“식칼로 변하기나 해.”
-거부권을 표합니다.
“대장간에 가서 정말 고철로 만드는 수가 있다.”
청년의 말에 칠흑의 검, 아르카는 잠시 아무런 음성도 내질 않았다.
청년과 동행한 이래 처음 들렀던 마을에서 아르카는 대장간이란 곳을 경험했다. 그리고 곧바로 얌전해졌다.
검에게 있어 대장간은 트라우마와도 같았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망치 소리, 담금질하는 솥.
아르카가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간접 체험한 곳은 대장간이었다.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두꺼운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아채서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망치질을 하는 대장장이들.
아르카는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마스터가 매우 좋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Master는 아르카의 실용성에 대해서 좀 더 깨닫는 날이 오길 고대합니다.
“말 많네.”
결국, 아르카는 작은 큐브 형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리에르의 손에 딱 맞는 전용 식칼로 변화하였다.
리에르는 방금 유트가 따온 채소를 냇가에서 씻었다. 그러고는 잎사귀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털어내어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리에르는 채소를 고정하고 아르카로 채를 썰기 시작했다.
-채소 신선도 이상 없음. 썰어진 채소의 경사각 원활함. 날의 수직항력과 도마의 마찰력 비례관계 양호. 마찰 계수는 우호적인 수치. 이대로 마찰을 반복 운동하시면 됩니다.
리에르는 손안에 쥔 아르카가 소란을 떠는 것을 보고 기가 차서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불만 있지?”
-아르카 Program은 User의 사용 빈도에 따라 발전하는 인공 System입니다. Master를 신용하고, 따르는 아르카입니다. 주의 바랍니다, 손가락을 베일 확률이 발생합니다.
“윽.”
리에르는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르카에게 베인 손가락에서 붉은 실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친 손가락을 입안에 넣었다.
살짝 스친 덕분에 큰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옆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리에르는 요리 중에 하지 않던 실수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아르카의 다음 대사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ㅋㅋ.
“너 방금 웃은 거냐?”
-Master의 질문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아르카 Program은 감정 표현이 Set-Up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방금 ㅋㅋ는 뭐냐?”
-아르카 내부의 Program이 아무런 충돌 없이 제어될 시에 벌어지는 성공 개수의 할애를 필요로 하며.
“됐다, 됐어.”
리에르는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 언저리를 짚어 보였다.
리에르를 포함한 일행들에 엘프 모자가 포함되어 여행을 시작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일행이 알게 된 것은 여성 엘프의 이름이 운디라 프리하르트라는 것. 그리고 꼬마 엘프의 이름이 가이라 프리하르트라는 것이었다.
운디라는 매우 자상하고, 침착한 여성이었다. 처음엔 남편을 잃은 슬픔에 몸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를 지켜야 하는 모성이 그녀를 일으켰다.
반면 그녀의 아이인 가이라는 여전히 리에르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가이라와 유이는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한 사람과 한 엘프. 그들은 동맹을 맺어 리에르를 괴롭히는 만행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리에르도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성을 냈다. 하지만 가이라가 웃음을 되찾은 것을 보고는 그냥 묵묵히 참아냈다.
과거의 이유가 어쨌든 자신은 가이라의 웃음을 빼앗은 장본인이었기에.
지금 현재도 리에르는 유트가 잡아 온 토끼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 하는 노숙 경험이 많았기에 동물 손질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배를 갈라 피를 빼내고, 내장을 잘라내고 가죽을 벗긴다. 일차적인 손질이 끝나면 잠시 냇가에 씻어 핏기를 빼내며 유이와 가이라가 캐온 채소들을 손질했다.
리에르는 일행에게 물었다.
“엘프는 채소도 안 먹지 않아?”
엘프는 숲의 일원으로서 생명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자연 친화적 생명체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동물과 대화하고, 식물과 교감할 줄 알았다.
“그럼 엘프는 뭘 먹고 살라고!”
리에르의 질문에 가이라가 버럭 하며 소리쳤다.
엘프나 인간이나 주식은 거의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무의미한 살생을 벌이고, 미식가로서의 탐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엘프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분만 섭취했다. 아울러 항상 생명에 대한 존엄과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인간 따위완 달라!”
“아니지, 가이. 원숭이 따위와는 다르다고 해야지.”
리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이와 가이라는 물과 고기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두 사람의 합동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유일하게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유트마저도 웃고만 있었다. 리에르는 지금 이 순간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의 설움을 느꼈다.
“진정 나에겐 이제 너밖에 없는 거냐.”
-Master 저에게 욕정합니다.
“됐다, 됐어.”
리에르는 한숨마저 사치인 듯 입을 닫았다. 그러곤 묵묵히 토끼의 등을 식칼, 아니, 아르카를 사용해서 갈랐다.
비록 검은색이라 투박해 보이지만 아르카는 놀랍도록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더군다나 사용자의 마력을 소비해서 뜻하는 대로 변환하는 아르카는 매우 뛰어난 무기였다.
리에르는 레필리아 레소드를 사용할 때마다 무기가 버티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르카를 사용한다면 자신의 모든 실력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좀 도와줘?”
가이와 놀던 유이가 어느새 리에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긴 은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앉았다.
리에르는 왠지 유이가 저번 이후로 사근사근해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그에게는 다소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녀의 이런 친절만은 절대로 거절해야만 되었다.
“모두를 죽일 셈이야?”
“뭐?”
리에르의 말에 유이의 웃음 띤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녀가 만드는 모든 음식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 또 쫓아왔는지 가이라는 성난 얼굴로 유이를 대변하고 나섰다.
“하찮은 원숭이 주제에 왜 우리 누날 구박해!”
“너까지 원숭이냐?”
리에르는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가이라를 노려보았다. 얌전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등 뒤에 날개라도 달린 거로 보이는 꼬마 천사였다. 하지만 들이대도 너무 들이대고 있었다.
리에르는 진지하게 가이라의 버릇을 한 번 고쳐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의 답변이 들려오지 않아도 가이라는 계속해서 입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너같이 못생긴 원숭이가 만드는 요리 따위는 맛없겠지! 유이 누나가 만드는 게 좋아!”
유이는 가이라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꼭 껴안으며 볼을 비볐다. 그녀는 실제 자신의 남동생이 생긴 것처럼 가이라를 예뻐했다. 가이라 또한 유이를 매우 잘 따랐다.
‘가이라, 너 죽고 싶은 거냐? 유이 음식 먹고 죽고 싶어? 인간 음식 먹고 죽은 첫 번째 엘프 되어볼래?’
리에르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항상 리에르는 고독함을 달고 살았었다. 공포의 제왕 같은 그에게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고, 그 누구의 접근도 용서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르는 수다스러운 아르카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이와 가이라 패거리(?)에게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의 그라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나날이었다.
리에르는 유이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하는 가이라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못 먹었으니 저런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행 중 정상적인 요리가 가능한 사람은 리에르 하나였다.
리에르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엘프를 아예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곤 익숙한 손놀림으로 토끼 고기를 마저 손질하였다. 유이는 리에르의 익숙한 솜씨를 보고는 감탄한 듯이 입을 열었다.
“저 불쌍한 토끼 옷을 벗기는 거 봐, 가이야.”
“역시 인간은 불순하고 불쾌해.”
리에르는 애써 무시했다.
“아니지, 원숭이만 그런 거야.”
“응, 바보 원숭이.”
리에르는 애써 무시하고 있던 두 사람의 만담에 이마에서 핏줄이 섰다.
-Master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합니다.
아르카는 갑작스러운 리에르의 변화를 감지하고서 메시지를 보냈다. 그 소리를 들은 유이와 가이라는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바보 원숭이 화났나 봐.”
“흥, 우리 엘프족에게 있어선 이해할 수 없어. 어른이 돼서 아이가 말하는 거에 일일이 화를 낸단 말이야?”
“쟤는 키만 컸지, 애야.”
“응, 원숭이 족이니까.”
리에르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전투 모드 변환. 참수도(斬首刀) 버전으로 변화합니다.
리에르가 들고 있던 아르카는 식칼에서 폭넓은 도로 변형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이와 가이라는 재빨리 도주를 시작했다. 리에르는 도주하는 두 사람을 잠시 쫓다가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어른으로서 참아주니까 한도 끝도 없지? 응? 좋은 무력 두고 왜 우리가 대화로 이야기했을까? 자 우리 더 친숙해져 보자?”
리에르가 화를 내도 가이라와 유이는 큰 나무 뒤에서 고개만 불쑥 내밀었다. 그러고는 피식, 하는 비웃음을 동시에 흘려 보였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닮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엘프가 환경에 대한 적응이 빠른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리에르는 속으로 한탄을 내뱉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목발을 짚은 여성이 다가왔다.
“저도 좀 도와드릴게요.”
가이라의 모친이자 광전사의 아내인 운디라였다. 그녀는 혼자서 살림(?)을 도맡아 하는 리에르가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자상한 미소와 금발 머리를 보니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첫사랑의 소녀, 에레사. 항상 다정하고 온화했던 여성. 자신이 성인이 된 것처럼 그녀도 많은 일을 겪고 성숙해져 있을 터였다.
리에르는 운디라에게 긴 귀만 없었다면 에레사가 성장한 모습으로 착각할지도 몰랐다.
분명 다른 인간이라면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내에게 미소를 짓는 일 따윈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가 엘프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운디라라서 그런 것인지.
리에르는 굳이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생각해서 좋을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괜찮아, 금방 끝날 테니까.”
어느새 두 악마는 유트를 괴롭히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이라와 유이가 없으면 리에르도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렇기에 굳이 몸이 불편한 운디라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당신은 계속 혼자서 궂은일을 하셨으니 좀 쉬어야죠.”
운디라는 리에르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아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채소 줄기를 따면서 흙 뿌리를 정리했다.
‘역시 아무리 엘프라도 전업주부인 건가.’
리에르는 새삼 감동했다.
책이나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던 그 전설의 엘프님이 손수 섬섬옥수를 들어 나물을 따는 것은 희한한 경험이었다.